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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1896년생 나혜석과
1982년생 김지영

by매일경제

나혜석 (화가, 1896~1948)

'뮤즈'는 왜 항상 여자인가

매일경제

피카소, 로댕, 클림트, 디에고 리베라. 모두 화려한 여성 편력으로 유명한 예술가다. 피카소의 연인 중엔 그보다 40살 어린 여성도 있었다. 배다른 자식도 여럿 뒀지만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로댕은 조수였던 카미유 클로델과 사랑에 빠졌다. 당시 그에겐 오래된 연인 로즈 뵈레가 있었다. 두 여성 사이를 오가던 로댕은 끝내 로즈 뵈레에게 정착하며 카미유의 마음에 정을 박았다. 버림받은 카미유는 그 충격으로 여생을 정신병원에서 보냈다. 평생 독신이었던 클림트는 전리품 모으듯 자신의 그림 모델이 된 여성들을 꾀어 잠자리를 가졌다. 클림트가 죽자 유산 상속을 요구한 사생아만 14명이었다. '민중의 화가' 디에고 리베라의 죄질은 유독 나쁘다. 그는 아내 프리다 칼로가 유산을 겪고 몸을 추스르는 동안 처제와 불륜을 저질렀다.


이 모든 난장에도 피카소, 로댕, 클림트, 디에고 리베라는 위대한 예술가로 추앙받는다. 이들에게 많은 여성이 있었다는 사실은 성공한 남성의 권리로도 여겨진다. 반면 역사는 남성 예술가 곁을 스쳐 지나간 여성을 '뮤즈'라는 단어로 뭉뚱그린다. 남성 창작자를 위한 영감의 원천으로 기억하는 것이다. 시도 때도 없이 '뮤즈'를 갈아치운 남성 예술가는 수두룩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드물다. 여성 예술가의 '남성 뮤즈'라는 개념은 과거에도 지금도 생소하다. 세상은 자유로운 여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어떻게든 찍어 눌렀다. 여성을 타자화하는 영역은 예술계뿐만이 아니다. 여경, 여교수, 여의사, 여감독, 여배우 등 굳이 '여'를 붙인 단어는 여전히 많다. 이 거대한 모순에 의문을 제기하고, 온몸으로 맞서다 무너졌지만, 끝내 부활한 여성이 있다.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 화가 나혜석이다.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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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이 그린 농촌풍경.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 화가다.

1923년 '동명'이라는 잡지에 문제의 칼럼이 실렸다. 글 제목은 '모(母) 된 감상기'. 나혜석이 자식을 낳은 후 엄마가 된 기분을 기록한 글이다. 나혜석은 "모성애는 본능이 아니다"고 말했다. 모성은 저절로 생겨나는 감정이 아니라 얼마간은 사회의 강요가 만든 결과라는 것이다. 그는 자식이 자라는 모습을 보며 느끼는 아름다움을 부정하진 않았다. 피붙이와 교감할 때의 행복도 알고 있었다. 다만 출산으로 인한 육체 고통과 양육을 하며 자신의 삶을 뒷전으로 미뤄야 하는 여성의 현실을 '모성' 두 글자로 묵살하는 사회가 싫었다. 당연하게 여겨지는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숭고한 모성애'는 여성을 옭아매기 위한 이데올로기라고 주장했다.


조선 사회가 발칵 뒤집어졌다. '모(母) 된 감상기'가 발표된 다음날 같은 잡지에 반박 칼럼이 실렸다. 익명의 필자는 "임신은 여성의 거룩한 천직이며 여성이 존재하는 이유"라면서 나혜석을 꾸짖었다. 나혜석은 굽히지 않았다. 반박 글에 다시 반박하면서 자신의 생각이 일부 여성들에게 공감을 얻으리라고 확신했다.

조선시대 신여성, 나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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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그린 그림 곁에 서 있는 나혜석.

나혜석은 부잣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일본 유학길에 오르며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나혜석은 일본에서 서양 유화를 배웠지만, 열정 가득했던 그의 관심사는 미술에 국한되지 않았다. 유학생 기관지 발행을 주도할 정도로 여러 방면에서 활동했다. 1918년에 단편 소설 '경희'를 발표한다. 조혼, 가부장제 등 여성에게 불리한 관습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실제로 나혜석의 아버지는 딸에게 하루빨리 시집 가라고 강요했다. 나혜석은 무시했고, 그 결과 유학 학비 지원이 끊겼다. 굴하지 않고 잠시 조선으로 돌아와 미술학교 선생님으로 일했다. 유학비를 벌어 다시 일본으로 갔다. 1919년 전후로는 조선과 일본을 오가며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3·1운동에 관여한 혐의로 옥살이를 치르기도 했다.


일본에서 사랑도 했다. 그는 오빠의 친구였던 시인 최승구와 연애를 했다. 이 만남은 허망하게 끝났다. 최승구는 이른 나이에 결핵으로 숨을 거뒀다. 실의에 빠진 나혜석에게 교토에서 법을 공부하던 김우영이 찾아온다. 김우영은 끈질기게 구애했고, 나혜석은 청혼을 받아들였다. 단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라는 조건을 걸었다.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온 나혜석은 1921년 첫 개인전을 열었다. 5000명 이상이 몰릴 정도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이듬해에는 조선미술대전에 입선하며 전업 화가로서 성공 가도를 달렸다. 조선미술대전 입상 직후 남편 김우영은 아내의 성공을 자신의 명예로 여기며 "여자는 남자의 부속물"이라고 말했다. 나혜석은 분노했고, 김우영은 싹싹 빌어야 했다. 나혜석은 '누군가의 아내' '누군가의 엄마'로만 존재하는 여성의 현실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조금이라도 세상에 균열을 내려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도 '모(母) 된 감상기'처럼 여성 권리를 주장하는 논객으로 왕성하게 활동했다.

"조선의 남성들 참으로 이상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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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 생활 중 그린 자화상.

총독부 공무원이었던 김우영은 유럽에 장기 체류할 기회를 얻는다. 나혜석은 남편을 따라 큰 세상을 구경하기로 한다. 1927년 부부는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유럽에 도착했다. 유럽 여러 국가를 관광한 후 부부는 잠시 찢어진다. 김우영은 법 공부를 위해 베를린으로 갔다. 나혜석은 파리에서 그림 공부를 이어나간다. 1920년대 파리는 20세기가 배출한 중요한 예술가들이 한데 모인 곳이었다. 나혜석이 주로 어울린 부류는 야수파 화가들이다. 이 시기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나혜석의 자화상은 이국적인 정서로 가득하다. 자화상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지만, 캔버스 속 얼굴은 나혜석과 퍽 다르다. 기다란 콧대와 움푹 들어간 눈은 동양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나혜석은 유럽 생활 이후 닥칠 시련을 예견했을까. 자화상 속 낯선 여인이 뿜어내는 감정은 쓸쓸함이다. 망연한 눈빛을 한 어두운 여성이 우리를 응시한다.


김우영은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 친구인 파리 외교관 최린에게 아내를 잘 보살펴달라고 부탁한다. 여행자의 마음은 쉬이 느슨해지게 마련이다. 파리의 낭만 속에서 나혜석과 최린 사이에 뭔가가 싹텄다. 둘은 함께 오페라를 보고, 미술관을 다니며 밀회를 즐겼다. 어쨌거나 불륜이었다. 김우영도 이 사실을 알게 됐다. 부부는 1929년 귀국했다. 김우영은 나혜석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나혜석에게도 죄책감은 있었다. 그는 남편 마음을 돌리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남편 역시 외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1930년 둘은 이혼 도장을 찍는다. 김우영은 곧장 새살림을 차린다. 이혼한 나혜석은 최린에게 간다. 최린은 나혜석을 짐짝처럼 여긴다. 그에게 나혜석은 불장난이었다. 나혜석을 바라보는 세상의 시선은 싸늘해졌다. '불륜녀' 딱지는 사사건건 그를 괴롭혔다. 나혜석은 생각한다. 자신이 죄인이라면 김우영과 최린도 죄인이다. 그런데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왜 여성에게만 형벌이 주어지는가. 그는 1933년 '이혼 고백장'이란 장문의 글을 발표한다.


나혜석은 이렇게 썼다. "조선의 남성이란 인간들은 참으로 이상하오. 잘나건 못나건 간에 그네들은 적실, 후실에 몇 집 살림을 하면서도 여성에게는 정조를 요구하고 있구려. 하지만 여자도 사람이외다! 한순간 분출하는 감정에 흩뜨려지기도 하고 실수도 하는 그런 사람들이외다." 나혜석이 주장한 건 '여성도 인간'이라는 사실이다. 여성도 남성처럼 욕망에 눈이 멀어 실수할 수 있는 존재라고 외쳤다. 조선 사회는 '여성도 인간'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나혜석이 목소리를 낼수록 그를 향한 조롱과 비판은 더 거세졌다.

나혜석과 김지영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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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사진 제공=롯데엔터테인먼트

이혼 이후 나혜석은 고립됐다. '이혼녀' 나혜석은 저잣거리에서 돌팔매질당하기 일쑤였다. 김우영의 방해로 자식들 얼굴조차 볼 수 없었다. 화랑으로부터 외면당해 생활고까지 겹쳤다. 온 세상이 가시밭길로 변했다. 그는 아예 불교에 귀의하려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한다. 비구니가 되진 못했지만 여러 절을 전전하며 궁핍한 삶을 이어갔다. 조선총독부가 접근했다. 창씨개명을 하고 태평양전쟁 징용을 독려하는 강연에 참여하면 금전적인 지원과 화실까지 제공하겠다고 했다. 독립운동에도 관여했었던 나혜석은 회유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 결과 총독부는 여성해방운동을 불온한 것으로 여기며 사사건건 나혜석을 감시했다. 나혜석 곁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1940년대 들어 나혜석의 심신은 무자비한 속도로 무너졌다. 파킨슨병, 중풍에 시달렸고 우울증과 대인기피증도 심했다. 세상은 한때 누구보다 총명했던 이 여성이 한순간 어눌해지자 죗값을 치르는 것이라며 조롱했다. 1948년 나혜석은 무연고자가 모인 병동에서 홀로 눈을 감았다. 이 죽음은 관보에 짧게 실렸다.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원인 영양실조, 추정연령 65~66세.' 마지막 영혼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마신 뜨거운 삶이었기에 대가도 컸다. 나혜석은 실제 나이보다 10년 이상 더 먹은 모습으로 세상을 떠났다. 행려병자로 사망한 탓에 그가 어디에 묻혀 있는지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금기에 도전했던 나혜석은 그 자체로 금기가 됐다. 나혜석이란 이름은 터부시됐고, 무덤조차 없는 그는 금세 세상에서 잊혔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나혜석이 남긴 많은 글과 그 안에 담긴 생각까지 증발하진 않았다. 1980년대부터 나혜석을 재평가하는 바람이 불었다. 화가, 여성해방운동가, 작가, 독립운동가로 살았던 뜨거운 영혼에 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하나둘 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나혜석이란 이름은 어느 때보다 활발히 호명되고 있다. 미투운동과 '82년생 김지영'이 쏘아올린 페미니즘 불씨 덕분에 나혜석은 완벽히 부활했다. 김지영 사연에 공감한 사람들은 오래전 같은 문제의식을 품고 세상을 바꿔보려 발버둥치던 여성이 있었다는 역사에서 용기를 얻었다.


나혜석이 부활한 이유는 그가 보수적인 사회와 남성들을 향해 쏟아냈던 말들이 지금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부부가 아이를 낳으면 경력이 단절되는 쪽은 높은 확률로 여성이다. 모성애는 숭고하며 그래서 엄마의 희생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지저분한 스캔들에 휘말린 남성 연예인은 몇 년 혹은 몇 개월 쉬고 복귀하지만, 여성 연예인이라면 영구 은퇴를 고려해야 한다. 남성들은 "남자는 외모보다는 능력"이라고 말하면서도, 능력 좋은 남성을 차지한 여성은 흘겨본다. 이 모든 사례를 백과사전처럼 차곡차곡 소개한 '82년생 김지영'은 사실 소설보다는 르포에 가깝다. 한국을 넘어 일본, 중국 여성들도 김지영의 사연에 눈물을 흘렸다. 소설의 성공에 힘입어 영화로도 제작됐다. 반발도 만만치 않다. 많은 남성은 김지영 이야기는 허구라고 말한다. 여성이 차별당하는 시대는 한참 전에 끝났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차별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상에 차별은 없다고 믿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배부른데 요즘 세상에 굶는 사람이 어딨나"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다.


나혜석과 김지영 사이엔 1세기라는 간극이 있다. 그사이 여성의 현실은 나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보다 나아졌다고 해서 옳은 세상이 온 건 아니다. 채용 과정에서 여성을 고의로 탈락시킨 기업은 여전히 뉴스에 자주 오르내린다. 불친절한 택시기사는 유독 여성 손님에게 더 무례하게 굴고, 데이트폭력 피해자 성별은 매우 높은 확률로 여성이다. 나혜석에서 돌을 던진 사람들처럼 누군가는 '82년생 김지영'을 '82㎏ 김지영'으로 부르며 조롱한다. 나혜석과 김지영이 말하려는 바는 간단하다. "여성도 인간이다." 적잖은 사람에겐 여전히 이 주장은 파격이며, 그래서 그들은 보지도 않을 영화에 별점 테러를 가한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