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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금기에 대한 욕망,
‘괴물’을 소환하다

by경향신문

파편들의 혼종, 프랑켄슈타인


산업혁명 후 사생활의 염원, 인간 육체에 집착…작가들, 변태적 욕망 소설로 묘사

‘프랑켄슈타인’ 속 괴물은 완전한 개인이 인간 집단에 소속되려는 욕망 드러낸 것


권력자가 만든 규정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은 인간 아닌 배척의 대상


정신분석학자 라캉 “인간은 금지되어 결핍된 것만 욕망한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늑대인간·뱀파이어 모두 금기에 대한 위반·수용의 서사

경향신문

근대인 ‘19세기의 육체’는 분해와 조립이 가능한 육체였다. 과학과 자본으로 무장한 근대의 권력, 즉 부르주아지는 육체도 물질에 불과하며 변형하고 지배할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소설 <프랑켄슈타인> 은 그런 육체관에서 탄생했다. 프랑켄슈타인은 3년여에 걸쳐 시체들의 이런저런 부위들을 모아 인간의 형태로 제작한 ‘괴물’이다. 그 결과 소설 <프랑켄슈타인> 의 일러스트(1831년 판본·아래 사진)를 보면 분리된 머리와 널브러진 뼈 등 해부학 실습장을 방불케 한다. 근대 자본과 과학의 권력은 이처럼 꼭두각시 같은 인조인간 제작 ‘게임’을 벌이지만, 그가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은 정체를 드러낼 때 ‘괴물’로 추방한다. 그의 육체는 인간이 아니라는 ‘금기’를 만들어 낸다.

경향신문

지난 1월13일 CNN에 따르면, 개구리 줄기세포를 이용해 ‘제로봇’이라는 생체로봇이 만들어졌다.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면서 자가 치유가 가능하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이로움이 있으리라는 기대도 크지만 혹시 해킹이라도 당해 인체를 공격한다면 어떡할지 그에 못지않은 우려도 있다. 19세기, 근대 과학의 괄목할 만한 성장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불안이 감돌고 있었다. 누드화가 그랬고, 특히 인조인간이 등장하는 소설류가 그랬다.

‘기계적 합리론’이 초래하는 불안감

근대는 영혼과 육체를 따로 떼어놓고 보는 영육이원론의 전성기였다. 근대의 육체는 르네상스 시대와는 달리 분해와 조립이 가능한 듯 보였다. 이런 생각엔 해부학이 한몫했다. 근대의 해부도는 점차 기관과 조직, 세포로 더욱 좁혀지면서 육체가 죽은 물체 덩어리로 보이기 시작한다. 과학자들에 따르면 육체는 물질에 불과할 뿐 그것을 원하는 대로 변형하고 지배할 수 있는 별개의 자아, 곧 이성이 있었다.


19세기에 이르자 눈을 휘둥글게 만드는 누드화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프랑수아 부셰의 ‘오달리스크’(1745),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강아지와 노는 소녀’(1768),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납치’(1799),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그랑드 오달리스크’(1814), ‘터키탕’(1888),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의 ‘목욕 후’(1863), 귀스타브 쿠르베의 ‘샘’(1868), 빈센트 반 고흐의 ‘잠자리에 든 여인의 누드’(1887), 폴 고갱의 ‘지켜보고 있는 망자의 혼(마나오 투파파우)’(1892),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거울 앞에서 옷 벗은 여인’(1897) 등 적나라하게 벗은 몸을 그리는 것이 유행했다.


혁명과 함께 추구된 사생활의 염원은 벌거벗은 육체에 집착했다. 혁명가들은 귀족 타도를 명분으로 삼았지만, 그들이 정작 부러워한 것은 관능적 빛깔의 육체들을 왕들처럼 향유하는 것이었다. 속물근성으로 사생활의 쾌락을 흉내 내고자 했다. 여기서 혁명과 육체의 쾌락이 하나의 코드로 작용한다. 하지만 부르주아지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육체를 마음대로 주무르자 왠지 모를 불안감에 휩싸였다.

사생활의 보장이 초래한 불안감

바로 이때 작가들은 그들의 변태적 욕망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E T A 호프만의 <모래인간>(1816),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 빌리에 드 릴아당의 <미래의 이브>(1886) 등에서 부르주아지들은 인간 창조 게임을 즐긴다. 특히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괴물을 만드는 재료가 참으로 별나다. 주인공인 과학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묘지에 버려진 시체들 중 최상의 부위를 모아 제작할 인간의 재료로 삼았다. 그는 3년간 계속된 실험 끝에 인간 최종병기를 만들어냈다.


소설 <프랑켄슈타인>에서 괴물을 만드는 과정은 창자, 내장, 신경 등의 시체 조각들을 제자리에 다시 집어넣고 꿰매는 해부학 실습장을 방불케 한다. 다른 점이 있다면 하나의 시체가 아닌 여러 종의 최고 부위들로 봉합되었다는 점이다. 이 괴물은 ‘혼종 부위들(partes Hominis)’로 구성된 ‘전체 인간(totum Hominis)’이다. 초능력은 찢어진 각각의 부위가 따로 있으면 죽은 듯하지만 결합되면 미친 듯이 발휘된다.


문학에서 소설 장르의 탄생은 사생활의 철저한 보장과 관련된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에서는 아이로니컬하게도 완전한 개인이 인간 집단에 온전히 소속되려는 욕망을 드러낸다. 마치 대가족 생활을 하다 독립한 자취생이 외로움을 못 이겨 명절 같은 특별한 날이면 가족들 품을 그리워하는 것과 유사하다. 분리불안에 빠지면 무조건적인 결합을 갈망한다. 이 소설에서 괴물 탄생의 비법은 파편화된 시체들의 결합이었다. 이것은 해부학에서 볼 수 있는 절단된 육체, 파편화된 신체에 대한 반작용이며, 사생활이 철저하게 보장되던 근대의 예기치 못한 불안을 말해 주고 있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소통할 수 없는 이유

원작에서 이 괴물의 이름은 따로 주어지지 않았다. 괴물의 이름으로 오해되곤 하는 ‘프랑켄슈타인’은 그 괴물을 만든 과학자의 이름이다. 괴물로만 지칭될 뿐 이름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가 있다. 2m가 넘는 체구, 얼굴에는 온통 꿰맨 자국들, 살갗 위로 적나라하게 돌출된 근육과 혈관…. 이 괴물은 당시 과학자들이 어느 범주에도 규정해 두지 않은 애매한 몸을 지녔다. 이질적인 육체로 결합된 혼종, 육체는 분명 있지만 규정에 없기 때문에 호칭될 수 없는 존재가 괴물이다.


육체는 의미를 새기고 타인에게 읽힐 수 있는 하나의 기호(sign)다. 근대 이전 르네상스 시대까지 육체가 우월한 지위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기호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것은 중세 기독교의 영향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신이 인간 육체로 태어나고 미사의 성찬을 통해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변화되며, 죽은 자가 다시 육체를 갖고 살아나 구원받는다는 교리는 모두 육체성과 관련된다.


그런데 이 육체는 또한 언어로 이해되어 왔다. “말씀이 육체가 되어 우리 속에 있었다(Verbum caro factum est et habitavit in nobis)”(<요한복음> 1장 14절). 포고문과도 같은 이 구절을 통해 기독교는 육체가 언어이며 신과 인간 사이에 있는 매체라 여겼다. 즉 언어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통해 소통한다. 결국 육체는 인간과 신이 조화를 이루는 접점이며, 우주 안에 있는 모든 체계의 근원이자 인간과의 소통 도구, 즉 기호가 된다. 관중들에게 표현하고자 하는 생각을 자신의 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퍼포먼스 등은 육체를 기호로 사용하는 대표적인 예다. 아니, 그런 거창한 예술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뭔가를 나의 몸으로 표현하고 소통한다면 그것이 바로 근대 이전의 인간관을 반영한 삶이다. 몸으로 보이는 모든 행위와 표현이 언어다.


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의 인조인간은 그 육체로 소통할 수 없었다. 그 육체가 어느 범주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소외되고 추방되었다. 신체 자체를 고정된 관점에서 보지 않고 유동적 관점으로 볼 때 더 많은 소수자들이 인간으로 인정될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또 하나의 인간이듯 말이다.

금지된 육체에 대한 욕망

괴물을 뜻하는 영어 ‘몬스터(monster)’는 ‘보여주다’라는 라틴어 ‘몬스타레(monstrare)’에서 왔다. 괴물은 자신의 정체를 보여줘야만 이름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존재다. 소설 속 괴물은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 스스로 언어를 습득하고, 고전을 읽으면 감동하며, 심지어 사랑하는 대상을 그리워했다. 다른 인간과 별반 다르지 않는 괴물은 이런 행동을 통해 자신의 정체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를 만든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비롯한 인간들은 그를 배척하고 끝내 죽이려고 든다. 자신들이 만든 규정에서 이 괴물의 육체는 인간이 아니었다. 여기서 육체를 규정하는 자들의 권력이 드러난다. 권력은 금기를 만드는 자들이 갖고 있다. 금기를 만드는 자가 권력인 셈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는 이 소설에서 과학자 빅터가 인조인간을 창조하기 위해 금지된 지식을 추구하도록 했다. 그녀는 영국 왕립학회의 과학 강연에서 이 소설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거기서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인 에라스무스 다윈의 인공생명체에 대한 강연과 해부학자 갈바니가 죽은 개구리에 전기충격을 주어 근육에 경련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이렇듯 과학의 제분야들이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는 금지된 것들에 대한 도전 때문이다.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자크 라캉(1901~1981)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금지되어 결핍된 것만을 욕망한다. “나는 욕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어떤 육체를 욕망할 때 그것은 금지된 지식에 대한 추구와 관련된다. 과거 신체 해부가 금기였지만 그 금기를 위반했기 때문에 과학은 발전을 거듭했다. 19세기에 나타나는 프랑켄슈타인의 괴물, 뱀파이어, 늑대인간 등은 모두 금기에 대한 위반과 수용의 서사다. ‘금기’라고 할 때 그것은 금기하는 자의 ‘권력’을 따져야 한다. 육체를 욕망하는 것은 금기가 우선이고 그 금기를 만든 권력이 뒤에 작동한다. 육체는 단순히 감각 매체가 아니라 권력이나 이데올로기의 문제로까지 확장시켜 살펴봐야 한다. DNA 정보를 해독한 현재까지도 육체는 더욱더 알고 싶은 욕망의 대상이 되었으며 거기엔 어떤 권력이 작동한다. 과학 발전과 함께 만들어지는 온갖 규정과 금지조항들을 통해 자기들만의 이익을 보려는 속셈이다. 세계 곳곳에서 행해졌던 인종학살이나 종교전쟁, 소수자에 대한 박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거기에도 바로 이런 식의 금기가 있었다. 그 시대를 지배하는 사회적, 정치적, 경제적 차원의 온갖 권력은 육체를 난도질한다.


과학기술과 산업혁명으로 노동의 형태가 다양해지고 부르주아지와 노동계급이 성장하던 19세기에 이르면 금지조항들은 늘어만 갔다. 소수의 기득권은 그 금지조항을 세뇌시키기 위해 대중을 학교를 비롯한 각종 교육기관 속에 집어넣었다. 자신들의 권력을 거역하거나 그 주장에서 벗어나면 게으른 자, 낙오자, 비정상인, 정신병자 등으로 불렀다. 대중매체를 동원해 마녀사냥을 일삼아 격리시켰다. 자신들의 제국에 맹종할 노예들의 육체를 만들기 위해 금지법을 강화했다. 그러더니 자신들의 독무대다. 자신들 이외의 모든 육체를 하나의 소모품으로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추한 육체의 창조 과정에서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이 겪게 되는 감정을 느낀다. 그 금지조항들은 가난한 자들의 ‘질병’을 만들어냈다. 각종 유독물질과 금속가루, 먼지 등에 노출되면서도 근면성실이라는 명목 아래 과도한 노동이 덕목으로 추가되었다. 각종 위험한 일에 내몰리고 건강이 위협받는 장기간의 피로 속에 방치된 현대판 괴물들, 그들에게 남은 것은 자신의 노동과 봉급에 비해 버틸 수 없는 생활비와 마이너스통장, 속앓이로 얻게 된 각종 질병의 진료 청구서뿐이다.


최근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규정은 도전을 받고 있다. 인공치아, 인공관절, 인공심장 등 보철물을 지닌 인간, 사이보그 또는 인조인간 등의 출현을 보면서 인간 신체에 대한 새로운 규정이 행해지고 있다. 하지만 육체의 개념이 그 어느 시대보다도 유동적인 오늘날 자신들만의 편익을 위해 금기를 만드는 권력 앞에서 우리의 몸으로 소통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새로운 시대는 괴물로 치부하였던 또 다른 육체의 발견과 함께 열릴 것이다. 과학과 자본을 통해 사생활이 발달한 19세기에 개인화되면 될수록 찢어지고 조각난 시체의 부위들을 이어붙인 초능력의 최종병기를 꿈꾸듯 우리는 혼종의 유동체를 갈망한다. 핏기도 없고 움직이지도 않던 살덩이들이 끊어진 힘줄과 혈관을 붙이니 움직이기 시작한다. 권력이 날카로운 메스로 해부한 시체들의 파편들이 신체의 새로운 혼종을 만들 것이다. 대중은 살아 있다. 그런 다중지성을 기대한다.


김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