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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가장 찾아가기 어려운 장소, 폐허가 된 독립운동 유적지

by오마이뉴스

[대한민국임시정부 100년, '임정로드'를 떠나다] 열한 번째 이야기, 천녕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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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창설 기념사진. 부대기 뒤편 중앙이 김원봉 대장(사진출처: 임시정부 항주 기념관에서). ⓒ 조종안

위는 조선의용대(대장 김원봉) 창설 기념사진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제의 집중 공격으로 남경(난징)이 위기에 처하자 김원봉은 조선혁명당 세력을 거느리고 난징을 떠나 후베이성 우한(武漢)으로 간다. 그는 이듬해(1938) 10월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아래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 청년들을 재규합, '조선의용대'를 창설하고 대장에 취임한다.


약산 김원봉(1898~1958). 그는 항일무장투쟁의 상징 인물로 경남 밀양 출신이다. 밀양초등학교 재학 중 일장기 똥통 투척 사건을 주도해 퇴학당한다.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가 톈진의 덕화학당(독일계 학교), 난징의 금릉대학(영문과) 등에서 수학한다. 당시 약산은 5개 국어(한국어, 중국어, 일어, 독일어, 영어)를 구사하는 보기 드문 엘리트 청년이었다.


1919년 봄 만주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한다. 그곳에서 군사학 및 폭탄 제조법을 익힌다. 그해 11월 만주 지린성 파호문 밖 한 중국인 집에서 뜻을 같이하는 윤세주, 이성우, 곽경 등 13명과 의열단을 조직하고 단장(義伯)으로 추대된다. 그 후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일제관공서 폭탄 투척과 고위 관료 및 친일파 처단 등으로 침체됐던 항일운동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는다.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9월), 밀양경찰서 폭탄 투척(1920년 12월),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1921), 다나카 기이치 육군 대장 저격 미수사건(1922), 동경 이중교(二重橋) 폭탄 투척 사건(1923) 등 약산이 주도한 숱한 의거는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그가 일제에 얼마나 위협적인 존재였는지는 백범 김구보다 많았던 현상금 액수에서도 엿볼 수 있다.


약산은 의열단을 이끌면서 소규모 조직 투쟁에 한계를 느낀다. 강하고 짜임새 있는 군대의 필요성을 절감한 그는 1926년 동지들과 황포군관학교에 입교, 장제스 국민정부와 인연을 쌓으면서 4기로 졸업한다. 그 후 장제스 도움과 황포군관학교 교관 경험을 바탕으로 1932년 가을 난징 외곽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고 항일투쟁을 이끌 군관을 양성한다.

천녕사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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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로드 탐방단 1기 기념사진(천녕사에서) ⓒ 조종안

지난 6월 1~8일, 기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26년의 발자취(상하이에서 충칭까지)를 따라 걷는 '임정로드 탐방단 1기' 단원으로 중국에 다녀왔다.


탐방 넷째 날(4일)은 역사의 도시 난징에서 시작했다. 오전 8시 30분 호텔을 출발, 중국 현지 가이드와 <오마이뉴스> 김종훈 기자(<임정로드 4000km> 저자) 안내로 난징대학, 리지샹위안소 유적진열관 등을 돌아보고 점심을 먹은 뒤 난징 외곽 황룡산 기슭에 자리한 천녕사(天寧寺: 조선혁명간부학교 훈련지)로 이동했다.


일본군 위안소 유적지에서 받은 충격이 커서일까.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진열관에서 본 유물들과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 모습이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도 마찬가지. 끝없이 흐르는 눈물의 '할머니 조각상'도 스쳐지나갔다. 휴식을 취하는 일행들에게 이야기할 수도 없고, 난감했다. 후유증은 목적지에 도착할 무렵 겨우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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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녕사 입구(독립운동 유적지 가는 길이 맞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 조종안

버스에서 내리니 허리 높이로 자란 잡초들과 폐가나 다름없는 시멘트 건물, 그리고 건물들을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숲만 보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고개를 사방으로 돌려본다. 그러나 자주독립의 꿈을 불태우며 피땀 흘렸을 조선 청년들 흔적은커녕 안내판 하나 보이지 않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폐건물 사이 소로를 지나 오르막길로 접어든다.


산길이 꽤 험했다. 넘어지면 코가 깨질 것 같은 비탈길도 나타난다. 7~8분 걸었을까. 숨이 차면서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한다. 온몸이 땀으로 범벅이고, 다리도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중국의 3대 화로 도시에 꼽히는 난징. 오늘은 32도까지 올라갈 거라 했는데 예상대로였다. 포기냐 계속 전진이냐, 망설이고 있는데 앞서가던 누군가가 "쉬엄쉬엄 천천히 올라오셔도 됩니다!"라고 말한다. 그 희망의 메시지에 용기를 얻어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훈련은 지금의 사관학교 교육과 큰 차이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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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간부학교에 대해 설명하는 김종훈 기자 ⓒ 조종안

김종훈 기자에 따르면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년(1932~1935) 동안 존재했다. 당시 1기생은 탕산(湯山) 선사묘(善祠廟)에서, 2기는 강소성(江蘇省) 강녕진(江寧鎭)에서, 3기는 황룡산 기슭 천녕사에서 교육받았다. 그중 천녕사는 임정로드 답사지 중 찾아오기 가장 어려운 장소다.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인적이 뜸한 장소에 교육장을 설치한 게 그 이유다.

"여기가 조선혁명간부학교 3기생들이 훈련받았던 천령사(도교 사원)입니다. 저항시인 이육사와 중국 애국가인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정율성 선생도 이곳 출신이죠. 조선혁명간부학교 출신이 총 125명인데 1기(26명)와 2기(55명) 훈련지는 일본군 공습으로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3기생 44명이 훈련받은 이곳만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겁니다.


훈련장은 단순한 신병 교육장이 아니라 엘리트 군관을 양성하기 위한 간부학교라서 지금의 사관학교 교육과 큰 차이가 없을 정도로 정치, 철학, 회계사(경제), 사회학, 의열단사, 그리고 유격전과 특수공작에 필요한 총격, 포격, 폭탄 제조까지 전반적으로 훈련을 받았어요. 그래서 여기는 말 그대로 정치 군사학을 교육하기 위한 장소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교장은 김원봉 장군이었고, 정치학 교수가 윤세주였어요. 재미있는 점은 윤세주 선생이 의열단 의거에 참여했다가 잡혀가 8년 동안 감옥에 계셨단 말이에요. 그런데 서른 살이 넘어서 이곳에 옵니다. 그때 김원봉과 박차정 여사가 교관을 해달라고 청했는데 선생 스스로 나는 학생이 되겠다며 1기로 훈련을 마치고 2기 때부터 3기까지 교수 역할을 합니다."

이육사는 윤세주 권유로 1기로 입교했다. 그는 저항 시인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그의 직업은 독립운동가였다. 정율성(본명 정부은)은 교장이던 약산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음악으로 성공하라는 뜻으로 '율성(律成)'이란 이름을 지어줬단다.


윤세주는 최고 이론가이자 탁월한 조직가였다. 그는 약산과 '동전의 양면'으로 불릴 정도로 서로 보족해주는 동지 관계를 유지하며 약산의 조선의용대 및 민족혁명당 노선을 뒷받침한 것으로 전해진다.

향 피워놓고 추모시간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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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혁명간부학교 3기생들이 식수로 사용했다는 샘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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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녕사로 오르는 계단 좌·우측 기둥에 한자로 음각된 ‘천녕사’와 ‘탕산재장’ ⓒ 조종안

일행은 세 동의 건물을 비롯해 우물, 화장실 등을 돌아봤다. 천녕사로 오르는 계단 좌·우측 기둥에 음각된 '天寧寺·천녕사'와 '湯山材場·탕산재장'이 걸음을 멈추게 한다. 간부학교 1기생은 '탕산 선사묘'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전해지기 때문. '탕산'은 산 이름, '재장'은 벌목장을 의미하므로 1기생 교육장도 천녕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됐다.


강당이나 숙소로 사용했을 가운데 창고는 태풍으로 날아가 버렸는지 지붕도 없다. 이렇듯 폐허로 전락한 유적지에서 애국 청년들의 뜨거운 숨결을 느껴본다는 것은 무리였다. 그러나 열악한 환경에서 산모기와 싸워가며 고된 훈련을 받았을 터. 오직 내 손으로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굳은 신념 하나로 이역만리 훈련장을 찾아온 그들의 정신이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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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식 추모제 준비하는 탐방단원들 ⓒ 조종안

주변을 돌아본 일행은 추모의 시간을 갖기 위해 마당 한쪽에 신문지를 펼쳐놓고 향을 피웠다. 약산 사진이 저장된 휴대폰을 위패 대신 세워놓으니 그럴듯했다. 제주(祭酒)는 탐방단 단원이 준비해온 백주(白酒)를 사용했다. 일행은 조국의 완전한 독립을 열망하며 피땀 흘렸을 애국열사들 앞에 술 한 잔씩 올리고 삼가는 마음으로 두 손을 모았다.


김종훈 기자는 "작년에 후배들이랑 왔을 때는 이곳에서 오랫동안 머무르다 내려갔다. 그때 김원봉 장군에게 내년에는 사람들이랑 꼭 같이 와서 표지석이라도 하나 세우겠다고 말씀드렸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표지석을 못 세웠다. 그렇지만 이렇게 술이라도 한잔 따르고 나니 조금 위안이 된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기념사진을 찍고 내려오려 하는데, 천녕사 입구 쪽에서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탐방단이 올라오는 모양이었다. 가까이 보니 리치샹 위안소 진열관에서 만났던 그들이었다. 일행은 발길을 멈추고 강원도 인재개발원에서 왔다는 그들과 '십년지기'처럼 반가워하며 인사를 나눴다. 손을 맞잡는가 하면,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는 감동적인 모습도 보였다.


일행은 강원도에서 온 탐사단들과 김종훈 기자의 미니 강의를 듣고 하산, 난징 공항으로 이동했다. (계속)


조종안 기자(chongani@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