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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드 ] 인류학자 이민영의 미식여행

⑦리옹은 우아하고 디종은 달콤하다

by경향신문

프랑스 어머니의 깊은 손맛…최고급 와인의 붉은 유혹 '리옹과 디종'

 

프랑스 미식의 수도 리옹

파리에서 기차타고 2시간

숙소 직원은 당연한 듯 말한다 “부숑에 가실 거죠, 추천해 드리죠”

위대한 셰프들에게 영감을 준 리옹 어머니들의 가정식 백반집

고풍스러운 분위기, 가격도 착하다


요리계의 교황이라는 폴 보퀴즈

그를 사랑한 리옹 시민들은 시장에 셰프의 이름을 붙였다

이것저것 다양한 먹거리를 사서 테이블에서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부르고뉴 와인의 수도 디종

리옹에서 기차로 1시간 반 신선한 식재료가 모이는 도시

부엉이 동판을 따라 한 바퀴 돌면 중세시대로 온 듯 푹 빠져든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 로마네콩티가 이곳에서 나온다

포도밭일부터 와인 빚는 일까지 장인정신이 생생히 살아 있는 곳

디종의 와인투어는 필수다

경향신문

리옹의 미쉐린 빕구르망 식당 르가렛. 부숑답게 고풍스러운 분위기다.

미식의 나라 프랑스 안에서도 ‘미식의 수도’라고 불리는 곳이 있다. 그리고 여기서 조금만 이동하면 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최고급 와인 산지에서 포도밭을 구경하고 와인도 맛볼 수 있다. 바로 리옹(Lyon)과 디종(Dijon)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뜻 이 두 도시 여행을 추천하는 이유는 우선 교통 때문이다. 두 곳 다 프랑스 동남쪽에 있고 기차 이동이 편하다. 파리~리옹은 2시간, 리옹~디종은 1시간 반, 디종~파리는 1시간 반씩밖에 걸리지 않는다. 긴 삼각형 모양으로 딱 세 번만 이동하면 된다. 심지어 디종에서 파리의 샤를드골 공항으로 바로 가는 기차도 있어 편리하다.


유네스코 문화유산들도 보고, 식재료가 풍부하기로 소문난 곳에서 지역 전통음식을 먹으며 우아하게 돌아보는 여행으로 딱 좋다. 직장인도 5일 휴가에 앞뒤로 주말을 붙이면 파리 3박, 리옹 2박, 디종 2박 해서 총 7박9일 정도의 일정을 짤 수 있다. 물론 이미 파리에 다녀온 사람이나 시간 여유가 있다면 리옹과 디종에서 더 오래 머물며 더 많은 것을 체험하길 권한다.

리옹에선 부숑을 빼먹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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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옹의 미쉐린 2스타 Mere Brazier에서 아뮤즈부슈로 나온 어마어마한 사이즈의 파테.

“부숑에 가실 거죠? 좋은 곳들을 추천해드릴게요.”


리옹의 숙소에 도착하니 직원이 간단한 안내를 마치자마자 지도를 펼치며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부숑(bouchon)’은 리옹의 전통 가정식을 파는 식당을 말한다. 나는 구글 평점과 리뷰가 가장 좋고, 미쉐린 빕구르망(한 끼 35유로 이하로 저렴하고 맛도 좋은 식당)에도 선정된 르가렛(Le Garet)이라는 곳을 선택했다. 물과 빵을 포함한 점심 2코스 세트가 19.5유로라는 합리적인 가격부터 고풍스러운 분위기까지 모든 것이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하이힐을 신은 아주머니는 경쾌하게 식당을 돌아다니며 단골손님들과 볼키스를 나눴다. 동시에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으로 메뉴를 추천하고 주문을 받았다. 머리와 수염을 길러 해적처럼 보이는 아저씨는 주방을 지휘했다. 고동 모양으로 생긴 신기한 채소 이름을 알려줄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며 내 주변을 맴돌았는지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잽싸게 다가왔다. 그는 채소 이름을 테이블보 위에 적고 발음 교육까지 철저히 시키더니, 이윽고 나온 부댕(boudin·프랑스 순대)을 놓고 오랜 시간 정성을 들여 만든 음식이라며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았다. 부드럽고 풍부한 맛이 기가 막힐 정도라고 극찬했더니 그는 아이처럼 기뻐했다.


식당 벽에는 1918년에 문을 열었다는 오래된 식당 인증서, 요리 명문 폴 보퀴즈(Paul Bocuse)를 다녔다는 증명서, 각종 명사들이 와서 먹었다는 인증샷이 가득했다. 100년 노포의 맛과 멋을 제대로 누린 뒤 마음이 푸근해져 나왔다.

프랑스 시골 어머니의 손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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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가렛의 주인 아저씨가 테이블에 써준 달팽이 모양의 채소 이름. 두루미냉이였다.

리옹에서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보다 부숑 여러 곳에 가는 것이 훨씬 더 추억에 남을 것이다.


‘어머니 브라지에’(La Mere Brazier)라는 레스토랑에서 인상적인 경험을 했다. 미식 수도로 알려진 리옹의 역사를 가장 잘 담고 있는 상징적인 곳으로 ‘프랑스 요리의 어머니’로 불리는 리옹의 전설적인 요리사 외제니 브라지에(Eugenie Brazier)가 1921년에 문을 연 레스토랑이다. 당시 부르주아의 집에서 일하던 여성 요리사들이 전쟁 후 직업을 잃고 거리로 나와 부숑을 차렸는데, 이들은 요리사가 아니라 ‘어머니’(mere)라 불렸다. 어머니들은 실크산업 등에 종사하는 노동자들부터 사업가와 유명인까지 다양한 손님을 맞았다. 그녀들의 음식은 위대한 셰프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브라지에는 미쉐린 6스타를 받은 최초의 여성 셰프로도 유명하다. 지금은 2008년 이곳을 재단장한 다른 미쉐린 2스타 셰프가 운영하고 있다. 어머니 브라지에의 상을 받고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전통을 굉장히 중시하는 탓인지 파리에서는 보기 힘든 무겁고 투박한 음식이 나왔다. 메뉴판도 나오기 전에 아뮤즈부슈로 나온 파테(pate·페이스트리 반죽으로 만든 파이 크러스트에 고기, 생선, 채소 등을 갈아 만든 소를 채운 후 오븐에 구운 요리)의 양이 어찌나 많던지 애피타이저도 시작하기 전에 벌써 배가 불러올 정도였다. 코스의 마지막, 초콜릿과 파이를 겹겹이 쌓아주면서 “배고프실까봐 이것도 준비했다”고 하는데, 농담이라고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진지했다. 배가 너무 부른 나머지 아플 지경이라 다음날 가려고 예약해두었던 폴 보퀴즈의 식당은 포기하고 말았다. 미식가라면 1965년도에 미쉐린 3스타를 받은 이후 50년 가까이 유지하고 있다는 요리계의 거장 폴 보퀴즈의 식당에 한 번쯤은 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것이 내가 리옹에 온 가장 중요한 목적인데, 폴 보퀴즈를 키운 스승의 식당에서 좌절하고 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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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제니 브라지에(오른쪽)와 그녀의 밑에서 수련한 폴 보퀴즈.

폴 보퀴즈는 젊었을 때 브라지에의 식당에서 훈련을 받았다.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에서 벗어난 누벨 키진(Nouvelle Cuisine·버터, 크림, 고기 등 무거운 재료 위주의 음식에서 벗어나 채소와 재료 본래의 맛을 살리는 조리법)을 선도한 보퀴즈는 1989년과 2011년 미식 평론지 고미요(Gault millau)와 미국 CIA 요리학교에서 최고의 요리사로 뽑을 정도로 전설적인 셰프가 된다. 얼마나 자랑스러우면 리옹 시민들이 시장에 그의 이름을 붙였을까. ‘폴 보퀴즈 시장’(Les Halle de Paul Bocuse) 한가운데에서는 외제니 브라지에와 폴 보퀴즈의 사진이 걸린 전시물을 볼 수 있다. 폴 보퀴즈 시장에서는 리옹의 미쉐린 스타급 레스토랑에 납품하는 재료들을 구입할 수 있다. 이것저것 먹거리를 구입해 시장 안의 테이블에 앉아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근사한 와인 한 잔의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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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와인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최고급 와인 산지 디종 근교에 자리한 한 와이너리의 저장고. 디종을 방문한다면 ‘와인을 만드는 양조장’인 와이너리 투어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포도밭과 저장고 등을 둘러보고 와인을 직접 맛본 뒤 구입할 수 있다.

디종도 신선한 식재료가 모이는 도시다. 시장에서는 빵, 파테, 달팽이 등을 쌓아놓고 판매한다. 중세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는 구시가지를 걸어다니는 ‘부엉이 워킹코스’도 흥미롭다.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화살표를 따라 걷듯, 디종의 돌바닥에 박아놓은 부엉이 동판을 따라 구시가지를 한 바퀴 돌면 중세의 분위기에 푹 빠져들게 된다. 무료 가이드북은 거리 곳곳에 숨어 있는 작은 조각들과 중세시대에 지은 건물에 스민 역사와 문화를 친절하게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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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너리에서 시음한 와인. 오른쪽 끝 2병의 ‘그랑크뤼’와 ‘프리미어 크뤼’를 사오고야 말았다.

디종의 필수 코스는 부르고뉴(Bourgogne) 와인 투어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와인으로 알려진 로마네콩티(Romanee-Conti)를 생산하는 포도밭의 흙을 직접 손에 쥐어보는 흔치 않은 체험을 할 수 있다. 상위 1.4%에 해당하는 그랑크뤼(Grand Crus)급 와인을 만들어내는 양조장들이 이어진 ‘그랑크뤼 로드’도 가볼 수 있다. 다양한 회사에서 여러 코스로 나누어 반일·전일 투어 등을 운영하고 있으니 골라 가면 된다.


내가 신청한 투어의 가이드는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의 소믈리에를 거쳐 와이너리 직원으로 일하다가 와인 가이드가 되었다. 가이드는 부업이며 새벽마다 포도밭에서 일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한 그의 꿈은 자신의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갖는 것이다. “프랑스인이 연평균 70병의 와인을 마시지만, 나는 250병을 마신다”는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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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종의 와인박물관. 냄새 맡고, 맛을 본 후 통에 뱉어내는 시음자들로 시끄럽다.

가이드에 따르면 프랑스의 또 다른 와인 산지로 유명한 보르도(Bordeaux)의 와이너리들이 분업화, 산업화되어 지극히 상업적인 데 반해 부르고뉴는 밭일부터 와인 빚기까지 모든 것을 사람이 직접 하는 장인정신이 살아 있는 곳이다.


디종과 디종의 와인을 너무나 사랑하는 수다스러운 청년 가이드와 함께 최상급 와인인 프리미어크뤼, 그랑크뤼 와인을 골고루 테스팅했다. 결국 약간 알딸딸한 상태에서 그랑크뤼 와인 한 병을 구입하며 투어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연말을 기념할 겸 홀로 송년회도 할 겸 와인박물관 두 곳을 돌았다.


뉘생조르주(Nuits-Saint-Georges)의 유명한 와인박물관 리마지네르(L’Imaginaire)에 오후 늦게 도착했더니 연말연시 단축영업을 한다고 했다. 접수대의 노련한 중년 여성 매니저가 “박물관 입장은 안되지만 이왕 왔으니 와인 테스팅이나 좀 하고 가라”고 했다.


연말연시 파티용 와인을 고르는 사람들 틈에서 동네별 와인들을 계속 맛보다가 전날 와인 투어 가이드가 극찬한 와인에 이르렀다. 나에게 계속 설명을 해준 매니저도 추천한 이 지역의 프리미어크뤼 와인이었는데 조화롭고 섬세한 맛이 인상적이었다.


근사한 와인 한 잔은 겨울 부르고뉴 특유의 뼛속까지 스며드는 한기와 우울을 날리고, 새해에는 아름다운 세상을 맞이할 것이라는 예감마저 불러왔다. 내 표정을 본 매니저가 빙긋 웃더니 그랑크뤼 와인을 가져와 한 잔 가득 따라주면서 말했다. “특별히 당신에게만 이것도 한 잔 줄게요. 이 한 병에 110유로(약 14만원)예요. 접수대 언니한테 말하면 안돼요. 알죠?” 덕분에 안개가 가득한 적막한 밤길을 혼자지만 따뜻하게 걸어올 수 있었다.


필자 이민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