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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블랙리스트 1호’ 정지영
“금융비리·먹튀…우리의 좌절 이유 아닐까?”

by한겨레

7년만에 영화 ‘블랙머니’로 컴백 정지영 감독


부조리한 한국 사회 민낯 밝힌

‘남부군’ ‘부러진 화살’ ‘남영동…’

부당한 대우에도 타협하지 않고

이번엔 ‘론스타 외환은행 사건’ 고발


“나는 예술가 아닌 대중문화 감독

영화 만드는 목적은 대중과의 공유”

한겨레

정지영 감독.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그에게 “펭수를 아느냐”고 물었다. 일흔세살인 그가 트렌드를 얼마나 꿰뚫고 있는지 궁금했다. “잘은 모르지만 알고는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영화감독인 아들이 요즘 유행하는 게 뭔지 끊임없이 알려줘요. 시대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열심히 귀 기울이는데 자극이 되죠. 최근엔 아들이 책을 한권 권해줘서 샀는데 아직 못 읽었네요.(웃음)” 제목이 뭘까. “<90년생이 온다>.”


1946년생이 1990년생을 이해하려는 노력, 즉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려는 부지런함이 그를 36년간 최고의 자리에 있게 해준 비결이 아닐까. 지난 6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찻집에서 만난 정지영 감독은 “영화는 당대 이데올로기가 우리 사회나 개인에게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를 짚는 것이 중요하다. 영화 한편이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겠지만, 작은 노력이 모여 삶은, 사회는 진보한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실제 그는 1983년 데뷔 후 줄곧 시대에 화두를 던지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1990년 <남부군>, 1992년 <하얀전쟁>, 2011년 <부러진 화살>, 2012년 <남영동 1985>까지 그의 영화는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관통했다.


7년 만에 내놓은 새 영화 <블랙머니>(13일 개봉) 역시 금융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요즘 사회의 민낯을 비춘다. <블랙머니>는 2003년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인수해 2012년 하나금융에 팔고 한국을 떠난, 이른바 ‘론스타 외환은행 먹튀 사건’이 소재다. 그는 “금융자본시대를 압축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모피아’(옛 재무부의 약칭 ‘MOF’와 ‘마피아’의 합성어)로 불릴 정도로 부도덕한 기득권의 행태가 우리의 삶과 사회를 어떻게 망가트릴 수 있는지 환기하고 싶었다”고 했다. 영화에서는 양민혁(조진웅) 검사가 성추행 누명을 벗으려고 특정 사건의 내막을 파헤치다가 금융비리의 실체와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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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블랙머니>의 한 장면.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정 감독은 사회 고발성 영화를 만들면서도 대중성과 예술성의 경계에서 균형을 잘 잡아왔다. 스스로 “예술가가 아니라 대중영화 감독”이라고 생각한다. <블랙머니>는 특히 대중성에 신경 썼다. 누구나 잘 이해하도록 복잡한 금융비리를 쉽게 풀어내는 데 초점을 맞췄다. “금융 전문 용어가 너무 많아 과감하게 정보를 최소화시켰다. 다 알려진 내용을 관객이 흥미롭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고 했다. 그래서 영화는 이해하기 쉽다. 다만, 현재 진행형인 심각한 사건에 대한 깊은 울림을 전하지는 못한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물으니 “내 영화의 목적은 대중과의 공유다. 관객이 이해하지 못하면 의미가 없다”고 말했다. 1997년 외환위기를 쉽게 풀어낸 <국가부도의 날>이 350만 관객을 동원한 것을 보고 힘을 얻었다고 한다.


예술가로서의 욕심보단 대중과의 소통을 먼저 생각해온 감독. 그는 영화로 세상을 바꾸려 노력해왔음에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는 듯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걸 경계했다. “현실을 극복할 방법을 선택하는 것이지 엄청난 사명감을 갖고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그는 스크린 밖에서도 사회를 바꾸기 위한 목소리를 거침없이 내왔다. 2006년 ‘스크린쿼터 대책위’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아 스크린쿼터 축소 반대 운동에 앞장섰고, 2013년 <천안함 프로젝트> 상영이 중단됐을 때도 “문화에 대한 폭력”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고 김근태 의원의 고문 은폐 사건을 담은 <남영동 1985>를 이명박 정권 시절 개봉하기도 했다. 그래서일까. 그는 <남영동 1985> 이후 7년 동안 준비하던 작품이 계속 엎어지는 등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나고 보니 블랙리스트 1호였다”고 했다. 그런데도 타협하지 않는다. 차기작도 ‘삼례 나라슈퍼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이들을 내세워 공권력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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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영 감독.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 제공

검찰 개혁이 화두에 오르고, 아직도 ‘모피아’가 경제를 지배하는 2019년, 그가 <블랙머니>를 들고 돌아온 것은 여러모로 뜻깊다. 특히 올해는 한국영화 100돌이기도 하다. 100년 역사의 3분의 1을 함께해온 그는 “한국영화의 암흑기에 시작해서 최전성기까지 경험한 감회가 새롭다”고 말했다. 검열 때문에 마음대로 영화를 찍을 수가 없어서 데뷔작이 공교롭게도 멜로영화(<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였다는데, 한국영화가 할리우드에 진출하고 표현의 자유를 얻은 이 시대에 영화를 시작하는 감독들이 부럽다고도 했다. 지금 영화를 마음껏 만들라면 어떤 필모그래피를 남겼을 것 같으냐고 물으니 “비슷한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라며 “취향은 달라지지 않는다”며 웃었다.


그러면서 끊임없이 시대를 공부하고 영화로 화두를 던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36년간 영화를 하면서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힘들다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성격이 낙천적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원망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극복할 생각을 해야 하죠. 7년 동안 엎어지기를 반복해도 ‘언젠가는 하겠지’라며 끊임없이 준비했어요. <블랙머니>를 보며 ‘우리가 절망하고 좌절하는 게 저런 일 때문일지 모른다, 그렇지 않니?’ 관객과 그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남지은 기자 myviollet@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