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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굿바이로건

'로건' 깊이 읽기
‘버려라, 얻을 것이다’

by맥스무비

버려라 그러면 얻을 것이니. '로건'이 다음 세대의 슈퍼히어로 영화들에게 전하는 복음이다.

'로건' 깊이 읽기 ‘버려라, 얻을

휴 잭맨과 제임스 맨골드 그리고 20세기폭스와 '로건'을 만든 모든 사람은 지금까지 '엑스맨''울버린' 시리즈와 전혀 다른 ‘울버린 월드’를 선보인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조금씩 흘러나오던 '로건'의 조각들은 세 개의 질문으로 뭉쳐졌다. 첫째, 정말 울버린 아니 로건을 엑스맨 세계에서 퇴장시킬 것인가. 둘째, 로건의 능력을 쏙 빼닮은 저 소녀가 ‘차세대 울버린’이 될 것인가. 셋째,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무엇을 보여줄 작정인가.

 

물론 기대는 높았다. “시나리오가 정말 훌륭하지 않다면 다시 울버린 영화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던 휴 잭맨이 마음을 바꿔 다시 닭 가슴살 다이어트와 “고문실” 같다던 트레이닝 장으로 흔쾌히 돌아갔다. 칸, 베니스와 비교하자면 떠들썩한 할리우드 스타 모시기에 소극적이었던 베를린국제영화제가 “67년 역사상 최초”라며 ‘슈퍼히어로 영화’에 공식적으로 붉은 주단을 깔아드린 것도 꽤 이례적인 일이다. '로건'의 예고편이 결정적이었다. '더 울버린'(2013)을 감독한 제임스 맨골드는 같은 감독의 같은 주인공 시리즈가 맞나 싶도록 전혀 다른 ‘울버린 월드’를 선보였다.

 

뭔가 다르긴 다른가보다 기대하면서도, '로건'이 위의 세 가지 질문에 내놓을 답은 형식적인 수준일 것이라 예상했다. 로건만큼 상품성이 확실한 캐릭터를 놓아줄 리는 만무해 보였고, 아다만티움 클로와 힐링 팩터가 있다 한들 저 꼬마 소녀가 로건을 대신하기란 불가능해보였다. 간발의 차로 청소년 관람 불가 슈퍼히어로 영화의 선수(先手)는 '데드풀'이 가져간 상황에서 '로건'은 ‘19금 슈퍼히어로 후발 주자’에 그칠 공산이 컸다.

 

‘울버린’ 시리즈를 사랑하든 그렇지 않든, 지금까지의 '울버린' 스핀오프를 봐왔다면 누구나 비슷한 예상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휴 잭맨과 제임스 맨골드 그리고 20세기폭스와 '로건'을 만든 모든 사람은 이런 예상까지 예측하면서,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로건'은 오프닝부터 다 던진다.

내 이름은 로건, 난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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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 오프닝의 액션 신은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선언한다. “내 이름은 로건, 난 ‘인간’이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2029년 미국과 멕시코 국경 지역 엘 파소의 외딴 휴게소 앞. 동네 건달들이 고급 리무진의 부품을 훔치려고 애를 쓰고 있다. 숙취에 절어 비틀대며 차 문을 열고 나온 남자는 반백의 로건(휴 잭맨)이다. 모든 상황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정리되겠거니, 팔짱끼고 로건의 클로 액션을 감상하려던 느긋함은 로건이 건달들에 둘러싸여 두들겨 맞는 장면에서 당혹으로 바뀐다. 피라미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는 ‘울버린’이라니, 상상해 본 적 있던가.

 

여전히 아다만티움 클로는 적들을 댕강댕강 벨 수 있고, 고급 차를 향하는 총구를 몸으로 막아도 되는 힐링 팩터도 작동하지만, 로건은 간신히 이긴다. 그제야 이 남자가 제대로 보인다. 반백의 머리, 흉터 반 주름 반의 얼굴, 덤불처럼 자라난 수염에 파묻힌 지친 중년 남자의 얼굴. 그는 더 이상 ‘울버린’이 아니다. 오프닝의 액션 신은 숨을 헐떡이며 이렇게 선언한다. “내 이름은 로건, 난 ‘인간’이다. 너희와 똑같은.”

 

이 오프닝만으로 '로건'은 지금까지 '울버린' 스핀오프 시리즈의 연장선상에서 멀찍이 달아난다. 로건은 미국과 멕시코 국경을 오가며, 고급 리무진 운전기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그는 돈을 벌어야 한다. 태양 볕을 쬘 수 없는 알비노 뮤턴트 칼리반(스테판 머천트)와 퇴행성 질환에 시달리는 아흔 살의 프로페서 X 아니 찰스 자비에(패트릭 스튜어트)를 부양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건의 노화가 던진 충격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기력을 잃고 침대에서 헛소리를 중얼거리는 검버섯 가득한 찰스의 얼굴을 바라봐야만 한다. 이즈음 '로건'은 쐐기를 박는다. “내가 얘기했잖아. 이건 ‘엑스맨’ 영화도 아니라고.”

깊고 진한 19금 가족무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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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의 구심점은 로건이 사력을 다해 지키고자 하는 X-23,로라(다프네 킨)의 존재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로건'의 캐릭터 선택은 훌륭하게 허를 찔렀다. 엑스맨 중 가장 강한 두 남자, 로건과 찰스를 데려다가 가장 약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이 인물들을 슈퍼히어로로 소비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렸다. 경쾌한 ‘샥’ 소리와 함께 삐져나온 클로를 마치 ‘X맨’ 마크처럼 엇갈리는 울버린의 자세나, 프로페서 X가 정신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대는 ‘히어로 포즈’는 없다.

 

로건은 이젠 잘 나오지도 않는 클로를 잡아당겨 빼고, 찰스는 정신지배는커녕 툭하면 발작을 일으켜 민폐를 끼친다. 이전까지는 이들의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 곧 ‘스토리’였지만, 능력을 잃은 두 사람에겐 이 곤란한 관계와 피폐한 삶이 곧 이야기가 된다.

 

그리고 진짜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두 남자에게 드디어 X-23 아니 로라(다프네 킨)가 찾아온다. 늙고 병든 (유사) 아버지 찰스를 부양하는 것만으로 힘에 부치는 로건은 이 작고, 자길 쏙 빼닮았고, 말 안 듣는 소녀를 거부한다. 하지만 오랜만에 어린 돌연변이를 노인 찰스는 이 소녀만 보면 싱글벙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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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건'에서 돌연변이를 쫓는 사이보그 용병 집단 리버스의 리더 도널드 피어스(보이드 홀브룩)가 로건과 찰스, 로라를 추격한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마침 로라를 쫓는 사이보그 도널드(보이드 홀부룩)가 로건의 은신처를 공격하고, 로라를 버려두고 도망치려던 로건은 데자뷰처럼 ‘로라의 싸움’을 지켜본다. 누구도 우는 법을 가르쳐주지 않아서 차오르는 분노로 고통스러울 때 눈물을 뚝뚝 흘리는 대신, 적의 목을 뚝뚝 떨어뜨리는 어린 야수. 로건이 로라에게서 자신을 읽어내면서, 그들은 가족이 된다. 병든 할아버지와 지친 아버지, 그리고 아직 아버지에게 마음을 열지 못한 딸.

 

'로건'에 로라가 필요했던 건, 로건에게 완전한 가족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다. 로라는 늙은 울버린을 폐기하고 새롭게 내놓을 ‘대체 상품’이 아니다.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의 답이다. 제임스 맨골드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미스 리틀 선샤인'(2006)을 언급한 적이 있다. '로건'이 서부극의 배경을 빌린 떠돌이의 운명을 타고난 카우보이를 위한 송가라는 것은 이미 눈치챘지만, 가족 로드무비일 거라 예상한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 청소년 관람 불가 등급으로 '로건'은 무엇을 보여주고, 무엇을 얻을 것인가. 이미 '데드풀'이라는 성공한 ‘19금 히어로 영화’가 있지만, '로건'의 ‘19금’은 그 이유가 확연히 다르다. 울버린의 클로 액션은 기본적으로 찌르고, 베고, 가른다. 표현의 수위가 높을 수밖에 없지만, 지금까지는 빠르게 찌르고, 빠르게 쓰러지는 것으로 족했다.

 

울버린이 클로를 세워 한 번 날아오르면, 적들이 낙엽처럼 우수수 쓰러졌다. 어린 관객을 위한 배려이기도 하지만, 젊은 울버린은 그럴 수 있었다. 이젠 상황이 다르다. 동네 건달들에게도 두들겨 맞는 로건은 멋을 부릴 여유가 없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에서 얼룩진 클로를 끄집어내서 가족을 지켜야 한다. 심장을 일격하는 깔끔한 액션이 아니라, 닥치는 대로 적의 가장 약한 부위를 공략한다. 적의 목, 정수리, 겨드랑이, 아킬레스건을 노린다.

 

로라의 액션도 유사하다. 로건에겐 없는 발 클로를 가진 이 소녀는 “물건값을 내라”는 편의점 직원에게도 클로를 꺼내 들 만큼, 사회화가 전혀 안 된 어린 야수다. 이 소녀가 늙은 로건을 지키기 위해 클로를 꺼내 들고 적을 수십 번, 수백 번 찌르고, 적의 목을 베어 공처럼 바닥에 굴리는 장면 역시 잔인하다기보다 안타깝다.

 

겨우 열 살 남짓한 이 소녀를 인간으로 대해준 건 간호사 가브리엘라 뿐, 살인 병기 취급을 받았으니 그 대우처럼 행동할 뿐이다. 이처럼 '로건'의 액션은 시각적으론 잔인해 보이지만, 감정적으로 애처롭다. '로건'의 ‘19금 등급’은 시각적 쾌감이 아니라, 이 애처로움을 위한 것이다. '데드풀'이 더 세고 강한 것을 원했다면, '로건'은 더 깊고 진한 것을 원한다. 두 19금 슈퍼히어로 영화의 결정적 차이다.

마침내 불멸의 영웅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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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적이게도 '로건'도 슈퍼히어로에게서 능력을 거둬감으로써, 지금까지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닿지 못했던 뜨거운 경지에 도달한다. 사진 이십세기폭스코리아

세 가지 질문의 답은 모두 나왔다. '로건'은 이 남자의 생존과 무관하게 ‘울버린’의 능력을 잃게 만들어서 ‘울버린’ 시리즈를 끝냈고, 로라는 울버린의 대체품이 아닌 가족이 되었으며, 19금 등급을 통해 어른 관객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감정을 파고든다. 우러러보던 슈퍼히어로가 우리와 같은 현실 세계에서 피와 땀에 절어 뒹굴고 난 뒤에야, 우리는 17년 동안 봐왔지만 한 번도 찬찬히 들여다본 적 없는 로건의 마음을 보게 되었다. '로건'의 훌륭함은 바로 이거다.

 

울버린은 ‘모순(矛盾)’ 존재다. 아다만티움 클로는 모든 것을 찌를 수 있는 창이고, 힐링 팩터의 육체는 모든 것을 막을 수 있는 방패다. 세상을 구하는 슈퍼히어로지만, 늘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고통을 느낄 새도 없이 상처가 치유되지만, 클로가 나올 때마다 “늘 아팠다.” 우리는 그가 늙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불사신인 줄 알았다. 영화 '로건'은 이 모순의 존재에게 ‘순리(順理)’의 자유를 선물한다. 그는 늙고 병들어서야, 가족을 얻고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고, 진짜 어른이 된다.

 

모순적이게도 영화 '로건'도 슈퍼히어로에게서 능력을 거둬감으로써, 지금까지의 슈퍼히어로 영화가 닿지 못했던 뜨거운 경지에 도달했다. 버려라. 얻을 것이다. 이 쉬워 보이지만, 실행하기 어려운 진리를 '로건'은 해낸다. ‘슈퍼히어로 영화’가 응당 목숨 줄처럼 쥐고 있었던, 강함, 능력, 세계 평화 따위의 거대한 명분을 훌훌 털어버리자 '로건'은 ‘캐릭터’가 아닌 ‘인물’을 얻었다.

 

로건이 로라에게 말한다. “놈들의 뜻대로 살지 마” 이 말은 '로건' 이후에 나올 많은 슈퍼히어로 영화들에 전하는 말이기도 하다. '로건'은 후배 슈퍼히어로 영화들에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휴 잭맨의 울버린은 시간 뒤로 흘러가겠지만, 높이 선 이정표를 많은 이가 우러러볼 것이다. 모든 불멸의 영웅들이 그러하듯.

 

글 박혜은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