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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프릴 달린 블라우스, 치마…남성성을 위협하지 않는다는 신호

by한겨레

[토요판] 이유리의 그림 속 여성


28. 애나 클럼키, ‘로자 보뇌르의 초상’


남편의 시선 아래서


아이 돌보는 자화상


사회적 성공 일군 여성도


프릴 달린 옷 입는 증후군


유명 여성 화가들도


거부 못한 사회적 시선


요즘엔 달라졌을까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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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리에 방송된 제이티비시(JTBC)의 예능 프로그램 <비긴 어게인 3>은 많은 이야깃거리를 낳았다. <비긴 어게인>은 국내 최정상의 음악가들이 낯선 외국의 거리에서 ‘버스킹’을 하며 현지인과 소통하는 과정을 보여준 음악 프로그램인데, 노래 말고도 화제가 된 것이 또 있었다. 그 회차에서 유일한 여성 출연자였던 가수 태연이 여행 내내 숙소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다른 멤버들이 잠든 사이 청소와 집안 정리를 도맡아 한 장면이 공개된 것이다. 태연도 다른 남성 출연자와 똑같이 버스킹 일정을 소화했는데 도대체 왜 자발적으로 가사노동을 했을까? 누가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성공한 여성이 여성성 더 부각하는 이유는


프랑스의 화가 마리니콜 베스티에(1767~1846)의 자화상을 봤을 때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다. 마리니콜 베스티에는 화가의 딸이었다. 물감 냄새가 배어 있는 집에서 자라서인지 그녀는 자연스레 붓을 들었다. 아버지의 재능을 이어받은 딸이었기에 어쩌면 화가로서 명성을 날리겠다는 야망을 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결혼 뒤 그린 자화상에서 그녀는 웬일인지 아내와 어머니로서의 모습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캔버스에 한창 그리고 있는 초상화는 남편 프랑수아 뒤몽. 남편의 시선 아래에서, 마리니콜 베스티에는 그림을 그리는 동시에 아들을 돌보고 있다. 마치 자신의 본분은 ‘현모양처’라는 걸 잊지 않았다는 듯이.


마리니콜 베스티에는 왜 그랬을까. 아마 그는 남성 중심 사회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했을 것이다. 가부장 사회는 여성에게 직업인으로서의 모습보다 남성이 바라는 여성 역할을 더 강조해왔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프릴 달린 블라우스 증후군’이라는 말까지 있겠는가. 여성학자 베티 프리단에 따르면 사회에서 성공한 여성들은 의식적으로 프릴(잔주름 장식 천)이 달린 여성성이 부각된 옷을 입거나 쿠키를 구워서 남편 지인들에게 돌리는 등의 행동을 한다고 한다. 자신이 여성성을 버리지 않았으며, 남성 사회를 위협하지 않는다는 신호인 셈이다. 여성이 사회적으로 평판이 좋다는 것은 단지 직업적 성취가 크다는 것뿐만 아니라 가부장 남성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의미도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성공한 여성도 여간해서는 이 암묵적 규칙을 무시하기 어렵다. 사회가 규정한 여성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며 살았던, 프랑스의 동물화가 로자 보뇌르(1822~1899)의 경우를 보자.


여기, 일흔여섯 살의 로자 보뇌르가 앉아 있다. 그녀는 두 마리의 야생마를 그리다가 잠깐 몸을 돌린 듯하다. 웃옷에 달린 레지옹 도뇌르 훈장으로 짐작할 수 있듯 그녀는 이미 예술계에 큰 족적을 남겼다. 하지만 차림새는 소박하고 단출하다. 경쾌하게 단발로 자른 백발에, 통 넓고 긴 치마, 수수한 재킷…. 그러다가 이 그림이 그려진 연도를 보면 의아해진다. 아니 1898년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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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뇌르의 차림새는 당대 여성들의 모습과 크게 달랐다. 19세기 여성들은 코르셋으로 허리를 조른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머리는 길게 길러 뒤로 올려 묶어야 했다. 이는 노인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지만 보뇌르는 보란 듯 이러한 관습에 벗어나 살았다. 머리는 짧게 잘랐으며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웠고, 경찰서에서 ‘이성 복장 착용 허가’까지 받아가며 바지를 입었다. 게다가 그녀는 레즈비언이었다. 평생 결혼하지도 않고 나탈리 미카와 40년 동안, 미카 사망 후엔 여성 화가 애나 클럼키와 여생을 보냈다. <로자 보뇌르의 초상>이 바로 연인인 클럼키가 그린 작품이다. 21세기에도 동성애에 ‘반대’한다는 말이 서슴지 않고 나오는 판국인데 19세기엔 어땠겠는가. 하지만 온갖 구설에 오르면서도 그녀는 화가로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1848년 파리 살롱에서 쿠르베, 밀레 등을 제치고 영예의 대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1855년에도 파리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는 등 스타가 됐다. 영국 빅토리아 여왕이 특별히 윈저성에서 전시를 열어주고 미국에선 ‘로자 보뇌르 인형’이 불티나게 팔릴 정도였다.


그도 거부할 수 없었던 사회적 시선


하지만 너무 많은 인기를 얻어서였을까. ‘파격과 용기의 화신’ 보뇌르조차도 말년엔 사회의 시선에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어린 시절에 소년처럼 옷을 입고 파리의 거리를 망아지처럼 뛰어다녔다는 소문에 펄쩍 뛰었으며, 머리를 단발로 자른 것도 어머니 사후 곱슬머리를 손질해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그러나 이 해명은 어머니가 숨졌던 11살 때는 납득이 되나, 이후 60년 넘게 여전히 짧은 머리를 고수한 사실은 설명하지 못한다.


또 보뇌르는 클럼키가 그린 초상화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남성복 차림의 모습을 그림이나 사진으로 남기는 것을 원치 않았으며, 바지를 입은 상태로는 결코 인터뷰를 한 적이 없었다. 단지 스케치를 하기 위해 마시장과 도살장에서 말을 관찰할 때, 거추장스러운 드레스 대신 불가피하게 바지를 입었을 뿐이라고 자신을 변호했다. 전기 작가와의 인터뷰에서 격정적인 말투로 억울함을 토로하기도 했다. “행여 당신이 이 차림새에 조금이라도 불쾌감을 느낀다면, 나는 당장에 치마로 갈아입을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다. 옷장 문을 열고 여성적인 옷차림으로 구색에 맞는 것을 찾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로 보뇌르의 옷장 속 드레스는 좀처럼 밖을 나올 기회가 없었다. 말년까지 그녀는 집안 작업실에서든 스케치를 위해 집 밖으로 나가서든 늘 바지를 입었기 때문이다. 보뇌르마저도 ‘여성성의 신화’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는 건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확인된다. “비록 내 옷차림이 변화되긴 했지만 나는 어떤 여성보다도 더 섬세함을 음미했다. 퉁명스럽고 비사교적이기까지 한 나의 기질도 내 마음이 완전하게 여성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아무것도 무서울 것 없어 보이는 보뇌르조차 ‘프릴 달린 블라우스 증후군’의 포로였던 것이다.


첫 직장을 구했을 때, ‘여자의 사회생활 필승비법’이라는 글을 찾아 읽은 적이 있다. 여성은 일만 잘해선 안 된다는 내용이었다. 술자리에서 빼지 않고 주는 대로 잘 받아먹는 ‘털털한(남자 같은) 후배’로 지내다가, 가끔씩 선배들에게 어려움을 토로하고 도움을 청하는 ‘약하고 귀여운 모습’을 보여주라고. 그리고 남자 동료들이 귀찮아 꺼리는 일을 일부러 챙기는 ‘엄마 같은 모습’까지 보여주면 금상첨화라고. 사회생활 시작 전부터 의욕을 꺾는 글이었다. 요즘에는 달라졌을까? 글쎄. 여전히 프릴 달린 블라우스와 서류 뭉치 사이에서 안간힘 쓰는 여성들이 있지 않은지 주변을 돌아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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