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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일제강점기에 유럽 30여개국 여행한 남자의 최후

by오마이뉴스

33인의 민족대표 중 한 사람, 최린의 야망과 변절


고우(古友) 최린(崔麟, 1878-1958)이란 인물을 처음 만난 건 중학교 국사 시간이었다. 매우 감성적인 성격을 지녔던 선생님은 3.1독립운동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최린'이란 인물에 대해 유난히 많은 시간을 할애하셨다. 신사풍의 매우 똑똑한 멋쟁이로 3.1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으로 활동하였으나 후에 변절하여 천하의 친일파가 되었다는 것. 해방 후 반민특위에 회부되어 역사에 오점을 남겼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메이지 대학 유학 생활

오마이뉴스

최린. KBS 방송 화면 캡처 ⓒ KBS

실제로 젊은 시절의 최린은 참으로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1878년 함경도 함흥에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배우던 최린은 17세 때 상경하여 일심회(一心會) 사건에 연루되며 1902년 3월 일본의 오사카로 건너간다. 여기에서 망명 중이던 손병희(孫秉熙)를 만나 가까이 지낸다. 이때의 만남은 훗날 최린이 천도교에 귀의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사건이 해결되고 고향으로 돌아오나 입신양명하라는 부친의 권유로 1903년 9월 서울로 올라온다.


서울에 올라온 이듬해 1904년, 대한제국 황실 유학생으로 뽑혀 최남선(崔南善) 등과 함께 도쿄로 유학을 떠난다. 대학입학 자격을 얻기 위해 도쿄부립제일중학교 속성과를 다니는데, 최린은 회장을 맡아 동맹 휴학을 주도하는 등 적극적인 행동을 한다. 1906년 드디어 메이지대학(明治大學) 법과에 입학하여 꿈을 이룬다. 대한유학생회에 가입하여 부회장과 회장으로 활동하며 많은 유학생들과 교분을 나눈다.


1907년 이후에는 광무학회, 태극학회, 대한학회, 대한흥학회 등에서 간부를 맡아 유학생들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09년 7월 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9월 귀국한다. 5년 동안 일본에서 공부한 신학문은 그가 한국에서 일류 명사로 살아가는데 커다란 자양분이 된다.

민족 지도자로서의 삶

1910년 봄, 최린은 서울에 있는 각국 공관에 방화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일본 경찰에 발각되어 무위에 그친다. 그는 독립운동을 위해서는 천도교와 같은 거대한 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이듬해 10월 손병희를 찾아가 정식으로 천도교에 입교한다. 천도교 교단은 최린의 입교를 환영하며, 1911년 2월 교단 소유인 보성중학교 교장을 맡긴다.


그는 교장으로 재임하면서 보성전문학교와 휘문의숙에서도 학생들을 지도하였고,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가 이끌던 비밀결사 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도 참여하여 항일 구국운동에 투신하였다. 최린은 점점 민족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면모를 갖추어 갔다.


독립을 꿈꾸는 민족지사가로서의 절정의 시기는 역시 3.1운동 때이다. 그는 1918년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 천도교 간부들과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며 3·1운동을 준비하였다. 당시 손병희는 종로구 가회동에, 최린은 바로 옆 동네인 재동에 살고 있었다. 또한 오세창과 권동진은 탑골 공원 옆 돈의동에 살고 있었다. 한용운의 거처인 유심사도 재동 옆 계동에 있었다.


이들 모두 가까운 북촌 지역에 살아 서로 만나기가 좋았다. 결국 최린은 손병희, 오세창, 권동진 등과 함께 천도교를 대표하여 민족대표 33인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독립만세를 부른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3년을 선고받아 감옥생활을 한다.


최린은 감형을 받아 1년여 만에 출옥하여 쓸쓸히 서화를 즐기며 지낸다. 얼마 후 교주인 손병희가 세상을 떠나자 주로 천도교 일에 전념하여 교세 확장에 힘쓴다. 그러는 과정에서 오세창 등과 사이가 벌어져 점차 활동에 제약을 받는다. 1927년에는 유럽 30여 개국을 유람하며 견문을 넓힌다. 당시로는 경험하기 힘든 파격적인 여행이었다.

친일파로의 본격적인 변절

최린은 3.1 운동 실패 경험과 외국 여행 등으로 얻은 견문을 바탕으로 점차 민족 개량주의 노선을 밟으며 친일적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1933년 말부터는 '대동방주의'를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친일파 정치인으로 변신한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는 등 적극적인 친일 행위에 앞장선다.


1934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가 되었고, 1938년에는 조선총독부의 어용 기관지인 '매일신보'의 사장이 되었으며, 1939년에는 '조선임전보국단'의 단장이 되었다. 또한 일제가 창씨개명을 실시하자 '최(崔)'자를 둘로 나누어 '가산(佳山)'으로 바꾸고 '가야마 린(佳山麟)'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이러한 변절에 대해 만해(卍海) 한용운(韓龍雲)은 매우 화를 내며 그의 얼굴을 보려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최린이 한용운을 찾아와 어린 딸에게 돈을 쥐어주자 불끈 화를 내며 돈을 빼앗아 '더러운 돈이다'라고 소리치며 최린의 얼굴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두 사람의 성정을 잘 보여주는 일화다.


해방이 되자 최린은 친일 민족반역자로 인정되어 곤경에 처한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가 설치되자 바로 체포되어 3차례의 공판이 열린다. 이 과정에서 최린은 자신의 친일 행위를 시인하고 솔직한 참회를 한다.


당시 체포되어 공판에 나온 인사들은 대다수가 친일에 대한 변명을 하기에 급급하였는데, 최린만은 반성하는 빛을 보여 상대적으로 동정을 받기도 하였다. 특히 이광수는 '민족을 위해 친일을 했다'며 당당해 했고, 서정주는 '일본이 전쟁에서 질 줄 몰랐다'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이밖에 최남선, 박중양, 노덕술 등 뻔뻔한 모습은 많은 국민들을 울분에 떨게 하였다.


이들에 비해 최린은 "민족 대표의 한 사람으로 잠시 민족 독립에 몸담았던 내가 이곳에 와서 반민족 행위에 대해 재판을 받는 그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광화문 네거리에서 소에 사지를 묶고 형을 집행해 달라. 그래서 민족에 본보기로 보여야 한다"고 말하며 반성하는 빛을 보였다. 최린은 1949년 4월 병보석으로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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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과 '선죽교' ⓒ 삼성미술관

최린의 일생에서 가장 많은 화제가 된 일은 화가 나혜석과 염문일 것이다. 당시 나혜석은 외교관인 남편 김우영을 따라 세계 여행을 하다 파리에 머무른다. 마침 최린도 유럽 여행 중 파리에 들러 모임에서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급속도로 가까워져 사랑을 하게 되어 불륜을 저지르고 만다. 그들의 관계는 소문이 나 남편 김우영이 알게 되고, 결국 나혜석의 결혼 생활은 파경을 맞게 된다.


그런데 당시 최린은 큰 봉변을 면하고, 나혜석만 품행이 나쁜 여자가 되어 소박을 맞고 많은 이들에게 욕을 먹는다. 이에 분개한 나혜석은 두 사람의 관계를 공론화하여 최린을 '정조 유린죄'로 고소하고, 당시 돈으로는 거금인 12,000원의 위자료를 청구한다. 최린은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동아일보 기자를 매수하여 기사를 막고, 나혜석에게는 2,000원만 주고 고소를 취하하도록 종용한다. 결국 나혜석은 굴복당하고 삶의 의지를 잃는다. 두 사람 다 얻은 것보다는 잃은 것이 많은 인연이었다.

최린의 글씨와 사군자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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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린. ‘묵란’, ‘묵죽’ ⓒ 황정수

최린은 다재다능한 사람이었다. '기린(麟)'이란 이름처럼 멋진 풍모를 지녔고, 예술적 소양이 높아 글씨도 잘 쓰고, 그림도 잘 그렸다. 글씨는 매우 단정한 필체를 지녔다. 청나라 말기에 활동했던 '양주팔괴'나 '상해파' 서예가들의 글씨를 공부하여 자신의 필체로 만든 느낌이 든다. 먹을 넉넉히 쓰면서 획을 굳고 단정히 하여 반듯한 필체를 보인다. 획을 쭉 뻗어 길게 쓰면서도 흐트러짐이나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자신감 있는 품성을 느끼게 한다.


그림은 사군자를 잘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난초와 대나무, 매화를 잘 그려 일가를 이루었다. 그에 비해 국화는 잘 그리지 않았다. 보통 그를 '전문화가'에 대비하여 '여기화가(餘技畵家)'라 하나 실제 그의 작품은 전문화가들 못지않았다. 1922년 조선미술전람회가 창설되자 그의 작품도 출품되어 입선에 들었다.


그의 난초 그림은 농묵을 사용하여 난초 잎을 굵고 힘 있게 그려 넉넉한 품격을 보여 준다. 이러한 필치는 운미(芸楣) 민영익(閔泳翊)의 난초 그림과 유사한 면을 보인다. 또한 서병오(徐丙五) 등 민영익에게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그림과도 유사성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역시 민영익과 청나라 화풍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대나무 그림 또한 난초 못지않게 능란한 솜씨를 보인다. 최린의 묵죽은 주로 줄기가 가는 대나무를 그렸는데, 날렵하게 쭉 빠진 품새가 잘 빠진 황새처럼 보기 좋다. 그림에 맞춰 가는 붓으로 멋을 내 쓴 글씨 또한 그림의 품격을 더해준다. 매화 그림은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집안의 매화 그림과 유사한데, 조선의 매화 그림보다는 청나라 화풍의 매화와 유사하다. 이 또한 양쪽 모두 중국 그림의 영향을 많이 받은 탓으로 보인다.


파란만장한 최린의 삶을 되돌아보면 마치 한국 근대기의 혼란상을 그대로 보는 듯하다. 근대화 과정 속에서 조국을 잃는 현실을 지켜보며 살아야 했던 한 청년 지식인의 변모 과정이 보이고, 개인의 야망을 버리지 못해 정신적 혼돈을 겪는 불행한 선각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서글프기도 하다. 역시 어려운 시대에 지식인으로서 살아가는 일은 매우 힘든 일임을 느끼게 한다.


황정수 기자(galldada@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