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호회서 만난 훤칠한 검사 형 “수사 위해 위장 대출 받아달라”

[이슈]by 한국일보

※사기를 포함한 지능범죄는 정보기술(IT)의 발달과 함께 더욱 고도화하고 있습니다. 일확천금의 미끼에 낚이는 순간, 당신도 피해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가 격주 화요일 연재하는 지능범죄 시리즈에서는 그 덫을 피해가는 지혜까지 전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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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안산지청 검사’ 사칭 대출사기 일지 / 김문중 기자/2020-01-27(한국일보)

“선배 뭐 하시는 거예요. 성실하게 국가에 봉사하는 사람을 그렇게 모욕하다가 큰일나요.”


2016년 1월 14일 경기 성남시 판교테크노밸리의 한 정보기술(IT) 기업 직원 신지석(가명ㆍ30)씨는 회사 선배 김윤수(가명ㆍ34)씨에게 버럭 화를 냈다. 신씨는 전날 김씨에게 2년 넘게 알고 지낸 ‘검사 형님’을 소개하고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그런데 다음날 갑자기 김씨가 “너 다 속은 거다”라며 경찰에 검사 형님을 신고하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신씨가 흥분하며 신고를 말리자 김씨는 휴대폰을 열어 통화기록을 내보였다. “황동훈(가명) 수원지검 안산지청 금융범죄3부 검사라고? 내가 대검찰청에 전화했는데 그런 사람 없다더라. 그 사람 가슴에 검사 배지라고 보여준 것도 변호사 배지야.”


그제서야 신씨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황씨와 호형호제하고 지냈지만 이상한 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머리 속에는 의심이 하나 둘 피어 올랐지만 신씨는 어떻게든 그 의심을 밀어내려 했다. 의심이 사실이 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진다는 것을 신씨는 알고 있었다. 그땐 이미 황씨에게 수천 만원을 빌려주고 빚더미에 올라앉은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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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량 동호회에서 만난 A씨에게 수원지검 안산지청 검사 행세를 하며 대출금을 편취한 황모씨는 전형적인 공무원 사칭 사기 범죄 사례다. 황씨 사건 피해자 중 한 명이 21일 본보와 만나 당시 황씨가 '검사 배지'라며 달고 있던 배지 사진을 보여주고 있다. 김정원 기자

자동차 동호회에서 만난 안산지청 황 검사

사건의 발단은 2년 3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문대생들도 고전을 면치 못하던 취업 한파를 뚫고 대학 졸업과 함께 직장을 잡은 신씨. 2013년엔 승용차도 장만했다. 꿈에 그리던 슈퍼카는 아니어도 직장인 첫 차로 손색 없는 국산 중형세단이었다. 차를 이리저리 튜닝하는 재미도 쏠쏠해 그 해 10월부턴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온라인 차량 동호회의 분당 지역 모임에 나갔다.


동호회 사람들과는 대화가 척척 통했다. 특히 두 살 위라는 황씨와는 금세 친해졌다. 남들이 망설이는 튜닝을 과감하게 시도하는 데다 검사라는 말에 호기심이 생겨 동호회 활동 이외에도 사적으로 연락을 주고받았다.


황씨도 신씨가 마음에 들었는지 평일 퇴근길에 종종 불러내 밥을 사줬다. 검사답게 말끔한 양복 차림으로 나타난 그의 가슴 왼편엔 천칭이 그려진 배지가 붙어 있었다. 때때로 황씨 직장인 안산지청 1층에서 만나 근처 식당으로 가기도 했다. 황씨 차의 조수석에 놓인 적색 경광봉과 무전기를 보며 신씨는 영화 속 검사들이 범인을 추적하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에겐 황씨의 모든 게 멋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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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검사ㆍ은행원 사칭 사기방식 / 김문중 기자/2020-01-27(한국일보)

만난 지 다섯 달 정도 지나 신씨는 대학 동창인 이영아(가명ㆍ당시 28)씨에게 황씨를 소개했다. 번듯한 직업에 180㎝가 넘는 키, 선 굵은 외모, 재치 있는 입담까지 갖춘 황씨에게 여자친구가 없는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둘은 마음이 잘 맞았는지 알콩달콩 연애를 했다. 2015년 말에는 결혼준비 소식까지 전했다.

2년 만에 드러낸 본색 “대출 받아 수사 도와달라”

2년여의 시간 동안 둘의 대화 주제는 그저 취미였다. 황씨는 간혹 자신이 맡은 수사 얘기를 하긴 했지만 신씨가 의심할 구석은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던 황씨가 2015년 11월 4일 신씨에게 처음 손을 내밀었다.


그날도 둘은 안산지청에서 만나 약 800m 떨어진 일식집으로 향했다. 황씨는 “한국에서 무분별하게 시장을 확장 중인 일본계 캐피털 회사들의 개인정보 유출을 단속하고 있다”며 “네가 고객으로 위장해 A캐피탈에서 대출을 받으면 그 정보가 어디로 흘러가는지 추적할 수 있으니 도와달라”고 했다. 대출 받은 금액을 황씨에게 송금하면 매달 내야 하는 이자는 대신 내주고 수사가 끝나면 대출 원금을 돌려주겠다고 하니 신씨로서는 손해가 없어 보였다.


신씨는 그 해 11월 5,500만원 가량을 A캐피탈에서 대출 받아 황씨에게 넘겼다. 나중에야 알았지만 황씨와 결혼을 준비하던 이씨도 같은 이유로 수 차례 ‘대출 대행’에 동원돼 2014년 7월부터 8회에 걸쳐 8,000만원 가까이를 황씨에게 송금했다.

‘의심 100단’이 벗긴 그 남자의 가면

황씨는 2016년 1월 적극적으로 추가 타깃을 찾았다. 황씨가 “수사가 커지는데 더 도움 주실 분 없을까?”라고 SOS를 치자 신씨는 주변 사람들에게도 황씨와 만나볼 것을 권했다. 그는 정의로운 수사를 돕기 위한 거라고 철석 같이 믿었다.


신씨의 제안을 받은 사람 중 한 명이 회사 선배 김씨였다. 판교테크노밸리에서 신씨와 함께 김씨를 만난 황씨는 일본계 캐피탈 업체 수사를 언급하며 4,000만원 대출 및 송금을 요구했다. 성이 같은 황교안 당시 국무총리와 자신의 집안 어른이 아는 사이라며 “황 총리도 관심 갖는 수사니 도와주면 나중에 큰 보상이 갈 것”이라고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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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이런 행동하는 공무원, 일단 의심해 보세요 / 김문중 기자/2020-01-27(한국일보)

황씨가 ‘사기 100단’이었다면 김씨는 ‘의심 100단’이었다. 김씨는 황씨가 과도하게 튜닝이 된 중형세단을 몰고 온 순간부터 검사답지 않다는 생각에 한번, 명함을 요구하자 “오늘은 안 가져왔다”며 대화 주제를 돌린 점에 또 한번 황씨의 정체를 의심했다. 평소 각종 수사물과 사기사건 보도를 즐겨보던 김씨는 황씨의 자랑인 검사 배지가 원래 변호사들의 배지일 뿐 아니라 검사들은 통상 배지를 착용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이튿날 김씨가 대검 인사부에 신원확인을 요청하면서 황씨의 사기극은 들통이 났다. 안산지청엔 황씨가 소속됐다는 금융범죄3부라는 조직 자체가 없었다. 물론 황씨와 이름이 같은 검사도 없었다.

미혼이라더니 집엔 부인과 어린 자녀 둘

김씨의 신고로 수사에 착수한 경기 분당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은 초기엔 신씨의 공범 가능성까지 염두에 뒀다. 그만큼 신씨는 황씨에게 정신을 완전히 정복당한 상태였다.


사기인 것을 깨닫자 신씨는 수사에 협조했다. 우선 황씨의 실체를 파악하기 위해 평소처럼 그를 만났다. 경찰은 신씨와 헤어진 황씨의 뒤를 밟았지만 거처가 쉽게 드러나지 않았다. 10일 가까운 잠복 끝에 안산시에서 황씨의 집을 포착했다. 그 집에서 경찰의 눈에 띈 건 황씨의 부인과 어린 자녀 둘. 그는 유부남인 사실을 감쪽같이 숨긴 채 이씨에게 결혼을 약속하며 철저히 이용했던 것이다.


수사는 그 뒤로 두달 간 이어졌다. 동선이 불규칙했던 황씨는 집 인근에 ‘작전용’ 개인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2016년 3월 29일 이곳에서 붙잡히며 그의 사기극은 막을 내렸다. 신분확인 결과 황씨는 신씨보다 손위가 아니라 두 살 아래였다. 2012년까지 C캐피탈에서 일했고, 이후엔 다른 대부업체에서 대출모집 업무를 담당했다.


수사팀이 은행계좌를 압수수색하며 황씨의 사기행각은 줄줄이 드러났다. 26명의 피해자가 더 있었고 모두 안산 지역에서 자란 황씨의 초ㆍ중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들에게 황씨는 ‘유명은행 팀장’이었다. 황씨는 2013년 11월부터 학창시절 친구 등에게 “과장으로 진급하려면 실적이 필요하다”며 1인당 약 3,000만원씩 대출을 요구했다. 마찬가지로 대출금을 자신한테 보내면 세달 후 원금을 갚고, 실적 수당으로 나오는 돈도 주겠다고 했다. 20대 중반이었던 피해자들은 2016년 3월까지 친구를 위해 기꺼이 8억1,200만원 가량의 대출금을 맡겼다.


이런 대출금은 ‘돌려막기’에 사용됐다. 피해자들의 대출이 C캐피탈 같은 고금리 업체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친구 A씨 대출로 청구된 고액의 이자는 B씨가 준 돈으로 내고, B씨의 이자는 C씨의 돈으로 막는 식이었다. 신씨와 이씨에게서 받은 돈도 마찬가지로 쓰였다. 황씨는 남은 돈을 가족 생활비와 외제차 장기임차, 명품 옷 구매, 사무실 임대료 등으로 사용했다.


마지막 관문은 약혼녀 이씨에게 진실을 밝히는 일이었다. 수사가 물밑에서 진행되는 사이 이씨는 이미 부모님을 모시고 황씨와 상견례까지 한 상태였다. 상견례에는 황씨가 고용한 가짜 부모가 동원됐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던 신씨 대신 경찰이 이씨에게 사건의 전말을 알렸다. 분당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 수사관은 “모든 사실을 이씨에게 말했는데도 한동안 믿질 못했다”며 “황씨의 범죄 행각을 사실로 받아들인 뒤에는 몇 시간을 울면서 패닉 상태에 빠졌다”고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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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 끊이지 않는 공무원 사칭 사건 / 김문중 기자/2020-01-27(한국일보)

“검사님, 검사님 소리가 듣기 좋았다”

황씨는 경찰 조사에서 검사 사칭 이유를 “대접받고 싶어서”라고 진술했다. “검사라고 하면 ‘검사님, 검사님’ 하면서 나를 바라보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사기를 칠수록 우월감을 느꼈다”고 했다. 황씨는 20대 초반 경찰관을 사칭해 불법 마사지업소 등을 단속하다 걸려 벌금형(공무원자격사칭죄)을 받은 전력도 있었다.


수원지법은 2016년 7월 황씨의 사기ㆍ사기미수 혐의를 인정해 징역 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범행 규모가 28명의 피해자에게서 9억4,750여만원에 이르는 거액인 점, 피해자들이 높은 이자율의 채무를 고스란히 떠안게 돼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점을 고려했다”고 밝혔다. 피해 금액을 일부라도 변제 받은 이는 5명에 불과했다.


보이스피싱이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한 사기 범죄가 일반화하고 있는 가운데 황씨는 대면사기라는 고전적 수법으로 피해자들의 의심을 피해간 셈이다. 분당경찰서 관계자는 “수사기관은 자체 예산으로 수사를 하지 절대로 외부에 요구하지 않는다”며 “특히 동호회처럼 서로의 배경을 알 수 없는 공동체에서는 우선 의심부터 하고 보는 게 안전하다”고 조언했다.


김정원 기자 gardenk@hankookilbo.com

2020.01.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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