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적 자연 앞에, 마음속 불순물도 걸러진다

[여행]by 경향신문

뉴질랜드 테카포·마운트 쿡

비현실적 자연 앞에, 마음속 불순물도

마운트 쿡에서 흘러내린 빙하수로 이뤄진 테카포 호수와 호숫가 끄트머리에 고즈넉이 자리 잡은 ‘선한 양치기의 교회’. 해질녘 변화무쌍한 색의 변화를 보여주는 호수 풍경은 묘한 치유의 힘이 있다.

삶이 잘 풀려간다고 생각했지만 언젠가 급제동이 걸렸다. 나는 늘 정상적인 질서 안에 있었지만 밖으로 벗어나고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물음과 옷 몇 벌, 등산화만 챙겨 남반구의 작은 섬나라로 떠났다. 나는 백수가 되었다. 3월, 뉴질랜드엔 가을이 오고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녔다. 뉴질랜드 버스는 출발과 도착이 매우 정확하다. 한반도보다 조금 큰 면적이지만 인구는 고작 430만명 정도라서 가장 큰 도시인 오클랜드를 빼고는 교통체증이랄 게 없다. 양이 사람보다 많다. 화산 폭발이 빚어낸 구릉은 척박해서 나무가 높게 자라지 못하고 대신 초원이 끝없이 펼쳐진다. <반지의 제왕> 같은 판타지 영화의 배경으로 사랑받는 이유는 컴퓨터그래픽(CG)처럼 비현실적인 자연환경 덕분이다. 화산은 거칠고, 빙하는 반짝이고, 피오르는 아찔하고, 고사리는 사람보다 크다. 영화에서 본 모든 장면이 여행 내내 현실이 되었다.


때는 가을의 초입이라 초록에서 갈색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양떼는 흰 점으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버스 안에서 까무룩 잠에 들었다가 깨도 또 같은 풍경이지만 하나도 지루하지 않았다. 꿈처럼 옥빛의 커다한 호수와 자그마한 마을이 나타났다. 버스 기사에게 이름을 물었더니 ‘테카포 호수(Lake Tekapo)’란다.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 마운트 쿡(Mt. Cook)에서 흘러나온 빙하수로 이뤄진 호수다.

비현실적 자연 앞에, 마음속 불순물도

테카포 호수에서 자란 왕연어로 만든 요리

맑은 물에 파란 잉크와 하얀 우유를 섞어서 만든 색깔. 호수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치유가 된다.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지만 내 경험으로는 그렇다. 오후 네 시쯤에는 중국인이나 한국인 단체관광객들이 대형버스로 우르르 몰려와 호수 앞에서 인증샷만 찍고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들은 진짜를 놓친 거다. 해질녘이면 호수에서는 빛의 공연이 시작되는데 이게 진짜라는 걸 ‘머무는 여행자’들은 안다. 투명한 블루에서 주황색, 보라색으로 변하다 서서히 검어진다. 카메라는 도저히 색의 스펙트럼을 담지 못했다. 호수에 손을 넣었다. 하늘색 파우더가 묻어나올 것처럼 뽀얗고 파란 호수는 부드러운 인상과는 달리 무척 차갑다. 호수에서 가장 깊은 곳은 수심이 120m나 된다. 유속도 빨라서 테카포 호수는 세계 최고의 연어 양식장이 됐다.


손바닥만 한 초록입홍합과 상큼한 굴을 뉴질랜드 대표 음식으로 꼽지만, 나는 테카포 지역의 연어를 최고급으로 치고 싶다. 테카포 지역은 연어 중 최상품으로 치는 왕연어(King Salmon·Chinook)의 양식지며, 전 세계 생산량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양식을 하기 때문에 산란을 위해 회귀할 필요가 없어진 연어는 운동량이 줄어 지방 함량이 높아졌고 고소함은 더해졌다. 맛만 조금 보려다가 초밥 두 접시와 덮밥까지 해치우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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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꼭대기 천문대에 딸린 ‘아스트로 카페’

다녀온 곳 중 가장 인상적인 카페를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테카포의 산, 마운트 존(Mount John) 꼭대기에 있는 아스트로 카페(Astro Cafe)를 꼽는다. 이름에서 눈치챘겠지만, 별을 관측하는 천문대가 운영하는 곳이다.


천문대 옆에는 온실처럼 생긴 작은 건물이 있고 대회에서 상을 탔다는 바리스타가 커피를 만든다. 카페를 둘러싼 풍경은 커피 한 잔 값만 내고 보기에는 너무 미안할 정도로 아름답다. 천문대까지는 도로가 있어서 차로도 갈 수 있지만, 나는 호수를 간간이 바라보고 산속의 새소리를 들으며 산을 올랐다.


뉴질랜드 남섬, 마운트 어스파이어링과 피오르랜드 국립공원에 걸쳐 있는 트레킹 코스, 루트번(Routeburn)에서 가이드 투어에 참여한 적이 있다. “새가 길을 막고 앉아 있으면 기다려주세요.” 가이드는 뉴질랜드 산에서 새가 스스로 날아갈 때까지는 소리를 내거나 강제로 쫓아내서는 안된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뉴질랜드에서는 하루에 입산할 수 있는 인원이 정해져 있는 경우가 흔하다. 동물을 사냥하거나 식물을 채취하는 것이 금지돼 있거나 허용량이 정해져 있다. 어길 경우 벌금이 적게는 수십만원, 많게는 수천만원이나 되는 등 규정이 엄격하다. 비행기가 뉴질랜드 공항에 도착했을 때 승무원들은 승객의 신발 바닥을 모조리 소독했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보호하려는 의지는 유난스러워 보일 정도로 고집스럽다. 그런 경험을 되새김질하며 산을 오르니 내가 사는 땅과 자꾸 비교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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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정돈된 마운트 쿡 트레킹 코스

호수 끄트머리에는 ‘선한 양치기의 교회(Church of Good Shepherd)’가 있다. 1935년 문을 열었다. 기껏해야 스무 명 남짓 들어갈 수 있을까 말까한 교회는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교회로 알려져 있다. 건축 당시 마을 사람들은 ‘부지를 깎아 내거나 변형하지 않을 것, 주변의 가시덤불까지 보존해 지을 것’이라는 조건을 내걸었다. 땅과 건물이 이질적이지 않은 것은 건축을 배우지 않았어도 자연과의 조화를 먼저 고려할 줄 아는 보통 사람들의 상식 덕분이다. 거리의 쓰레기통 하나도 자연친화적으로 디자인하는 뉴질랜드는 인위적인 것에 관심이 없는 것 같다. 디자인 하면 북유럽을 떠올리지만 여행을 하면서 촌스럽기까지 한 뉴질랜드의 평범함을 사랑하게 되었다. 뉴질랜드 사람들의 옷차림은 수수하다. 면바지에 가벼운 점퍼 차림이고, 여성들은 화장도 짙지 않다. 경쟁이 심하지 않고 느리게 사는 나라의 특징이다. 잠시 머물렀던 집의 주인은 초등학교 선생님이었는데 매일 오전 5시에 퇴근하면서도 ‘삶이 퍽퍽하고 바빠서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투덜거렸다.


교회 안에서 보면 창문 너머 호수가 펼쳐지고 마운트 쿡이 아스라이 보인다. 마운트 쿡은 뉴질랜드 남섬을 수직으로 가로지르는 서던 알프스의 중심이며 뉴질랜드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쿡이라는 이름이 붙은 연유를 잠깐 살펴보자. 태평양 섬나라에 흩어져 살던 폴리네시안의 일부는 13세기쯤 뉴질랜드 땅을 발견해 정착했다. 1642년 뉴질랜드 땅을 처음 찾은 유럽인은 네덜란드인 아벨 타스만(Abel Tasman)이었다. 호주와 뉴질랜드 사이의 바다를 타스만해라고 부른다. 타스만은 고향인 ‘제일란트(Zeeland)’의 이름을 따서 ‘노바 젤란디아(Nova Zeelandia)’라고 이름을 정했다. 이후 1769년 뉴질랜드를 탐험한 영국 장교 제임스 쿡(James Cook) 선장이 ‘New Zealand’라는 영어식 이름으로 바꿨다.


마운트 쿡은 쿡 선장의 이름을 땄지만 나는 ‘아오라키(Aoraki)’라는 마오리어 이름이 훨씬 마음에 든다. ‘구름을 뚫는 산’이라는 뜻이다. 폴리네시아에서 건너와 뉴질랜드에 처음 발을 디딘 마오리인들은 산을 뒤덮은 만년설과 구름을 가려내지 못했던 모양이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져오면…’으로 시작하는 노래, 연가는 한국전쟁에 참전한 뉴질랜드 군인이 퍼트린 마오리 전통 민요 포카레카레 아나(Pokarekare Ana)다. 마오리어로 ‘뉴질랜드’는 ‘아오테아로아(Aotearoa)’ ‘안녕하세요’는 ‘키아 오라(Kia ora)’다. 마오리어는 받침이 거의 없어 어감이 부드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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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칠게 반짝이는 후커 계곡

마운트 쿡에서 유스호스텔에 짐을 내려놓았다. 하루에 트레킹 코스를 하나씩 정복하기로 했다. 사실 여기서는 ‘정복’이라는 말이 적절하지 않다. 그냥 걸으면 되니까. 가장 잘 알려진 후커 밸리(Hooker Valley) 코스는 5㎞ 정도인데 사진을 찍으면서 천천히 걸으면 왕복 4시간 정도 걸린다. 너른 들판 길로 시작하다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흔들다리 3개와 거친 바위 길을 지나면 종착지인 후커 레이크(Hooker Lake)에 도착한다. 불투명한 회색의 빙하 호수는 생소하다. 거친 빛이지만 물에 햇빛이 닿으면 반짝거렸다. 원시의 물빛이다. 온화한 평지와는 달리 마운트 쿡에 비바람이 불면 답이 없다. 매서운 바람에 결국 독감에 걸리고 말았다. 감기약을 먹으면서도 컨디션을 회복하기 위해 매일 저녁 질 좋은 뉴질랜드 소고기에 와인을 곁들였다. 누군가 유스호스텔 냉장고에 브로콜리를 남기고 가면 스테이크의 가니시로 활용해 그럴싸한 플레이팅을 완성했다. 가난한 여행자가 매일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을 만큼 뉴질랜드 소고기 값이 저렴한 것은 또 다른 행복이었다.


식탁 앞엔 남반구가 중심인 세계지도가 걸려 있었다. 우리 표준세계지도와는 달라 한참을 들여다봤다. 너무나 당연한 상식이 당연하지 않을 때가 종종 있다. 북쪽을 위로 생각한 편견이 처음으로 뒤집혔다. 지구는 둥글고 우주는 무한대라서 위아래 개념은 원래 없으니까.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던 질서는 여행을 다니면서 뒤집어지고 헝클어졌다. 살아가면서 낯선 것에 노출되어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쌓였다. 질서를 벗어나면서 나는 또 다른 초심으로 향해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밤이 되어 빨래를 걷으려고 뒷마당으로 나갔다. 키보다 높은 빨랫줄에 매달려 있던 건 옷이 아니라 하얗고 커다랗게 출렁이는 은하수. 목을 완전히 꺾듯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인공의 불빛이 없으니 별무리의 은가루가 알알이 보일 만큼 선명했다. 마음의 불순물도 걷어야 하는 이유. 덧셈을 하기보다는 뺄셈을 하라는 신호를 남반구의 산속에서 받았다. 고백하자면, 이 여행이 계기가 되어 두 번째 직업을 갖게 되었다. 나는 그냥 여행을 했을 뿐인데.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여행작가가 된 실마리를 풀고 있는 중이다.

 

김진 | 여행작가

2019.03.1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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