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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광자와 동교,
그리고 싱크홀 '햇빛샤워'

by매리킴

광자와 동교, 그리고 싱크홀 '햇빛샤

장우재 작, 연출의 창작극 <햇빛샤워>에는 한 번 보면 잘 잊혀지지 않는, 강렬한 두 명의 캐릭터가 등장한다. 여주인공 광자와 그녀의 하숙집 아들인 동교다. 광자는 백화점 의류 파트에서 일하는 말단 종업원으로, 밑바닥 인생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여자다. 그녀는 꼬이고 꼬인 자신의 인생이 ‘광자’라는 재수 없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고 믿고서, 일단 이 이름을 고치는 데서부터 인생을 변화시키고자 한다. 한편 광자가 세 들어 사는 하숙집 아들(정확하게는 양자) 동교는 나눔의 실천을 통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순수한 청년이다. 연탄 나눔을 통해 더불어 사는 따뜻한 세상을 만들어보고자 했던 동교의 순박한 꿈은 단단하고 냉혹한 현실의 벽 앞에 무릎을 꿇고 만다.

 

<햇빛샤워>는 이렇듯 각기 다른 삶을 살아가는 두 주인공, 광자와 동교가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둘 사이에 어떤 특별한 사건이나 감정이 오가는 것은 아니다. 물론 마음 깊숙이 숨겨놓았던 아픔을 드러내고 서로를 다독이는 애틋한 순간도 있고, 미묘한 감정의 파장이 만들어내는 파국의 장면도 있지만, 작품의 초점은 이 두 사람 사이의 인간적인 감정에 맞춰져 있지 않다. 극중 광자와 동교의 말과 행동은 ‘남녀’로서 그들을 드러내고 엮어내기 보다는, 이 험난한 사회를 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두 사람의 대응 방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두 사람이 보여주는 대응 방식의 차이는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다양한 인물들과 부딪히면서 크고 작은 파편들을 만들어내게 되는데, 바로 이 파편들이야말로 작가 장우재가 드러내고자 하는 ‘삶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광자와 동교, 그리고 싱크홀 '햇빛샤

빛(光)과 광기(狂)를 의미하는 이름처럼 극단적인 성향을 보여주는 광자는 그 자체로 강렬하고 잊을 수 없는 캐릭터이지만, 극을 다 보고나서도 관객들은 광자라는 인물에 대해 온전히 파악할 수가 없다. 그저 극중 광자와 관련된 인물들이 전하는 파편적인 인상과 기억들을 통해 그녀의 생각과 마음을 가늠해볼 수 있을 뿐이다. 각기 다른 위치와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이 기억의 파편들은 광자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불가능하게 만들면서도, 삶의 한 순간 그녀가 보여주었던 반짝이던 진실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또한, 광자의 이야기 위에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가 겹쳐 흘러가면서, <햇빛샤워>는 현실을 바라보는 중층적인 시선 속에 작품의 의미망을 확장시킨다. 

광자와 동교, 그리고 싱크홀 '햇빛샤

한편, <햇빛샤워>의 무대 한 가운데는 커다랗게 내려앉은 싱크홀이 공연 내내 올라갔다 내려갔다를 반복하며 극중 공간을 변화시킨다. 극중 싱크홀은 화려한 삶을 꿈꾸는 광자의 상승욕망과 대비되는, 햇빛조차 잘 들지 않는 반지하 하숙집을 의미하는 한편,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는 ‘구멍’을 은유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언제라도, 또 누구라도 발을 잘못 디디는 순간 다시는 올라올 수 없는 위험한 삶의 나락이 도처에 존재하는 사회, 안전망도 알림판도 없이 모두가 살얼음판을 디디듯 아슬아슬하게 비껴나가고 있는 불안한 우리 현실을 은유적으로 비추는 상징인 것이다. 극의 첫 장면에서 광자는 지나가는 할머니에게 “싱크홀을 조심하라”고 상냥하게 조언한다. 그러나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죽은 광자가 누워있는 공간이 무대 아래로 서서히 내려가면서 광자는 스스로 ‘싱크홀에 빠진 삶’이 되어 지나가는 사람들을 각성시킨다. 극 전체를 관통하는 은유의 중첩과 선명한 대비들이 공연을 보는 중에도, 또 끝난 뒤에도 오랫동안 생각할 거리를 남기는 작품이다. 

 

공연정보 | 5월 17일부터 6월 5일까지, 남산예술센터

 

사진제공 | 남산예술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