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김필남의 블루 시네마

‘쓸모없음’의 필요성

by웹진 <문화 다>

우문기 감독의 영화 <족구왕>(2014)


영화 <족구왕>은 군대를 제대한 홍만섭이 대학에 복학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만섭이 돌아온 대학은 사랑과 우정이 가득 찬 대학과 다르다. 현재의 청년들은 스펙 쌓기, 토익 점수 올리기, 공무원 시험 준비 등에 여념이 없다. 영화 속 대학 또한 무한경쟁 시대에 걸맞게 취업을 위한 대학으로 전락한지 오래다. 스펙 쌓기에 실패하면 사회에 나가기도 전에 패잔병이 된다. 그리하여 수많은 청년들은 오늘도 도서관에 앉아 공무원이라는 로또 한 방을 갈망한다. 


대학에서 낭만을 찾는 것만큼 우스운 일이 없다. 그런데 만섭의 경우, 스펙 쌓기에 열심인 대학생들의 모습과 사뭇 다르다. 공무원 준비만이 살 길이라는 식품영양학과 선배의 말에도 아랑곳 않는 만섭은 자신이 대학에 돌아온 첫 번째 이유가 ‘연애하기’이고 두 번째가 ‘족구’를 마음껏 하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하여 만섭이 대학에서 가장 먼저 관심을 가진 일은 사라진 족구장을 건립하기 위해 총장에게 건의하기로 마음먹는다. 


‘총장과의 만남’이라는 장을 통해 만섭은 총장을 만나러 간다. 총장은 학생들을 앞에 두고 대화(소통)가 아닌 그저 홀로 떠든다. 학생들 중 그 누구도 총장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학생들은 노래를 듣거나, 카톡을 하거나, 졸고 있다. 그들은 총장과의 만남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닌 (장학금을 받기 위한) 가산점을 받기 위해 자리에 참석했을 뿐이다.


‘쓸모없음’의 필요성

딴 짓을 하던 학생들은 총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질문을 던진다. 대부분 ‘취업을 위해 대학(총장)은 어떤 노력을 하는가?’ ‘기업과 대학의 제휴는 어떻게 생각 하는가’ 등에 대한 의문이다. 총장은 학생들의 질문에 난감해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상상’한다. 취업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대학과 기업이 손을 잡게 된다면, 학교는 학교의 학생들을 위해 존재하지 못하고 기업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존재할 뿐이라는 것이다. 즉 학교 내부에서 이익을 내야 한다는 목적 의식이 뚜렷한 기업과의 합병이야말로 부정적임을 시사한다. 


대학의 고민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취업을 위한 대학이 되어야 할지, 학문의 정진을 위한 대학이 되어야 할지 말이다. 이때, 만섭이 총장에게 족구장 설립 문제에 대해 건의한다. 대학의 위기, 청년들의 고민이라는 중차대한 논의 앞에서 ‘족구장 건립’이라니…… 순식간에 만섭은 이상하고, 찌질한 인간이 된다. 


사실 만섭이 다니던 대학에는 족구장이 있었으나, 현재 그 자리에 테니스장이 들어섰다. 여기서 족구장이 사라지고 테니스장이 들어섰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족구’는 교육(훈육)을 통해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 때우기나 흥미 위주의 놀이이다. 그런데 테니스로 위시되는 스포츠는 철저하게 자본주의 시스템과 교착되어 있는 귀족 스포츠에 속한다. 예를 들어 테니스를 하기 위해서는 경기복(운동복)을 갖춰 입어야 하고, 테니스화나 라켓 등 부속 기구 등이 필요하며, 테니스 시설장이 구비되어야만 경기가 시작된다. 테니스뿐 아니라 현대 스포츠는 형식과 엄격한 규칙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테니스나 축구 농구 등의 스포츠는 놀이가 아니라 오로지 경쟁 관계를 통해서만 작동하고, 승리자와 패배자가 정해지면 게임이 끝이 난다. 그로 인해 스포츠에 친구는 없고, 경쟁자만 존재할 뿐이다. 경쟁 구조 속에서 친구와의 우정과 연대는 불가능하다.

‘쓸모없음’의 필요성

이 시대의 스포츠는 입시나 건강 등을 위해서라는 목적 의식이 작동한다. 그런데 만섭이 즐기는 ‘족구’는 다르다. 족구는 만섭에게 친구가 생기게 하고, 그들과 연대하게 만든다. 족구를 잘 하든 못하든 상관없다. (승부에 매몰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족구를 하려는 의지와 최소한의 노력만 보여준다면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살이 찌지 않기 위해서 1년 365일 내내 다시마를 먹는 ‘창호’, 살을 빼기 위해 족구를 시작한 ‘미래’, 남자친구의 질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만섭의 족구를 돕는 ‘안나’, 다리를 다쳐 축구를 할 수 없는 ‘강민’까지. 이들은 각각의 개인적인 문제를 안고 족구를 하게 되었고, 족구를 통해 ‘친구’라는 이름으로 그들과 만난다. 그들에게 족구는 이겨야만 하는 경쟁의 논리가 아닌 즐거운 ‘놀이’로 기능하는 것이다. 


도대체 ‘족구’를 쓸모없는 행위라고 규정한 이는 도대체 누구일까? 아마도 그것은 신자유주의와 글로벌리즘의 흐름 속에서 정해진 논리일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인간을 늘 홀로 있게 만든다. 스펙을 쌓아야 한다는 논리로, 돈을 벌어야 한다는 명목으로, 인간은 지속적으로 고립되고 있으며, 함께 무언가를 도모하는 것은 법적으로 금지되고 있다. (하물며 1인 시위만 가능하다.) 그로 인해 족구처럼 무언가 함께 즐기는 것들은 어느새 ‘찌질함’의 대명사가 되었다. 누군가를 이겨야만, 자본으로 환원했을 때만 그것은 바람직한 행위가 되는 것이 바로 오늘날의 삶이다. 


그런데 우리가 쓸모없는 행위를 즐기는 그 자체가 이 현실을 ‘저항’하는 행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족구나 수다 떨기 등의 쓸모없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이 행위는 혼자서 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상대방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이는 정치적인 행위로 변모할 수 있는 힘이 되기도 한다. 

쓸모없는(다메인) 사람들이야말로 모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쓸모없는 사람들끼리 모여 토크를 하면 스스로의 쓸모없음을 대상화할 기회도 될 테고, 현대사회의 문제가 분명히 드러나면서 어라, 변혁의 실마리가 찾아질지도 모릅니다.

(모리 요시타카, 심정명 옮김, 『스트리트의 사상』, 그린비, 2013, 160쪽)

우리는 과연 영화 <족구왕>에 나타나는 족구나 수다 등의 행위를 멀리 해야 하는 것인지 되물어야 한다. 혼자였던 만섭은 찌질한 운동 족구를 통해 친구를 만들었고, 더 나아가 학과의 친구들의 고민을 살펴봤다. 이제 학교는 더 이상 자본(신자유주의)의 노예가 아닌, 낭만적인 캠퍼스로 변모한 것이다. 다르게 말해 이 족구는 바로 정치와 반대편에 서있는 저항의 기제와 다를 바 없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