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주꾸미도 '청자'를 찾는데···우연히 길가서 발견한 '것'이 국보라면

by경향신문

경향신문

1963년 날품팔이 하던 주민이 도로공사 중 발견한 ‘금동연가7년명 여래입상.’(국보 제119호) 고구려 불상이 왜 가야 혹은 신라지역에서 발견되었는지 의문이다. 당시 발견자는 2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응? 이게 웬 불상이지?” 1963년 7월 16일 경남 의령 대의면 하촌리 마을밖 도로공사에 품팔이를 나온 마을주민 강갑순씨(40)와 큰아들 전병철군(17)이 야산 비탈의 돌무더기를 파헤치고 있었다. 얼마쯤 파내려 갔을까. 두사람은 깜짝 놀랐다. 걸리적 거리던 잡석 하나를 곡괭이 끝으로 제치자 네모반듯한 작은 공간이 있었고, 그 안에 누워있던 금빛 찬란한 불상을 보았다. 전문가들은 신고된 불상을 친견하고는 경악했다.

“시어머니에게 고기 한근 사드려야죠.”

금동불상은 둥근 연꽃 대좌 위에 중생의 고통을 풀어주는 수인을 하고 있는 부처님이 소용돌이 치는 불꽃 모양의 배모양 광배와 세트를 이루고 있었다. 높이 16.2㎝에 불과하지만 광배 뒷면에 새겨져있는 ‘연가7년 고려국낙랑’(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浪)으로 시작되는 4행 17자의 명문이 불상의 가치를 높였다.

경향신문

‘금동연가 7년명 7년명 여럐입상’. 이 불상은 제작연대(기미년·539년)가 있는 가장 오래된 금동불이다.

이 불상은 ‘기미년(539년)’이라는 제작 연대가 있는 가장 오래된 ‘기년명 금동불’이다. 이 불상은 중국 북위 시대의 양식을 받아들여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으로 재해석한 ‘한국적 조형미의 선구작’으로 꼽힌다. 불상은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의 이름으로 국보(제119호)로 지정됐다. 당시 문화재관리국은 불상을 발견 신고한 강갑순씨 모자와 땅 임자(전모씨·55)에게 각각 20만원씩의 보상금을 나눠주었다.


‘매장문화재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제17조와 21조 등)과 ‘유실물법’(제13조) 등에 따르면 ‘유물 발견신고는 7일 이내에 해야 하며, 발견자와 신고자, 토지 및 건물소유자에게 보상금을 균등하게 지급한다’고 되어 있다. 1963년 쌀값(80㎏ 한가마니·2800원)과 요즘 쌀값(20만원 가량)을 비교할 때 1963년 20만원이면 요즘의 1400만원에 해당된다.(한국은행 자료) 날품팔이로 근근히 살고 있던 강씨 모자는 물론이고 토지 소유자도 국보 문화재를 발견한 덕에 뜻밖에 보상금을 받은 셈이다.

경향신문

금동연가7년명여래입상을 발견한 강갑순씨가 보상금을 타기 위해 상경해서 국립박물관에 진열된 불상을 바라보고 있다. 전답 1평 없이 70이 넘은 시어머니와 5남매를 키워야 했던 강씨는 당시 “보상금으로 빚을 갚고 전답을 사는데 사용하겠다”면서도 “시어머니에게 고기 한근 사드리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1964년 12월16일자

발견자 강갑순씨와 토지소유자가 이듬해 12월 보상금을 받기위해 상경했다는 소식이 대서특필되기도 했다.(경향신문 1964년 12월 16일자) 강갑순씨는 국립박물관을 방문해서 자신이 발견한 ‘금동연가7년명…’ 불상을 친견했고 문화재관리국 직원들의 안내로 5대궁을 관람하기도 했다. 경향신문은 “강씨가 농토라곤 가진 것 없이 70고령의 시어머니와 5남매의 참혹한 살림을 이끌어왔다”고 소개했다. 강갑순씨는 “빚진 5000원을 갚고 나머지 돈으로 전답을 사야겠다”면서 “단 한푼도 헛되이 쓸 수는 없는 돈이지만 시어머니에게 고기 한 근이라도 사다 드려야겠다”고 밝혔다.

경향신문

서울 삼양동 천막집에 살던 박용출씨는 1967년 꿈자리가 사나워 천막집 하수구를 파다가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7호)을 발견했다. 박씨는 지금 기준으로 3300만원에 해당되는 보상금(120만원)을 받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꿈자리 사나워 파본 배수로에서 국보 문화재가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 제127호)의 ‘발견담’ 또한 기가 막힌다. 주민 박용출씨는 서울 청량리의 판잣집이 철거당하는 바람에 삼양동 산동네 국유지에 천막을 치고 살고 있었다. 부인이 채소를 팔아 8식구가 근근히 살아가던 박씨는 1967년 1월 어느날 밤 집 뒤의 산비탈이 무너져 온 식구가 깔려죽는 무서운 꿈을 꾸었다. 꿈자리가 워낙 사나워 불안에 떨었던 박씨는 1월28일 천막집 뒤 산비탈 쪽에 하수도를 깊이 파기 시작했다. 한 1m쯤 파내려갔을까. 곡괭이 끝에 뭔가 금속물질이 닿는 예리한 소리가 울려나왔다. 박씨는 이상한 생각이 들어 주위 흙을 파헤쳐보았고 그곳에서 뜻밖에 금동불상이 나타났다. 박씨는 이 불상을 조심스럽게 파내 며칠간 집에 모셔두었다가 불상전문가를 찾아갔다. 높이 20.7㎝의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살찐 얼굴과 신체, U자형으로 늘어진 옷 등으로 보아 만든 시기는 7세기 전반으로 추정됐다.


천막집에서 8식구가 근근히 살아갔던 박용출씨는 이듬해(1968년) 120만원에 달하는 보상금을 받았다. 불상의 가치는 240만원으로 평가됐지만 발견지점이 국유지여서 국가가 반(120만원), 박용출씨가 반(120만원)을 받게 된 것이다. 화폐가치의 변화를 소비자물가지수로 환산하는 통계청 프로그램에 따르면 1968년 120만원은 2019년 12월 기준으로 3300만원에 달한다.

경향신문

2009년 주민 김헌도씨가 길가다가 발견한 포항 중성리비(국보 제318호). 유물평가액(1억원)의 반(5000만원)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발견지점이 국유지라 평가액의 반(5000만원)은 국가로 돌아갔다.

수도검침원의 남다른 눈썰미

2009년 2월 초 수도검침원인 최순득씨(당시 45)가 경북 경주시 동부동 한 주택의 마당 수돗가에서 검침하고 있다가 희한하게 생긴 돌덩이를 발견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검침원 최씨는 평소 알고 지내던 전문가를 거쳐 국립경주박물관에 발견사실을 알렸다. 과연 국립경주박물관의 조사결과 돌덩이의 한쪽면에서만 200여자의 글자가 확인됐다. 글자의 서체와 음각 양식으로 미루어 이 돌덩이는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문무왕릉비의 윗부분이었다.


682년(신문왕 2년) 경주 사천왕사에 세워진 문무왕릉비는 실전-발견-실전을 거듭하다가 1817년(순조 17년)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경주답사 때 발견되었다. 그러나 추사가 찾아낸 문무왕비는 다시 사라졌으며, 1961년 경주 동부동 민가에서 비석의 아랫부분만 찾아냈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비석의 윗부분이 수도검침원의 눈썰미 덕분에 확인된 것이다. 문무왕비의 윗부분을 발견한 수도검침원과 집주인은 1500만원씩 보상금을 받았다.

경향신문

최대보상금을 기록한 포항 중성리비 발견지점.

울타리 기둥석으로 쓰려던 돌덩이가 국보로

경북 지역에서 줄줄이 발견된 ‘신라비석 트리오’인 울진 봉평신라비(국보 제242호·1988년)와 포항 냉수리비(국보 제264호·1989년), 포항 중성리비(국보 제318호·2009년) 등의 발견 또한 드라마틱하다.


‘울진 봉평비’가 스타트를 끊었다. 1988년 1월 20일 경북 울진 죽변면 봉평리 농민 주두원씨는 논둑에 박힌 커다란 바위가 거추장스러워 포크레인으로 파내어 논두렁에 던져놓은 바 있었다. 그런데 두 달이 지난 3월 20일 이장 권대선씨가 이 논두렁에 박힌 돌덩이를 대문 울타리 기둥석으로 쓰려고 포크레인에 실어 마을 공터로 옮겼다. 그후 내리기 시작한 봄비에 흙이 씻겨나가면서 돌덩이에서 희미한 글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권 이장은 명문 비석의 발견사실을 신고했다. 4월15일 아침 매일신문 기자가 당시 노중국 계명대 교수 연구실을 찾아와 서예가 윤현수씨의 뜬 비석의 명문 탁본을 보여주며 감정을 의뢰했다. 노중국 교수는 깜짝 놀랐다. 신라 6부와 함께 비석의 제작연대를 알 수 있는 간지(갑진·524년)가 보였다. 판독해보니 이 비석은 524년(법흥왕 11년) 신라 영토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울진 백성들의 집단항쟁을 진압하고 관련자들에게 형벌을 내리는 판결문이었다. 문화재관리국은 발견자와 소유자에게 250만원씩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경향신문

충남 태안에서 건져올린 주꾸미가 끌어안고 있던 청자 접시. 이 청자접시의 유물평가액은 12만원에 불과했지만 이 청자가 실마리가 되어 청자를 가득 실은 ‘태안선’이 발굴됐다. 말 그대로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 난파선’이었다. 발견 신고자는 포상금으로 2000만원을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쇠고챙이로 찾아낸 신라고비

봉평리비가 발견된 지 1년이 지난 1989년 3월 31일 오후 웬 20대 청년(이상운씨)이 당시 노중국 계명대 교수실을 방문했다. 마침 연구실에는 당시 주보돈 경북대 교수와 김상현 동국대 교수 등 한국고대사연구회원들이 함께 있었다, “제가 옛 비석을 하나 찾았는데요.” 청년이 펼쳐보인 비석 실물크기의 종이에는 명문 그대로 모사한 글씨가 담겨 있었다. 교수들은 깜짝 놀랐다. 척 보아도 사라(斯羅·신라)와 촌주(村主), 지도로갈문왕(至都盧葛文王), 도사(道使) 등 신라 용어들이 보였다. 국보급 신라고비였다. 교수들은 발견장소와 발견 경위 등을 묻고는 “빨리 당국에 신고하라”고 권유했다.

경향신문

2007년 충남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가 건져올린 청자 26점이 빌미가 되어 고려시대 곡물운반선인 마도 1·2·3호선이 발굴됐다. 최초 신고자는 3300만원이 넘는 포상금을 받았다. |문화재청 제공

그러나 청년은 “다시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비문 모사품을 싸들고 나갔다. 청년은 30분 후 “비의 발견장소가 영천에서 안강 사이”라고 전화로 알려왔다. 노중국 교수 등은 애가 탔다. 대구 지역 한국고대사연구회 소속 회원들에게 급보를 전했다. 한국고대사연구회원들은 영천~안강~포항으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각 마을을 돌며 비석을 찾았다. 심지어는 영천~안강 사이 각 마을에서 긴급임시반상회까지 열도록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이 청년은 이미 원로학자인 심재완 영남대 명예교수에게 판독을 의뢰해 놓은 뒤였던 것이다. 심교수는 주위 교수들과 1차 판독 한 뒤에 언론에 신라고비의 발견사실을 공개했다.


청년은 어떻게 이 비석을 발견했을까. 비석은 청년 아버지 소유의 장골밭에 거꾸로 박혀있었고 지상으로 15㎝ 정도 노출되어 있었다. 경작에 장애만 될 뿐이었다. 1989년 3월30일 오전 10시 청년은 아버지와 함께 이 돌덩이를 빨랫돌로 쓰려고 손수레로 운반한 뒤 자기집 감나무 아래로 옮겨놓았다. 그런데 이 돌덩이에서 뭔가 글자가 새겨져있는 것을 확인했다. 평소 고고학 등에 관심이 많던 청년은 보이는대로 글자를 모사한 뒤 심재완 교수와 노중국 교수를 잇달아 찾아갔던 것이다. 이렇게 발견된 것이 바로 포항(영일) 냉수리비이다. 봉평비(524년)보다 21년 빠른 503년(지증왕 2년) 조성된 비석이었다. 비석은 재물을 둘러싸고 일어난 분쟁에 대한 판결문이다. 문화재관리국은 300만원의 보상금을 지급했다.

경향신문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를 실마리로 본격발굴이 시작되어 켜켜이 쌓아놓은 청자꾸러미가 태안선에서 인양됐다.|문화재청 제공

가장 오래된 비석은 가장 값비싼 비석이 되다

2009년 5월11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중성리 주민 김헌도씨는 자기 집 앞에서 한창이던 도로개설공사 현장을 지나가고 있었다. 김씨의 눈에 걸린 것은 며칠전부터 공사현장에서 눈에 띈 자연석이었다. 크고 평평한 돌이라 화분받침대로 제격이라 여기고 그 무거운 돌을 낑낑 대며 인근 아파트 담벼락 아래로 일단 옮겨놓았다. 다음날인 12일 임시로 옮겨놓은 돌을 확인하러 간 김씨의 눈이 빛났다. 그날(12일) 새벽에 내린 비 때문에 돌에 붙어있던 흙이 씻겨나가자 돌 표면에서 뭔가 낙서 같은 것이 보였다.


비문 첫머리의 ‘신사(辛巳)~’라는 글자가 유독 선명했다. 전문가들은 고졸한 글자, 관직의 명칭 등을 감안하면 ‘501년 신사년’ 혹은 ‘441년 신사년’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짙다고 해석했다. 이 비석은 ‘중앙정부가 5~6세기 이 지역에서 일어난 수조권(세금을 거둘 권리) 분쟁을 해결하고 그 결과를 고지한 판결문’으로 추정된다. 지금까지 확인된 비석 가운데 가장 오래된 비석이라는 점이 이 유물의 가치를 높였다. 당시 보상금 산정위원회는 이 유물의 가치를 1억원으로 책정하고 그 반인 5000만원을 발견자인 김헌도씨에게 지급했다. 발견지점이 국유지였기 때문에 보상금의 반인 5000만원은 국가소유가 됐다. 김씨에게 지급된 5000만원은 지금까지의 문화재 발견 보상금 가운데 최고액이다. 노중국 계명대 명예교수는 “김헌도씨가 발견한 중성리비는 가장 오래된 신라비석이라는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면서 “발견자가 아주 젠틀한 사람이라는 점도 최고액의 보상금을 받는데 일조했다”고 전했다. 포항 중성리비는 국보 제318호로 지정됐다.

경향신문

마도 인근해역에서 발굴한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보물 제1783호). |태안해양유물전시관 제공

주꾸미가 찾아낸 청자의 가치는?

2007년 5월 14일 밤 충남 태안 안흥항 인근에서 주꾸미를 잡던 어민 김용철씨(당시 58)는 바닷가에서 수영하는 꿈을 꾸었다, 어민들 사이에서 ‘물꿈’은 길몽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다음날 아침 태안 대섬 앞바다로 조업을 나간 김씨는 통발에서 주꾸미 800여 마리를 낚았다. 그런데 그중 한마리가 희한했다. 푸른 빛깔의 접시를 발로 끌어안고 있었던 것이다. 그물에 소라 껍데기를 달아놓으면 주꾸미가 그 안에 들어가 알을 낳은 다음 입구를 자갈로 막아놓는다. 그런데 이 주꾸미는 청자접시로 입구를 막고 있었다. 김씨는 4일 뒤인 18일 태안군청에 인양사실을 신고했다. 이 신고를 계기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가 발굴에 돌입했고, 2만5000여점의 유물이 든 이른바 ‘태안선’을 찾아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주꾸미가 찾아낸 고려청자선’이었다,

경향신문

태안선에서 발굴한 ‘청자 퇴화문 두꺼비형 벼루’. 보물 제1782호로 지정됐다.|태안해양유물전시관 소장


김용철씨야말로 ‘태안선’ 발굴의 단초를 마련한 일등공신이었다. 하지만 ‘매장문화재법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의 보상금 규정에 따르면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대접’ 단 1점의 유물평가액은 12만원 뿐이었다. 그것도 김씨의 소유가 아닌 바다에서 발견했기에 국가가 반(6만원)을 챙겼고, 김씨에게 반(6만원)만 돌아왔다. 뭐 물론 문화유산의 발견 신고를 돈으로 환산한다는 것은 좀 그렇지만 그래도 단돈 6만원은 심하지 않는가. 그래서 마련된 법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매장문화재…법률’ 제21조 3항이다.


즉 이 조항은 ‘발굴의 원인을 제공한 자에게는 문화재의 가치와 규모를 고려해서 대통령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포상금을 지급할 수 있다’고 규정해놓았다, 따라서 김용철씨는 발견문화재 신고에 따른 보상금 6만원 외에, 포상금을 더 받을 수 있게 됐다. 김용철씨의 신고가 원인이 되어 발굴한 ‘태안선과 유물’의 가치액은 1억원(1등급)으로 평가됐다. ‘매장문화재 보호 및 조사에 관한 법률’ 시행령이 규정해놓은 포상규정은 1등급의 경우 2000만원+(문화재의 평가액-1억원)×(5/100)이다. 이 계산을 적용하면 ‘2000만원+(1억원-1억원)×5/100=2000만원’이다. 따라서 김씨는 보상금 6만원과 포상금 2000만원(2000만원+0)을 받게 됐다. 김용철씨는 ‘주꾸미가 건져올린 청자대접’ 덕분에 2006만원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김용철씨에게 행운을 안겨준 주꾸미는 공판장으로 팔려나갔으니 사진 한 장 남아있지 않다, 태안선에서 발굴된 유물 가운데 ‘청자 퇴화문 두꺼비형 벼루’가 보물(제1782호)로 지정됐다.

경향신문

보상금 외에 받을 수 있는 포상금 기준. 마도 1·2·3호선 발굴의 단초를 마련한 심선택씨도 보상금으로는 두차례에 걸쳐 5만원씩 총 10만원만 받았다. 그러나 심선택씨 덕분에 건져올린 난파선 3척과 인양유물의 가치는 3억7680만원(1등급)으로 평가됐다. 따라서 포상금 1등급 기준대로 계산한 결과 ‘2000만원+(3억7680만원-1억원)×5/100=3384만원’이었다. 심선택씨는 결국 10만원(보상금)과 3384만원(포상금)을 합해 총 3394만원을 받았다.

난파선 3척의 유물 값어치

그로부터 두 달 여 뒤인 2007년 7월 20일과 27일 태안 마도 인근에서 어부 심선택씨가 청자 26점을 인양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이곳은 ‘태안선’ 발견지점에서 약 2㎞ 떨어진 섬 앞바다였다. 이번에는 주꾸미가 아닌 청자가 그물에 걸렸다. 역시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본격 발굴이 이어졌고, 2009년부터 고려시대 침몰선 3척(마도 1·2·3호)가 잇달아 인양됐다. 마도 1·2·3호선의 화물 대부분은 벼와 쌀·콩·메밀·조·피·기장 등 곡물과 건어물 및 메주, 젓갈류 등이었다. 세 난파선에서 화물표인 목간과 죽찰(竹札) 등이 다량 수습되어 선적물의 내용과 침몰연대를 비교적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마도 유물 중 ‘청자 상감국화모란유로죽문 매병 및 죽찰’과 ‘청자 음각연화절지문 매병 및 죽찰’ 등 두 점이 보물(제1783호·1784호)로 지정됐다. 마도 1·2·3호선 발굴의 단초를 마련한 심선택씨도 보상금으로는 두차례에 걸쳐 5만원씩 총 10만원만 받았다. 그러나 심선택씨 덕분에 건져올린 난파선 3척과 인양유물의 가치는 3억7680만원(1등급)으로 평가됐다. 따라서 포상금 1등급 기준대로 계산한 결과 3384만원이었다. 심선택씨는 결국 10만원(보상금)과 3384만원(포상금)을 합해 총 3394만원을 받은 셈이다. 물론 아무리 가치가 높은 유물을 발견 신고하고, 또 발견 덕분에 아무리 엄청난 유물을 건져올리는 결과를 낳았어도 보상금과 포상금의 규모는 각 1억원을 넘지 못한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보상금 및 포상급 지급 최고액은 포항 중성리비를 발견한 김헌도씨의 5000만원이었다. 만약 김헌도씨가 자기 소유의 토지나 집에서 중성리비를 발견했다면 최고한도의 보상금(1억원)을 받았을 것이다.

보상금 포상금은 그저 아주 적은 성의표시일뿐

최근 5세기 아라가야 시대 무덤(마갑총)에서 확인된 ‘말갑옷 및 고리자루 큰 칼’이 보물(제2041호)로 지정했다. 지금으로부터 28년 전인 1992년 6월6일 아침 아파트 공사현장을 지나던 당시 신문배달학생(이병춘군)이 발견하고 신문지국장(안삼모씨)이 신고한 유물이다.


대학에서 사학을 전공한 지국장이 평소 “함안은 아라가야 중심지이니 언제 어느 곳에서 유물이 나올 지 모른다. 늘 관심을 두고 지켜보라”고 강조했고, 배달학생 또한 공사장에서 목격한 철조각을 허투루 보지 않았기에 발견할 수 있었다. 공사장에서 흔히 나올 수 있는 철조각 더미가 아닌가. 한낱 쓰레기로 치부할 수도 있었던 것을 심상치않은 문화유산으로 여긴 신문배달학생과 지국장의 눈썰미와 열의가 볼수록 신기할 따름이다. 급보를 받고 달려간 당시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연구원이 막 공사를 재개하려던 포크레인을 막아서며 ‘공사중단’ 결정을 통보했다. 단 10분 늦었어도 보물 말갑옷은 포크레인의 삽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판이었다. 발견에서 신고, 그리고 공사중단까지 불과 2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경향신문

1992년 경남 함안 아파트공사장에서 신문배달학생이 발견한 말갑옷. 당시 학생은 철조각만 발견했는데 이것을 사학과 출신 신문지국장에게 알렸고, 신문지국장은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 신고했다. 발견에서 공사중단까지 불과 2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포크레인 삽날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뻔한 보물이 이들의 순발력 덕분에 살아남았다.|문화재청 제공

하지만 발견자 안삼모씨와 신고자 이병춘군은 보상금은 물론이고 포상금도 받지 못했다. 28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이유를 밝혀내기는 어렵다. 다만 발견 당시 발견자와 신고자가 신고한 것은 말갑옷 ‘완제품’이 아니라 파편, 즉 철조각이었기에 법에 따른 ‘보상금’을 받지 못했을 것이다. 불상 혹은 명문비석처럼 발견 당시부터 완제품이 아니었던 이유가 컸으리라.


물론 ‘주꾸미 청자’ 등의 경우처럼 두 사람이 발견·신고한 것은 한낱 철조각이었지만 그 철조각이 실마리가 되어 국립기관(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이 완형의 보물(말갑옷)을 발굴했기 때문에 당연히 포상금 수여대상자가 될 수 있다. 그러나 말갑옷 철편을 발견한 1992년 당시엔 ‘포상금 제도’가 없었다.


얼마전 이 함안 마갑총 발굴 말갑옷이 보물로 지정(제2041호)되었다는 소식에 안삼모·이병춘 등 두사람을 수소문해보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28년이 지난 지금에도 ‘쿨’ 했다. 수소문 끝에 연락이 닿은 발견 당시 신문지국장(안삼모씨)는 “(마갑총 발견 신고는)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당시 신문배달 소년이었던 이병춘씨는 지난해 5월 경남도지사상 시상식에도 불참했다. 함안군청 측은 “그 분(이병춘씨)이 시상식에 불참하는 바람에 상장 등을 우편으로 보내주었다”고 전했다. 필자 역시 이병춘씨에게 여차저차하니 ‘이야기 좀 듣고 싶다’는 문자를 남겼지만 끝내 묵묵부답이었다.


‘우연한 발견’이라는 제목으로 취재하고 기사를 쓰면서 보상금 및 포상금 이야기도 곁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찾은 이들에게 보내는 ‘아주 조그만 성의’일 뿐이다. 그나마 그런 작은 성의조차 전할 수 없었던 예도 많았다. 이제 그들이 찾아낸 문화유산 앞에 그들의 이름 석자를 결코 빼놓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이 기사에서 그들의 실명을 기록해두고 싶다.


안삼모씨의 한마디가 귓전을 때린다. “급했어요. 정화조 공사 때문에 포크레인으로 땅을 파놓은 상태였으니까 정화조를 묻고 덮어버리면 (말갑옷은) 끝장이었죠. 그래서 서둘러 신고한 거죠.”


경향신문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