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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도재기의 천년향기(23)

무리하지 않은 복원
그래서 밉지가 않다

by경향신문

익산 미륵사지 석탑

 

‘미륵사지 석탑’ 전체 구조 등 목조 양식을 돌로 재현, 국내 최고(最古) 최대(最大)석탑…이후에는 양식·표현 간략화

탑에서 나온 사리봉영기에는 ‘왕후는 좌평 사택적덕의 따님’…‘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 역사냐 설화냐 새 국면 맞아

고증자료 없는 상황, 상상력 동원 않고 6층까지만 20년 보수…해체에 10년 공들이고 옛 부재 사용률 81%로 높여, 복원사에 기록될 만

무리하지 않은 복원 그래서 밉지가 않
무리하지 않은 복원 그래서 밉지가 않

백제 무왕 시기인 639년 건립된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은 현존하는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석탑의 시원’이자 가장 큰 석탑이다. 석탑 속 사리공에서는 1300여년 전 봉안한 9900여점의 유물이 쏟아져 나오기도 했다. 사진은 보수정비 작업을 마치고 23일 공개되는 미륵사지 석탑과 보수 전의 모습(원안)이다. 문화재청 제공

이 땅에 탑이 세워진 때는 불교가 전래된 삼국시대다. 지금 우리에게는 석탑이 익숙하지만 처음 세워진 탑은 나무로 만든 목탑들이다. 안타깝게도 국내에 남아 있는 삼국시대의 목탑은 없다(일본에는 6세기 말~7세기 초에 건립된 ‘호류지(法隆寺) 5층 목탑’이 있다). 재료 특성상 석탑에 비해 쉽게 훼손되는 데다, 탑 문화가 석탑으로 대체 발전해서다. 하지만 목탑 관련 기록들이 전해지고, 경주의 황룡사지(터)나 익산의 미륵사터 등에는 목탑이 서있던 유구들이 있다. 4세기 말 불교가 전래되고 초기엔 재료 구하기나 조성도 상대적으로 쉬운 목탑이 세워졌다가 점차 석탑들로 변화한 것으로 보인다. 석탑은 목탑보다 조성은 어렵지만 반영구적이라는 점에서 성스러운 예배의 대상으로 제격이다.


현존하는 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미륵사지 석탑’(국보 11호)이다. 백제시대 사찰인 미륵사에는 원래 목탑을 중심으로 동서쪽에 각각 석탑이 있었지만 지금의 서쪽 석탑만 남았다. 목탑은 유구만 전해지고, 동탑은 1993년 재현됐지만 ‘부실 복원’이란 비판을 받는다. 국내 최고(最古) 석탑인 미륵사지 석탑은 규모도 최대(最大)를 자랑한다. 문화유산이 가지는 최상의 찬사인 ‘최고’ ‘최대’ 같은 수식어가 붙을 만큼 역사적·학술적·예술적으로 가치가 높다. 또 ‘서동요’ 주인공인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러브 스토리’도 얽혀 있는 문화재다. 해체를 통한 보수작업이 거의 20년 만에 완료돼 23일 일반에 공개된다.

백제 보물을 품은 최고·최대의 석탑

미륵사지 석탑은 건립 시기가 ‘명확하게 확인된’ 탑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이다. 탑 속에서 발견된 금석문을 통해 백제 30대 무왕(재위 600~641, 의자왕의 아버지) 때인 639년에는 조성된 것으로 드러났다. 경주의 ‘분황사 모전석탑’(국보 30호)은 이보다 앞서 선덕여왕 때인 634년 분황사 건립 당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유물로 확인된 게 아니라 추정이다.


미륵사지 석탑의 조성 시기가 확인된 것은 2009년 1월이다. 보수를 위해 탑을 해체하던 중 내부에서 사리공(사리·공양품을 봉안하는 공간)이 발견됐고 그 안에서 나온 유물을 통해서다. 밖에선 잘 보이지 않지만 석탑 내부 가장 중심에는 핵심 구조물인 심주(心柱·사각형의 돌인 심주석들로 쌓은 돌기둥)가 있다. 17개의 심주석으로 구성된 심주는 탑 속 4층까지 서있다. 사리공은 탑 1층의 심주석에 마련됐는데 그 속에서는 1300여년 전 무왕시대의 금·은·청동·유리제 유물들이 무더기로 쏟아졌다. ‘금동제 사리외호’ ‘금제 사리내호’, ‘청동제 합’, 직물류와 구슬 등 무려 9900여점이다. 그중에는 사리·공양품의 봉안 경위 등을 새겨놓은 ‘금제 사리봉영기’가 있다. 가로 15.3㎝, 세로 10.3㎝의 얇은 금판인 사리봉영기에는 앞뒷면에 193자의 한자가 음각으로 새겨졌다. 명문을 보면 ‘己亥年’(기해년)에 사리를 봉안하며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인데, 기해년이 바로 639년이다. 고고학적 대발견인 절대연대가 확인된 것이다. 백제의 빼어난 공예수준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 유물들은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란 이름으로, 보물 1991호다. 유물 중에는 금·유리·진주·호박 등 갖가지 재질과 색깔의 구슬이 많은데, 수백점의 진주 구슬은 수입품이기도 하다.

무리하지 않은 복원 그래서 밉지가 않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발전과정을 보여주는 미륵사지 석탑은 1층 문을 통해 탑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다. 중앙의 심주석과 십자형 통로가 있는 1층 내부.

미륵사지 석탑은 목조건축물인 목탑에서 석탑으로의 발전과정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석탑의 시초·시원’으로 불리는 이유다. 전체 구조나 형태, 몸돌, 지붕돌 등을 자세히 살펴보면 목조건축 양식을 돌로 재현했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1627개에 이르는 석재를 차곡차곡 안정적 구조로 쌓아올렸다. 특히 1층엔 목조건축물의 기둥 같은 것들이 있고, 문도 달려 있었다. 사방의 문을 통해 탑 안으로 들어서면 심주석을 중심으로 십(十)자형 통로가 나있어 탑 안팎으로 드나들 수 있다. 목조건물의 지붕을 닮은 지붕돌은 처마를 표현하듯 네 귀퉁이 끝이 살짝 들려있다. 석탑이 목탑에서 발전했다는 근거는 백제의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9호)이나 신라, 통일신라 석탑들에서도 보인다.


시대가 흐르면서 석탑은 점차 목조건축 양식·표현이 간략화되고 석조건축물로서의 틀을 갖춘다. 한 세대가 지나 682년 세워진 경주의 ‘감은사지 동서 삼층석탑’(국보 112호)을 보면, 목조건축 양식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전 석탑들에 비해 많이 줄어들었다. 이후 탑의 규모도 점점 작아진다. 규모가 작아지다 보니 1층 탑신에 출입문 대신 감실을 만들거나 아예 문 모양을 조각해 놓기도 한다. 현재 미륵사지 석탑은 일부가 무너져 6층까지만 남았지만 규모가 가장 큰 석탑이다. 높이가 14.5m, 기단 폭은 12.4m로 동아시아 최대 규모다. 언제 어떻게 6층만 남게 됐는지, 백제 때의 원형은 몇 층인지 알 수 없다. 다만 통일신라시대에 지진이 있었고, 18세기 때만 해도 7층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1910년 촬영된 사진에는 지금 같은 형태의 6층만 남았다.


미륵사지 석탑이 서 있는 미륵사터(사적 150호)는 익산시 금마면 용화산(미륵산) 아래에 자리한 삼국시대 최대 규모의 사찰 터다. 미륵사는 가람 배치가 1개의 금당에 1기의 탑이 있는 ‘1탑 1금당’인 기존과 달리 ‘3탑 3금당’으로 독특하다. 이는 미륵보살이 세번의 설법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신앙을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란 해석이다. 석가탑·다보탑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불국사가 화엄사상을 건축적으로 구현해낸 것과 같은 이치다.

무리하지 않은 복원 그래서 밉지가 않

심주석에 마련된 사리공에서 유물을 수습하는 장면.

미륵사는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의 창건 설화로 잘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마를 캐던 아이(서동)에서 왕이 된 무왕은 왕비 선화공주와 함께 행차하던 중 용화산 아래 연못에서 미륵삼존불을 만난다. 왕비가 그 자리에 사찰 건립을 소망해 미륵사가 세워졌다는 내용이다. 이에 따라 미륵사, 미륵사지 석탑도 당연히 선화공주와 관련 있을 것으로 알려져왔다. 하지만 앞서 언급한 ‘금제 사리봉영기’에는 무왕의 왕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로 기록돼 있다. 이 명문으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사랑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이냐, 가공된 설화냐를 둘러싼 논란이 새 국면을 맞았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도 여전하다. 그래서 무왕과 선화공주가 묻힌 것으로 전해지는 ‘익산 쌍릉’(사적 87호)이 주목받고, 관련된 새로운 자료의 발굴을 기다린다.

또 하나의 역사가 만들어지다

부처의 사리를 봉안한 석탑은 성스러운 예배 대상으로, 불교 확산에 따라 전국에 조성됐다. 당시엔 지배층의 후원을 받아 최고 수준의 장인들이 제작에 나섰다. 시대와 지역에 따라 독특하게 세워진 석탑은 종교를 넘어 당대 시대상을 오롯이 담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당시 사람들의 미적감각, 정치체제, 사회문화상, 나아가 기술력 등이 반영된 건축조형물인 것이다. 많은 답사객들이 특별한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석탑을 사계절 찾는 이유다. 특히 한국 석탑은 강도가 높아 다루기 힘든 화강암으로 빚어졌다는 점에서 국제적으로도 자랑할 만한 문화재다.


미륵사지 석탑은 한국 석탑문화를 이야기할 때 늘 가장 먼저 언급된다. 보수를 마치고 공개되는 그 미륵사지 석탑이 또 하나의 큰 의미를 갖게 됐다. 문화재의 보존과 수리, 정비와 복원이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는 1990년대 들어 본격 제기됐다. 1000년 넘게 비바람을 맞으며 석탑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또 1915년에 일제가 보수작업으로 무너진 부분에 덧씌운 180톤의 콘크리트 더미도 미관상은 물론 구조적 안전성에도 큰 부담을 줬다.


결국 1300여년을 버텨오던 석탑은 1998년 구조안전진단을 받았고, 문화재위원회는 1999년 전면 해체를 통한 수리를 결정했다. 해체는 2001년 시작됐지만 콘크리트를 벗겨내고 약해진 석재들을 다루는데 세심한 정성이 필요해 해체 작업에만 10년이 걸렸다. 이후 옛 부재의 오염물 제거와 강도를 높이기 위한 과학적 보존처리, 새 부재들에 관한 기술적 연구, 탑 전체의 구조적 보강방안 등을 진행하면서 2015년 재조립에 들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지난해 수리공정을 끝냈다.


미륵사지 석탑의 보수정비는 무엇보다 추정에 의한 무리한 보수를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 문화재 복원사에 기록될 만하다. 일부에서 9층으로 복원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으나 7층 이상은 부재나 고증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추론을 하지 않았다. 현존하는 탑이 지닌 역사성과 진정성을 고려해 남은 6층까지만 수리하는 것으로 마무리 지었다. 또 전문가들의 검증, 각종 첨단 보존기술의 개발·적용을 통해 원래 부재를 최대한 사용키로 해 원 부재 사용률을 81%로 높였다.

무리하지 않은 복원 그래서 밉지가 않

미륵사지 석탑 조성 경위, 무왕 왕비가 선화공주가 아니라는 사실 등을 기록한 ‘금제 사리봉영기’(앞면).

지난 21일 감사원은 탑 내부의 적심(탑 지탱을 위해 속에 쌓아놓은 돌)을 새 부재로 쌓다가 옛 부재로 바꾼 것을 지적했으나, 역사성 등을 고려할 때 늦게라도 옛 부재를 활용한 것은 오히려 칭찬받을 일이다. 또 부재들 사이의 틈을 메우는 충전재를 실리카퓸 대신 강도가 낮은 황토를 사용한 것도 문제 삼았으나, 현대산업부산물인 실리카퓸보다 천연재료 황토가 석탑에 더 어울리는 복원재료다.


추정에 따른 무리한 복원이 어떤 결과를 낳는가는 바로 옆 ‘미륵사지 동탑’이 잘 말해준다. 지금 같은 보존 기술력도 없으면서 2년 만에 새 부재를 95%나 사용하며 9층으로 우뚝 세웠다. 전문가들로부터 “폭파시키고 싶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비판받는 부실한 복원이다. 지난해 공개된 경주의 월정교도 비슷한 경우다. 고증자료도 없이 해외 사례를 참고해 거의 상상력으로 지음으로써 무리한 복원이라는 지적을 받는다. 미륵사지 석탑 보수정비 사업은 단일 문화재로는 최장 기간의 기록도 세웠다. 경복궁 광화문 현판, 숭례문 단청 등 많은 문화재 복원공사가 ‘빨리빨리’ 진행되면서 얼마나 많은 부작용을 낳았던가. 이제 미륵사지 석탑은 석조문화재 보존수리 벤치마킹을 위해 외국에서 견학 올 정도다.


건립 1300여년 만에 마침내 거듭난 미륵사지 석탑. 시커멓게 풍화되던 콘크리트 더미 자리엔 새 석재들이 쌓아올려졌다. 유구한 시간을 켜켜이 품은 옛 석재들의 독특한 색감 속에 새 석재들은 티가 난다. 새 석재와 옛 석재의 묘한 어우러짐은 지금 이 시대상의 솔직한 반영이다. 보수한 그 흔적이 밉지 않은 이유다. 거듭난 미륵사지 석탑이 새삼 문화유산의 보존과 관리, 보수·복원에 대한 인식을 높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도재기 문화에디터 jaekee@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