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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백치미 대명사`
메릴린 먼로는 좌파 지식인이었다

by매일경제

메릴린 먼로 (배우, 1926~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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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치미 대명사' 메릴린 먼로

기자들이 물었다. "연기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고요?" 메릴린 먼로가 답했다. "네.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어요." 기자들은 그럴 리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중 한 명이 킥킥대며 배우에게 질문했다. "당신, 도스토옙스키 철자는 알아요?" 먼로는 무례한 질문에 익숙하다는 듯 차분히 답했다. "오, 저는 제가 말하는 단어의 철자는 하나도 모른답니다." 자신을 '멍청한 여배우'로 취급하는 기자들을 비꼰 답변이었다.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밉상이지"란 말이 공공연하게 사용되던 시절이 있었다. 아직도 백치미를 여성의 매력으로 꼽는 사람은 많다. 사전은 백치를 '뇌에 장애나 질환이 있어 지능이 아주 낮은 상태. 또는 그런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정의한다. 심각한 지적장애 상태를 비하하는 단어 '백치'에 '미(美)'를 붙여 여성을 칭찬하는 이유는 뭘까. 물론, 백치미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다수에게 대단한 악의는 없을 것이다. "순수하다"란 말을 대신해 저 단어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지배한다. 백치미가 칭찬인 세상 속에서 총명하고, 똑 부러지고, 당당한 여성은 부당하게 평가절하당하기 쉽다.


'백치미' 족쇄에 갇혀 마지막까지 고통받은 인물이 메릴린 먼로다. 그는 '머리가 텅 빈 금발 백인 미녀' 이미지 속에서 살았다. 먼로가 죽고 나서야 세상이 잘 몰랐던 그의 면모가 밝혀졌다. 먼로는 제대로 교육받지 못했다. 그래서 무던히 노력했다. 영화 촬영장 바깥에선 책과 가까이 지내며 열정적으로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였다. 흑인 인권 운동이 본격화하기 전부터 인종차별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하지만 세상은 먼로를 비웃었다. "넌 그래 봐야 멍청한 배우일 뿐이야."

불행했던 유년 시절

"전 행복한 적이 없었어요. 행복하기를 기대하는 평균 미국인 아이와 다르게 성장했거든요." 메릴린 먼로의 유년은 불행했다. 아버지는 먼로가 엄마 배 속에 있을 때 가족을 버렸다. 태어나 보니 먼로 곁에는 정신질환을 앓는 엄마만 있었다. 사실상 고아 신세였다. 보육원과 위탁가정을 전전했다. 유년 시절에 성폭행을 당할 정도로 진창 속에서 살았다.


먼로는 탈출구로 결혼을 선택했다. 지옥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려 16세에 덜컥 식을 올렸다. 남편은 곧 2차 세계대전에 징집돼 집을 떠났다. 먼로는 군수업체에 취직해 페인트칠 등 자질구레한 일을 하며 입에 풀칠을 한다. 군부대에 속한 사진작가 눈에 먼로가 들어왔다. 그는 달력에 삽입할 누드모델로 먼로를 선택했다. 훗날 먼로가 슈퍼스타가 됐을 때, 이 시기에 찍었던 누드사진이 공개돼 논란이 일었다. 왜 누드를 찍었었냐는 질문에 먼로는 "굶주림 때문에 그런 사진을 찍은 게 그렇게 잘못인가요?"라고 반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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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릴린 먼로의 출세작 '나이아가라' 촬영 때 모습

성급했던 결혼이었기에 이별도 빨랐다. 남편과 4년 만에 갈라섰다. 달력 모델 데뷔 덕분에 먼로는 이곳저곳에서 화보 모델로 얼굴을 알린다. 1947년 '쇼킹 미스 필그림'이란 영화에서 단역을 맡아 배우로 데뷔한다. 이후로는 탄탄대로였다. '아스팔트 정글'(1950), '이브의 모든 것'(1950) 등을 거쳐 주목받았다. 1953년 '나이아가라' '신사는 금발을 좋아한다' '백만장자와 결혼하는 법'을 연달아 찍으며 스타가 됐다.

"당신은 나를 때릴 권리가 없다"

세상은 먼로의 육체에 열광했다. 골반을 좌우로 흔들며 걷는 먼로의 걸음걸이를 두고 '먼로 워크'란 단어까지 생겨날 정도였다. 먼로가 초기에 찍었던 영화 대부분은 그의 잘록한 허리와 풍만한 가슴을 강조했다. 여성의 관능에 집중한 작품들이었다. 1950년대 먼로의 인기는 신드롬 수준이었다. 영화 속에서 먼로는 천진난만하고 만인에게 친절하다. 성적 매력으로 무장하고도 남자를 이용하려 들지 않는다. 2차 세계대전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온 남성들은 '헤프고 착한 여자' 먼로에게 위안을 얻었다. 먼로는 '백치미' 대명사가 됐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먼로는 1954년 결혼 발표를 한다. 상대는 12세 많은 조 디마지오였다. 그는 은퇴한 메이저리그 슈퍼스타였다. 뉴욕양키스 타자였던 조 디마지오가 세운 56경기 연속 안타 기록은 여전히 야구계의 전설이다. 먼로와 조 디마지오의 결혼을 두고 세상은 '최고의 육체'와 '최고의 육체'가 만났다며 흥분했다. 조 디마지오는 이탈리아 이민자답게 대가족 속에서 성장했다. 자신도 그런 가정을 꾸리려 했다. 현역에서 은퇴했기 때문에 가족을 늘리고, 돌볼 여유가 있었다. 하지만 먼로는 이제 막 날아오른 스타였다. 현모양처로 방향을 틀기엔 먼로 앞에 쭉 뻗어 있는 길은 너무나 화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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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한국을 찾아 위문 공연을 한 마릴린 먼로

일본으로 떠난 신혼여행부터 삐걱댔다. 먼로는 바로 옆 나라인 한국에서 초청받았다. 한국전쟁을 치른 주한미군이 먼로에게 위문 공연을 부탁했다. 조 디마지오는 아내가 부탁을 거부하길 바랐지만, 먼로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한국을 찾았다. 나흘 동안 서울뿐 아니라 대구, 인제 등 10곳을 방문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공연했다. 한국은 사려 깊은 먼로에게 열광했고, 조 디마지오는 자신의 말을 듣지 않은 아내에게 불만을 품었다.


조 디마지오는 사사건건 아내에게 태클을 걸었다. 먼로가 연기하는 것조차 탐탁지 않게 여겼다. 다툼의 수위가 세졌다. 거구였던 조 디마지오는 먼로에게 손찌검했다.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타자가 야구방망이까지 사용해 아내를 때렸다. 상습적인 폭행으로 이어졌다. 먼로는 "당신은 나를 때릴 권리가 없다"며 결혼 생활을 끝냈다. 둘은 1년도 안돼 이혼했다.

먼로, 율리시스를 읽다

1955년 메릴린 먼로가 책을 읽고 있는 사진 한 장이 공개됐다. 소소한 논란이 일었다. 사진 속에서 먼로의 손에 들려 있던 책이 '율리시스'였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는 고전 중에서도 고전으로 뽑힌다. 방대한 분량과 난해함 때문에 완독 자체가 도전처럼 여겨지는 작품이다. 평생을 바쳐 '율리시스'를 연구하는 문학 연구자도 있다. 고도의 지적능력을 요구하는 책을 먼로가 읽는다는 사실은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가슴만 크고 머리는 텅 빈 여배우가 어떻게 율리시스를 읽는단 말인가!" 많은 사람은 먼로가 허세를 부리기 위해 어려운 책을 읽는 척했다고 여겼다.


훗날 먼로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그의 서재에 꽂혀 있던 책 리스트가 공개됐다. 제임스 조이스뿐만 아니라 알베르 카뮈, 니코스 카잔차키스, 토마스 만, 도스토옙스키, 마르셀 프루스트, 에밀 졸라 등의 작품이 수두룩했다. 독서에 머물지 않고 때때로 시를 짓기도 했다. 먼로가 남긴 글이나 인터뷰를 보면 삶에 대한 섬세한 통찰력이 느껴진다. 먼로에겐 배움을 행동으로 연결하는 지식인적인 면모도 있었다. 핵실험 반대 단체 회원으로 활동했고, 흑인 인권 운동을 후원하고, 쿠바의 좌파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를 지지했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매카시즘' 광풍이 불어닥쳐 배우들을 옭아맸다. 공산주의자로 몰린 배우들이 속절없이 영화판에서 쫓겨났다. 살얼음판 같은 시기에도 먼로는 멀쩡했다. 대놓고 정치적인 행동에 나섰는데도 말이다. '빨갱이 사냥' 완장을 찬 사람들의 눈에 먼로는 그저 멍청한 금발 여배우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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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로와 그의 세 번째 남편 극작가 아서 밀러

먼로의 세 번째 남편은 그의 책장에 꽂혀 있던 작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물이다. 1956년 먼로는 극작가 아서 밀러와 결혼했다. '세일즈맨의 죽음'으로 유명한 아서 밀러는 먼로와 만났을 때 이미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수상한 거물이었다. 좌파 지식인으로도 이름을 날렸다. 신문은 "위대한 육체와 위대한 두뇌의 결혼"이라며 또 한번 흥분했다. 먼로에게 아서 밀러는 남편이자 스승이었다. 밀러는 자상했고, 먼로를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 만남도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먼로는 매카시즘을 피했지만, 밀러는 그러지 못했다. 청문회에 불려 나간 밀러는 문화계 좌파 인사들의 이름을 대라는 심문을 받는다. 그는 침묵했다. 대가는 벌금, 구금, 블랙리스트 등재, 여권 말소였다. 밀러의 삶에 갑자기 먹구름이 가득 꼈고, 먼로는 여전히 잘나가는 스타였다. 두 사람의 삶을 채운 공기는 극명하게 갈렸다. 둘은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면서도 서서히 멀어졌다. 4년7개월을 함께했고 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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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의 책을 읽는 먼로

"세상은 나를 상품으로만 여긴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가꾸고 키워 나갈 권리가 있다. 먼로도 그러려고 했다. 그는 섹스 심벌로서 스타가 된 사실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판에 박힌 백치미 역할에서 벗어나 새로운 연기에 도전하려 했다. 스타가 된 후에도 뛰어난 연기코치를 찾아다니며 실력을 키웠다. 대학 공개 강의에 가서 철학을 배우며 내공을 쌓았다. 세상은 냉담했다. 먼로가 '헤프고 순종적이며 멍청한 여성상'에서 벗어난 배역을 맡으면 외면했다. 영화 바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도스토옙스키를 읽는 먼로에게 돌아온 건 "도스토옙스키 철자나 알고 읽는 것인가"란 비아냥거림이었다.


달아 사랑에 실패하고, 인기의 허망함을 깨달은 먼로는 쇠약해졌다. 그의 삶은 비탈길로 향했다. 우울증과 강박증이 심해졌다. "세상은 나를 상품으로만 여긴다"고 말한 먼로는 빛나는 삶 뒤꼍에서 외로움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1962년 8월 5일 먼로는 36세 나이에 자신의 집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아서 밀러와 이혼한 지 1년7개월 후였다. 사인은 약물 과다 복용이었다. 아이콘의 퇴장답게 그의 죽음을 둘러싼 루머들은 오늘날까지 음모론처럼 전해진다.


대중은 스타를 동경한다. 화려하게 빛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이유로 스타를 손가락질한다. 사람들에겐 찬양과 경멸의 대상이 동시에 필요하다. 그래서 스타의 화려함 속엔 기쁨과 슬픔이 함께 있다. 먼로도 성공의 명암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림자에 잡아먹히지 않으려 발버둥쳤다. 자신을 에워싼 단단한 벽을 깨려 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사람들은 자신이 먼로에 대해 잘 안다고 생각했고, 마음대로 평가했다. 먼로가 맞서야 했던 오만과 편견의 크기는 거대했다. 결국 고독 속에서 떠났다. "이 모든 것이 스타의 숙명이니 받아들여라"라고 다그치는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조성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