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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제국의 시대’ 롤러코스터 탄 여성예술인들

by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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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1월4일 최승희의 일본식 한자 발음인 ‘사이 쇼키’(Sai Shoki)라는 친필 서명이 있는 사진. 책과함께 제공

‘반도의 무희’, ‘조선의 이사도라 덩컨’으로 일컬어졌던 최승희는 1935년부터 출세가도를 달렸다. 일본 도쿄에서 14년, 유럽과 남미에서 3년, 월북 뒤 평양에서 18년, 중국 베이징에서 4년 동안 활동한 그는 영광과 치욕을 함께 겪었다. ‘재패니즈 댄서’ ‘코리안 댄서’ ‘친일 매국노’ ‘반일 선동자’ ‘제국 일본의 프로파간다’ ‘인터내셔널 예술가’ ‘교만한 예술인’ 사이를 평생 오갔던 그의 곁에는 남편 안막과 가족이 있었지만 그들의 삶도 시대적 변화와 함께 파도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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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의 ‘최승희 무용연구소’에서 무용지도를 하고 있는 최승희. 사진 맨 앞줄 왼쪽 인물은 남한의 원로 무용가가 된 김백봉이다. 김백봉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안막의 남동생인 안제승의 부인이다. 김백봉은 한국전쟁 때 1.4후퇴 시 남편과 함께 월남하여 남한에서 최승희 춤의 맥을 이어갔다. 책과함께 제공

배우이자 가수 야마구치 요시코는 1920년 중국에서 태어난 일본인이었다. 만주국 이데올로기인 ‘오족협화’(5개 민족의 협력)의 상징이던 그는 실제론 일본인이었으나 중국인으로 간주되었고 조선인들은 그를 조선 출신이라 믿기도 했다. ‘대동아공영의 아이돌’로서 그는 훗날 정치인과 언론인으로 활동하며 1973년엔 적군파 여성 간부이던 시게노부 후사코, 1979년엔 김일성 주석을 단독 인터뷰했고 인종차별 문제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도 관심을 가졌다. 미국식과 아랍식 이름까지 포함해 리샹란, 야마구치 요시코, 이향란, 자밀라, 셜리 야마구치, 셜리 노구치로 산 그는 “특정 국민국가에 귀속될 수 없는 코즈모폴리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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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7월7일 자민당 참의원 의원에 당선된 야마구치 요시코. 책과함께 제공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은 ‘나치의 치어리더’ ‘히틀러의 정부’ 같은 부역자 낙인을 평생 받았다. 1930년대 <올림피아> <의지의 승리> 등의 작품은 독창적이고 미학적이며 기념비적인 다큐멘터리였던 만큼 나치즘의 프로파간다라고 비판 받았다. 20년 뒤 아프리카 누바족의 모습을 담은 사진집 <누바족의 최후>가 걸작의 반열에 올랐지만 비평가 수전 손택은 신랄하게 비판했다. 완벽한 육체의 숭상과 재현은 파시스트 미학의 주제, 나치 노스탤지어를 꾸준히 보여줄 따름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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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카를 든 레니 리펜슈탈의 자화상. 책과함께 제공

독일 태생으로 히틀러의 제3제국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뒤 ‘미군들의 영원한 연인’으로 불린 할리우드의 ‘섹시스타’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독일의 배신자로 찍혀 죽을 때까지 독일 땅을 밟지 못했다. 육군 신분증을 발급받고 공식적으로 연합군을 도왔던 그는 자유주의 이상을 수호한 프로파간다를 수행했지만 자신이 독일인인가 미국인인가에 대한 아이덴티티를 끝없이 입증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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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피아>를 촬영중인 레니 리펜슈탈. 책과함께 제공

상업권력과 국가권력이 맞붙은 지점에서 살다 간 여성 스타, 그들의 모호한 국가정체성에 대해 지은이 이혜진 세명대 교양학부 교수는 말한다. “‘국민=주권자’라는 국적 관념은 (…)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배척당할 수 있다는 수많은 가능성들이 도처에 널려 있다. 또한 대중은 국가 이데올로기가 형성되는 계기에 직면할 때마다 언제든지 자신의 감각을 재구조화하기도 한다.” 네명의 여성들이 지극한 사랑을 받다가 외면당하는 시대의 롤러코스터를 타게 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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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과 함께한 마를레네 디트리히. 책과함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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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아이돌: 제국의 시대를 살아간 네 명의 여성 예술가

이혜진 지음/책과함께·2만원


무용가 최승희, 배우 겸 가수 리샹란, 영화감독 레니 리펜슈탈, 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까지 ‘제국’과 전쟁의 시대를 살다 간 여성 예술가의 이야기다. 2016년 페미니즘 출판의 봇물이 터진 뒤 지금까지 여성 예술가들을 재조명한 많은 책들이 나왔지만, 이 책은 다국적 정체성을 강요당하면서 소비된 여성 스타와 ‘제국’의 관계를 꼼꼼히 따져 한발 더 들어간다. <제국의 아이돌>이란 제목이 붙은 이유다. 복잡한 정세 속에 줄타기를 하면서 때론 양쪽의 총탄을 기꺼이 맞겠다 나서고(리샹란) 때론 “내가 왜 죄책감을 느껴야 하느냐”고 항의(리펜슈탈)하는 여성 이야기가 엇갈린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