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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나무에 매달린 시체들을
노래한 빌리 홀리데이

by매일경제

빌리 홀리데이 (가수, 1915~1959)

매일경제

이상한 열매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리네 / 잎사귀와 뿌리에는 피가 흥건하고 / 남부의 따뜻한 산들바람에 검은 몸뚱이들이 매달린 채 흔들리네 / 포플러 나무에 매달려 있는 이상한 열매."

빌리 홀리데이의 대표곡 '이상한 열매(Strange Fruit)'의 전주는 쓸쓸하면서도 감미롭다. 언뜻 낭만적인 음악으로 착각하기 쉽지만 가사가 흐르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노래가 묘사하는 풍경은 이렇다. 미국 남부의 어느 들판에 나무 한 그루가 있다. 나무엔 흑인 시체가 매달려 있다. 나뭇잎은 시체에서 흐른 피로 흥건하게 젖었다. 시체의 눈은 튀어나왔고, 입술은 찌그러졌다. 곧 들판은 시체 태우는 냄새로 뒤덮인다. 곡 제목 '이상한 열매'는 나무에 대롱대롱 매달린 흑인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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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열매`(Strange Fruit) 앨범 표지.

빌리 홀리데이가 이 노래를 처음 부른 시기는 1930년대 후반이다. 그때까지도 미국 남부에서는 흑인을 향한 테러가 횡행했다. 백인들은 공동체 의식처럼 흑인을 사냥하고, 나무에 매달고, 불에 태웠다. 자신들이 처치한 흑인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엽서로 사용했다. '이상한 열매'는 피부색이 검다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흑인을 기리는 장송곡이다. 이 노래는 백인들의 심기를 건드렸고, 금지곡이 됐다. 하지만 야만의 시대는 영원할 수 없다. 1999년 '타임(Time)'지는 '이상한 열매'를 20세기 최고의 곡으로 뽑았다.

가장 밑바닥의 삶

오늘날 빌리 홀리데이는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과 함께 3대 재즈 디바로 불린다. 흑인이었던 세 명은 결과적으로 전설이 됐지만, 그들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흑인 여성으로 산다는 건 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 미로를 헤매는 것과 같았다. 셋 중에서도 빌리 홀리데이의 삶은 유독 어둡다. 나머지 둘의 삶이 평탄하게 보일 정도다. 빌리 홀리데이는 그가 불렀던 '이상한 열매' 흑인들과 비슷한 비극을 겪었다. 차이점이라면 빌리는 살해당하지 않았다는 사실 정도다.


빌리 홀리데이는 1915년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태어났다. 떠돌이 음악가였던 아버지는 빌리가 배 속에 있었을 때 가족을 버렸다. 어머니 쪽도 상황은 나빴다. 겨우 14세에 출산한 어머니는 딸을 친척 집에 툭 던져놓고 돌보지 않았다. 사실상 고아였던 빌리는 어리광만 부려도 사랑받을 나이에 이 집 저 집 떠돌며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다 백인 중년 남성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범행을 저지른 남성은 죗값을 치르지 않았다. 오히려 빌리는 남자를 유혹한 불량 소녀로 몰려 감화원에 보내졌다.


감화원에서 나온 이후 또다시 성폭행을 당했다. 이번에도 제대로 처벌받은 사람은 없었다. 진창 속에서도 삶은 계속됐다. 빌리는 뉴욕으로 건너갔다. 뒷골목 사창가를 전전하며 매춘으로 생계를 이어나갔다. 이 모든 불행은 빌리가 태어난 지 14년 만에 닥친 일이다. 할렘가 밑바닥 삶을 살던 10대 빌리는 상상이나 했을까. 훗날 카네기홀에서 노래를 부르는 자신의 모습을.

춤을 못 춰서 노래를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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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레스터 영과 함께 공연 중인 빌리 홀리데이.

빌리는 매춘을 한 죄로 체포됐다. 감옥살이 이후 빌리는 사창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대신 백인 가정의 하녀가 됐다. 이 일도 팍팍했지만 할렘가 뒷골목에서 했던 일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경제 대공황이 덮쳤고, 새 일자리를 잃었다. 방세 낼 돈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게 됐다. 나이트클럽에서 댄서를 모집하는 공고를 보고 무작정 오디션에 참가했다. 한 번도 춤춰본 적 없었던 빌리는 반전 없이 탈락했다. 클럽 관계자 중 한명이 빌리에게 노래라도 불러보라고 제안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빌리가 노래를 하는 순간 클럽은 조용해졌다. 같은 공간에 있던 모두가 흑인 소녀의 노래에 빠져들었다. 빌리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재능이 처음으로 세상을 감동시킨 순간이었다. 빌리는 가수라는 새 직업을 얻고 노래를 시작했다.


할렘가 클럽에 노래를 잘하는 가수가 있다는 소식이 퍼졌다. 존 하몬드라는 프로듀서가 빌리를 찾아왔다. 부유한 백인 가문 후계자였던 존 하몬드는 오늘날 미국 대중음악 역사를 바꾼 제작자로 존경받는다. "음악에서는 피부색을 들을 수 없다"고 말한 존 하몬드는 인권 운동가이기도 했다. 그가 발굴해 스타로 만든 흑인 가수 중엔 빌리 홀리데이 외에 아레사 프랭클린도 있다. 흑인은 아니지만, 무명 가수였던 밥 딜런, 브루스 스프링스틴을 스타로 만든 인물도 존 하몬드였다.


1933년 빌리는 존 하몬드의 소개로 베니 굿맨을 만난다. 클라리넷 연주자 베니 굿맨은 당시 주목받기 시작한 재즈 스타였다. 백인으로 이뤄진 베니 굿맨 악단과 함께 빌리는 첫 번째 레코딩 기회를 얻었다. 그 이후는 탄탄대로였다. 레스터 영, 듀크 엘링턴, 아티 쇼, 테디 윌슨 등 최상급 재즈 연주자들과 협업했다. 신산한 빌리의 목소리는 금세 미국 전역으로 퍼졌다. 빌리의 노래는 술과 비슷했다. 그는 악보에 구애받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담아 노래했다. 관중은 그 음악을 듣고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애잔함에 취했다. 빌리는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와 조명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이 모든 영광은 빌리가 무대 위에 있을 때만 유효했다.

끝나지 않은 어둠

빌리는 존 하몬드의 도움으로 공식 데뷔한 이후 내리막 없이 명성을 쌓았다. 1956년엔 카네기홀에서 공연하는 기회까지 얻었다. 가장 밑바닥 삶을 살았던 인간이 최상의 위치에 오른 셈이다. 하지만 위로 오를수록 어둠도 깊어졌다. 세상은 무대 위에서 노래 부르는 빌리를 보며 감탄하고 눈물까지 흘렸지만, 무대 밖에서는 빌리를 '더러운 검둥이' 취급했다. 빌리는 공연을 마친 후 무대 위에서 합을 맞췄던 백인 연주자들과 자유롭게 저녁 식사도 못 했다. 당시엔 공공연하게 흑인 출입을 막은 식당이 많았다. 공연의 주인공이면서도 공연장 정문 통과가 허락되지 않아 뒷문으로 드나들기도 했다. 빌리는 최고의 보컬이었지만 악단은 빌리를 대체할 수 있는 백인 보컬도 대동했다. 언제 어디서든 관중들이 흑인 가수를 무대 밖으로 끌어내릴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무대 밖에서만 차별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빌리의 피부색은 순도 높은 검은색이 아니다. 그의 조상 중에는 백인 피가 섞인 흑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흑인 연주자 속에서 노래할 땐 빌리는 종종 얼굴에 검은색 물감을 칠해야 했다. 반대로 백인 연주자들과 무대에 오를 땐 얼굴에 분홍색 물감을 칠하기도 했다. 백인 사회에서는 물론 흑인 사회에서도 빌리는 얼마간 차별받은 것이다.


어느 날 비보가 날아왔다. 아버지가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가족을 지키지 않은 그는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 빌리는 아버지를 미워하지 않았다. 잔혹한 세상 어딘가에 자신과 이어져 있는 가족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위안을 얻었다. 아버지는 제대로 치료만 받아도 죽지 않을 수 있었다. 병원들은 흑인에게 병동을 내주지 않았다. 자신을 받아줄 병원을 찾아다니던 빌리의 아버지는 치료 기회를 놓쳐 죽었다. '이상한 열매'는 빌리가 아버지를 잃고 2년 뒤에 부른 곡이다. 빌리는 유독 이 곡을 부를 때면 진지해졌다. 노래 속 비극의 주인공이 자신의 아버지였고, 또한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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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마약을 소지한 혐의로 재판정에 들어가는 빌리 홀리데이.

전설이 된 재즈 아티스트 대부분은 기구한 삶을 살았다. 그들 중 상당수가 흑인이었던 이유도 컸지만, 마약이 끼친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당시 재즈와 마약은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무대 위에서 영혼을 바친 연주자들은 무대에서 내려오면 마약과 술의 세계로 망명을 떠났다. 빌리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밑바닥과 최상의 삶 모두에서 차별을 겪었다. 10대 때 받았던 상처도 아물지 않았다. 언제나 마음속에선 피가 철철 흘렀다. 이 상처를 마약으로 잊고자 했다. 가수로서 벌어들인 돈을 마약 사느라 탕진할 정도였다. 주변엔 나쁜 남자도 많았다. 대부분 빌리의 명성을 이용해 한탕 해 먹으려는 건달 같은 남자들이었다. 1950년대 들어 빌리의 건강은 급격히 나빠졌다. 마약에 절어 목소리도 망가졌다. 하지만 그런 채로도 계속 노래를 불렀다. 얄궂게도 황폐해진 빌리의 목소리는 그 자체로 하나의 스토리가 됐다. '불우한 삶'이라는 서사와 함께 빌리는 생전에 전설이 됐다.

가장 슬픈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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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를 가진 빌리 홀리데이는 44세에 눈을 감았다.

저명한 좌파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재즈 애호가이기도 하다. 1959년 빌리 홀리데이가 44세 나이로 사망했을 때 그가 쓴 추도문은 이렇다. "그녀의 노래에는 잘려 나간 자신의 다리를 바라보며 누워 있는 사람과 같은 마음의 고통과 육체적 체념이 뒤섞여 있다. 그래서 흑인에 대한 폭력에 항의하는 시에 곡을 붙여 불후의 명곡이 된 '이상한 열매'에서 우리는 섬뜩한 전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고통은 곧 그녀의 삶이었지만 그녀는 굴복하지 않았다."


빌리 홀리데이, 엘라 피츠제럴드, 사라 본. 3대 재즈 디바 중 빌리의 가창력이 가장 뛰어난 건 아니다. 3옥타브를 넘나드는 엘라 피츠제럴드에 비해 빌리의 음역대는 제한적이었다. 사라 본처럼 기교가 탁월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빌리의 이름값은 셋 중 가장 높다. 세상은 빌리 홀리데이를 세상에서 가장 슬픈 목소리로 기억한다. 이 목소리를 듣는 사람은 아득한 공간에서 나 홀로 걷는 듯한 쓸쓸함을 느끼기도 한다. 빌리의 음악을 듣고 나면 어두운 세상에 내던져져 눈물 대신 노래로 울었던 한 인간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방법이 없다.


'재즈란 어떤 음악인가요?' 재즈를 오래 들었던 사람조차 이 질문을 받으면 머뭇거린다. '삶이란 무엇인가요'라는 거창한 물음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재즈는 같은 곡이더라도 연주할 때마다 매번 다른 음악이 된다. 즉흥연주가 핵심인 재즈는 연주자조차 무대에 오르기 전 어떤 결과물이 나올지 예측하기 어렵다. 조그만 무대 위에도 변수는 얼마든지 존재하기 때문이다. 세상이 재즈라는 장르를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인생에 곧잘 빗대는 이유다.


재즈를 인생의 영역으로 가져와 생각하면 정의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누군가는 재즈를 열정이라고 말하고 누군가는 자유로움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재즈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재즈처럼 자유롭다. 그러나 모두가 인정할 수밖에 없는 명백한 역사도 있다. 재즈의 뿌리는 슬픔이라는 사실이다. 흑인 노예들이 잠시나마 고통을 잊고자 흥얼거렸던 노랫가락이 재즈가 됐기 때문이다. 재즈는 인생이고 열정이며, 자유로움이자 슬픔이라면 결국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빌리 홀리데이가 재즈 그 자체라고.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