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천 초간정과 감로루, 책장 넘기다 녹음을 베고 스스르…

[여행]by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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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문면 초간정. 도로 바로 옆이지만 작은 협곡에 숲으로 둘러싸여 있어 세상과 단절된 듯 고요하다. 예천=최흥수 기자

예천 용문면에는 금당실마을 외에도 자연을 벗삼아 글을 읽은 선비들의 고졸한 멋이 곳곳에 남아 있다. 마을에서 약 4km 떨어진 초간정은 조선 선조 15년 초간 권문해(1534~1591)가 우리나라 최초의 백과사전인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을 저술하고 심신을 수양하던 곳이다. 초간의 고손자가 1870년 중창한 것으로 금곡천변 암반 위에 절묘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때 정자 마루에 방 하나를 마련해 놓아 초간정사(草澗精舍)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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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대 마루에 방 한 칸을 따로 마련해 ‘초간정사’라는 현판을 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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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 바로 아래 계곡의 솔숲과 연결된 출렁다리.

정자는 도로 바로 옆인데도 이정표가 없으면 쉽게 찾기 힘들다. 도로와 농지 사이 작은 협곡을 이룬 물굽이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하천 주변에 자란 대여섯 그루의 노송이 정자를 호위하듯 감싸고 있어 한여름 무더위에도 바람이 서늘하다. 마룻바닥에 앉으면 책을 읽기 딱 좋은데, 책장을 넘기다가 못 이긴 척 스르르 단잠에 빠져도 좋을 듯하다. 계곡 주변 솔숲으로 어슬렁어슬렁 느린 산책을 즐기기도 적당하다.


초간정에서 약 2.7km 떨어진 산자락에는 함양 박씨 희이재사(希夷齋舍) 건물이 있다. 1600년대에 금당실마을로 들어와 자리 잡은 박종린의 손자 박수겸이 조부의 묘지를 돌보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마당을 가운데 두고 ‘ㅁ’ 자 형태로 건물을 배치했는데, 맨 앞 감로루(感露樓)에서 바라보는 풍광이 일품이다. 지금은 한여름 짙은 녹음이 3개의 넓은 창을 가득 채워 눈이 시리다. 일교차가 커져 새벽이슬이 맺히거나 안개라도 내리는 날이면 누각의 이름처럼 영롱하고 신선한 기운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듯하다. 누각 마루 옆 두 개의 온돌방은 1층에서 아궁이에 불을 때 난방을 하는 구조라 건축물 자체도 독특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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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 용궁면 감로루. 함양 박씨 재사 건물이지만, 2층 누대에서 내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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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창에 한여름 짙은 녹음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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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문사 대장전. 1984년 큰 화재 때 유일하게 재난을 면한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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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로 지정된 대장전의 목각여래삼존좌상과 목각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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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용문사 대장전의 윤장대.

인근에는 천년 고찰 용문사가 있다. 은행나무로 유명한 양평 용문사와 이름이 같다. 예천 용문사는 신라 경문왕 10년(870)에 이 고장 출신 두운선사가 창건했다. 이 절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대웅전을 대신하는 보광명전이 아니라 바로 옆 대장전(大藏殿)이다. 1984년 용문사에 큰 화재가 발생했을 때 유일하게 재해를 피한 건물로 보물 제145호다. 고풍스럽고 화려한 천장의 꽃무늬 장식은 쳐다볼수록 빨려 든다. 내부의 목조여래삼존좌상(목각탱)과 1670년에 만들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윤장대 역시 보물로 지정돼 있다. 6면이 각기 다른 화려한 문양으로 장식된 윤장대 창살도 눈여겨볼 만하다. 윤장대는 훼손을 우려해 평시에는 돌릴 수 없고 음력 3월 3일, 9월 9일 연중 두 차례만 돌린다.


예천=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2019.08.29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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