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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서양고전학자 김동훈의 물질인문학

기계와 만난 인간, 제3의 인류가 되다

by경향신문

사이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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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이보그다

1973년에 제작된 드라마 <600만불의 사나이>처럼 눈, 팔, 다리의 전자장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안경, 임플란트, 치열교정기, 콘택트 렌즈, 보청기, 철심, 심장박동기 등을 신체에 장착한 우리도 일종의 사이보그. 인조인간, 기계인간이라고도 불리는 사이보그(cyborg)는 컴퓨터 네트워킹이나 가상현실을 의미하는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와 유기체를 뜻하는 ‘오가니즘(organism)’에서 앞 글자만 결합한 신조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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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로봇공학자 케빈 워릭. 그는 2002년 팔의 말초신경의 하나인 정중신경에 전자장치를 연결하는 데 성공해 인체의 ‘로봇 손’이 가능한 길을 열었다.

2002년 4월 영국의 로봇공학자 케빈 워릭(1954~)은 어깨부터 손목까지 내려오는 정중신경에 전자장치를 연결하는 데 성공했다. 이 장치에는 100개의 미세전극이 들어 있어 뇌에서 손으로 가는 신경정보를 컴퓨터로 보내게 된다. 그러면 이 컴퓨터의 제어를 받는 ‘로봇 손’이 워릭의 손과 똑같이 움직이게 된다. 의료와 로봇공학이 발달되면서 절단된 팔과 다리에 더 정교한 보철물을 장착한 사람들도 늘고 있는 추세다.


사물인터넷 시대에 사물계와 전자계의 결합에 역점을 두었다면, 사이보그 시대에는 신경계와 전자계의 결합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제는 사지가 마비된 경우라도 뇌와 연결된 전자장치를 통해 생각만으로 직접 리모컨을 제어할 수 있으며 꼭 치료 목적이 아니더라도 신체 증강을 위한 변형과 교체가 가능해진 시대다. 인간을 넘어선 인간, 그러니까 포스트휴먼에 대한 비전은 사이보그를 통해 잘 드러나 있다.

이카로스와 자고새의 날개

다이달로스 신화의 ‘비행용 사이보그’

전동기 없이 밀랍·실로 인간과 연결 ‘결함’


신화에서 사이보그 제작 기술이 가장 탁월한 인물을 꼽는다면 아마도 다이달로스일 것이다. 그는 크레타섬에서의 긴 추방 생활 때문에 고향 아테네가 그리웠다. 섬 생활도 싫증이 날 즈음 아들 이카로스와 함께 ‘비행용 사이보그’로 탈출하는 것을 계획한다. 좀 조야하긴 했어도 실과 밀랍으로 깃털을 팔에 장착한 인공날개는 비행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탈출의 기쁨도 잠시, 치명적 결함이 아들의 몸과 날개의 연결부위에서 발생한다. 높이 날아오르자 아들의 날개에 달라붙었던 밀랍이 태양열에 녹아 그만 몸에서 분리되고 만 것. 결국 이카로스는 깊은 바다에 추락하여 목숨을 잃었다. 더 강력한 접착제나 끈을 사용하지 않고 밀랍을 사용한 다이달로스의 사이보그 기술은 이후 더 이상 개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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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사키의 ‘다이달로스와 이카로스’.

다이달로스의 ‘비행용 사이보그’가 실패한 이유를 기체 결함보다는 아들의 윤리적 결함, 그러니까 아버지의 당부를 무시한 아들의 불순종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하지만 그렇게만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오비디우스는 <변신 이야기>에서 이카로스의 추락 이후에 ‘자고새’ 에피소드를 바로 배치했다. 한 마리 자고새가 이카로스의 장례 때 등장하여 다이달로스를 쳐다보고는 “날개를 퍼덕이며 기뻐서 노래를 불렀다”. 자고새는 다이달로스의 조카 페르딕스가 변신한 것. 과거 아테네에서 페르딕스는 삼촌에게 교육을 받으며 물고기 등뼈를 보고 톱을 발명하고 두 개의 무쇠 다리를 묶어 컴퍼스를 만드는 등 총기 넘치는 소년이었다.


그런 페르딕스를 삼촌이 질투한 나머지 열두 살 된 조카를 아크로폴리스에서 언덕 밑으로 떠밀어 버린다. 그러고는 다른 이들에게는 미끄러졌다고 거짓말을 했다. 다행히 아테나 여신은 페르딕스의 재주를 사랑하여 그에게 깃털을 입히고 자고새로 변신케 하였다. 언덕에서 추락하는 그 짧은 순간이라도 새로 변신케 했다면, 신들 중 누구 하나라도 이카로스를 충분히 살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은 다이달로스의 죗값에 대한 응보였다.

사이보그와 밀랍의 생명력

이제 기술적인 측면에서 다이달로스의 ‘비행용 사이보그’가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자.


연결 부위가 헐거워졌으니 더 가까워진 태양신에 의해 밀랍이 녹으면서였다. 팔을 아무리 움직여도 약간의 바람도 주워 담지 못했다. (…) 밀랍은 점성을 잃었다. 그는 맨 팔만 퍼덕일 뿐 버둥거렸지만 떠받칠 곳이 없었다. (오비디우스, <사랑의 기술>에서)


‘비행용 사이보그’에서 날개와 어깨를 연결하는 것은 밀랍과 실이 전부였다. 보통 기계라 할 때 작업기, 전동기, 동력기 세 가지를 말한다. 다이달로스의 비행 사이보그에서 작업기는 날개 장치이고 동력기는 날개를 움직이는 동력인 인간의 팔이다. 전동기는 팔의 동력을 날개에 전달하는 장치인데, 밀랍으로 이 장치를 만들다 보니 거기서 치명적 결함이 생긴 것이다. 팔에 있던 생명력은 밀랍으로는 날개에까지 전달되지 않았다.


반면 조카 페르딕스는 자고새로 변신하면서 “천재적 민첩함에 있던 생명력(vigor)이 새의 날개와 다리로 들어갔다”(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에서). 가만히 놔두어도 꿈틀대는 생명력은 이제 날개와 새의 다리로 들어가 ‘한 생물로의 진화’를 이룬다. 이런 생명력의 전달을 공진화(共進化)로 이해할 수 있다.


‘공진화’란 미국 생물학자 폴 얼리치와 식물학자 피터 레이븐이 1964년 출간한 논문에 처음 사용한 용어로 2종 이상의 생물이 ‘상호작용’하면서 진화한다는 개념이다. 유기체는 환경과 결합하되 확장하고 공격받으며 다양한 형태로 변한다. 하지만 이런 상호작용 내지 인터랙티브는 이제 생물학 분야에서만이 아니라 기계와 생물 사이에서도 나타난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만든 기계를 통해서 인간과 기계 양자 간 같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신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사이보그가 되겠다”고 말한 다나 해러웨이는 생물학을 전공한 여성학 교수로 사이보그의 특징을 유동성으로 본다. 그녀는 <유인원, 사이보그, 여자: 자연의 재발명>에서 인간은 과거부터 고정된 대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을 만들어 왔듯이 이제 유기체와 기계로 구성된 사이보그로 진화해 간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사이보그를 여성과 남성이라는 차별이 없는 존재, 즉 포스트젠더의 세계에서 만들어진 산물이라는 것. 그러니까 인간은 기계와 결합되어도 기계와의 공진화를 통해 유동적인 육체가 된다고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공진화에는 자연이든 기계든 예기치 못한 결과가 있게 마련이다. 그 예를 보자면 이렇다. 다이달로스는 크레타섬에서 탈출하기에 앞서 오래전에 ‘섹스용 사이보그’를 제작했다. 그는 왕비 파시파에의 간청에 따라 단풍나무로 만든 암소 배 속에 그녀를 들어가게 한 후 황소와 몸을 섞도록 해 주었다. 바로 거기서 태어난 미노타우로스는 뜻밖에도 통제 불능의 괴물. 사람의 몸이지만 소머리를 지닌 데다 그 성깔이 사람도 아니고 소도 아닐 뿐만 아니라, 그 구분은 의미 없고 늘 젊은 남녀의 살덩이를 동일한 비율로 먹어치우는 생명력만 난무한 괴물이었다.

보르헤스의 미노타우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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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515년경의 그리스 도기의 미노타우로스. 크레타왕 미노스의 왕비 파시파에가 나무 암소 배 속에서 황소와 몸을 섞어 태어난 ‘반인반우’의 괴물인 미노타우로스는 미궁 라비린토스에 유폐된다.

1885년에 영국 화가 조지 프레드릭 와츠(1817~1904)가 그린 ‘미노타우로스’에서 이 괴물은 미궁 라비린토스의 꼭대기에 우두커니 서서 노을 지는 먼 하늘을 응시하고 있다. 생각에 깊이 잠긴 얼굴은 둔탁한 소의 형상이다. 무척 쓸쓸해 보인다. 그 눈망울엔 침울하게 보낸 설움이 어렸을 것만 같다.


이 그림에 영감을 얻은 아르헨티나 소설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1899~1986)는 미노타우로스의 원래 이름인 ‘아스테리온’으로 단편을 썼다. ‘아스테리온의 집’. 이 작가는 미노타우로스가 여기에 감금된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을 유폐시켰다고 말하며 원래의 신화를 살짝 비틀어 버린다. 사람들은 ‘반인반우’의 괴물로 태어난 그를 피하기 때문에 미노타우로스는 스스로 괴물의 삶을 살아간다. 그에게 유일한 놀이는 자기와의 대화였다. 오랜 시간 미궁 안에서 이 괴물은 자기의 또 다른 자아를 상상하며 혼자서 문답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둘이서 깔깔거리며 웃는다”.


이런 가상의 놀이도 싫증이 난 것일까? 누군지도 모르면서 보고 싶어 애타는 마음이 파도처럼 밀려오자 혼자 나누었던 물음을 내뱉고 만다. “구원자는 어떻게 생겼을까? 황소일까, 사람일까? 인간의 얼굴을 가진 황소일까? 아니면, 나같이 생겼을까?” 은둔과 고독 속에 지친 사이보그의 파생물이 구원자를 찾다가 결국 테세우스와 마주친다.


아침 햇살이 청동검에서 반짝거렸다. 이미 피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테세우스가 말했다.


“아리아드네, 믿을 수 있겠어? 그 괴물은 방어도 안 했어.” (보르헤스의 ‘아스테리온의 집’, <알레프>에서)


단편은 이렇게 끝난다. 그리움이 뼈에 사무치다 무심코 만난 테세우스를 소머리 괴물은 아무 저항도 없이 기꺼이 받아들였다. 인간도 황소도 아닌, 이쪽도 저쪽도 아닌 경계와 구분을 넘어선 미노타우로스는 괴물로 사느니 인간과 마주치고 싶었던 것이다. 다이달로스가 만든 암소 사이보그와 황소의 생명력, 불에 녹은 촛농처럼 흐느적거리며 강한 증식을 꾀하는 그리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2종 이상 생물 상호작용하며 진화하는 ‘공진화’ 통해

인간은 기계와 결합해 사이보그로 진화…유동적 육체 얻게 돼

사람인지 기계인지, 여성인지 남성인지 경계 없는 ‘포스트 휴먼’의 비전

실패한 ‘괴물’도 생겨날 사이보그의 시대…우리 신체에 붙은 ‘접착물’ 잘 살펴야


인간과 전자기계가 함께 공진화한 결과 사이보그는 한층 더 강화되었다. 하지만 입맛에 맞는 특정 사이보그들이 넘쳐날수록 한쪽 구석에는 또 다른 파생물들이 숨어 있다. 복잡한 기계장치를 하거나 인간의 신체 일부를 이식받은 실험용 동물들. 이들은 특정 집단의 목적을 위해 더 예민한 꼬리를 팔과 다리에 달고 곤충의 더듬이처럼 떨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생명력은 먹잇감을 찾다가도 우두커니 서서 노을 지는 먼 하늘을 응시하며 안길 가슴과 팔을 그리워하는 존재다.


오비디우스는 말한다.


말랑말랑한 밀랍을 보십시오. 이 밀랍으로 새로운 형태를 만들면 거기에는 그 전의 형태가 남지 않을뿐더러, 그 전의 형태로 되돌릴 수도 없습니다.(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에서)


한번 만들면 돌이킬 수 없는 사이보그들. 그래서 무엇보다 책임이 전제된 사이보그 기술로 그 파생물 또한 소중하게 취급되는 미래를 만들어야 한다.


너무 거창한 얘기를 한 것 같다. 우리의 신체 전반에 붙어있는 접착제들부터 살펴보자. 지금 나의 보철물들이 나의 살갗과 근육 속에 잘 있는지, 나의 안경, 임플란트, 보청기, 귀고리 등이 이물감을 느끼게 하지는 않는지, 그리고 안내견들과 휠체어 등이 결합되는 연결부위가 헐거워지고 있지는 않은지 점성 잃은 밀랍들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일부터 시작하자. 밀랍이 열에 의해 점성을 잃었을 때 날개는 이물감만 주는 딱딱한 고체 덩어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 필자 김동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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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서양고전학협동과정에서 희랍과 로마 문학 및 로마 수사학을 공부했고, 현재 고려대 대학원에서 플라톤과 키케로를 연구하고 있다. 서울대, 철학아카데미, 푸른역사아카데미 등에서 라틴어 원전 강독 및 그리스어·라틴어를 강의했다. 네이버 오디오클립 인문 분야 화제의 방송이었던 ‘별별명언’을 진행했으며, <별별명언: 서양 고전을 관통하는 21개 핵심 사유> <브랜드 인문학> 등을 출간했다.


김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