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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단풍 구경 갈 때 등산복에 힘주면 안 되는 이유

by오마이뉴스

시월의 맑게 갠 날, 뱀사골계곡을 찾아가다

뱀사골계곡의 단풍. 뱀사골계곡에 들어서자 빨간색 단풍이 물소리와 함께 탐방객을 맞아 준다. ⓒ CHUNG JONGIN

가을의 뱀사골계곡은 인간의 존재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사람들의 말소리는 우렁찬 계곡물 소리에 묻혔고 화려한 등산복 차림의 탐방객들은 옥빛을 띤 계곡물과 우아한 단풍이 빚어내는 절경에 기가 죽어 끼어들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시월의 맑게 갠 날, 삼십칠 년 전 여름 거문도, 백도를 거친 여행의 피로를 말끔히 가시게 했던 뱀사골을 다시 찾았다. 이번에는 기품있게 물든 단풍이 여전한 물소리와 함께 반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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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 바라 본 뱀사골계곡. 초입부터 장관이다. ⓒ CHUNG JONGIN

뱀사골계곡은 지리산의 대표적인 봉우리인 반야봉, 삼도봉, 명선봉 사이의 울창한 원시림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소와 담과 기암괴석을 감돌아 흐르면서 반선 마을까지 이어지는 9.2km의 청정계곡이다.


계곡 곳곳에는 투명한 옥색 물을 담고 있는 소와 담이 있는데 사람들은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재미있고 그럴싸한 전설을 담아 요룡대, 탁용소, 병소, 병풍소, 제승대, 간장소 등으로 부르고 있다.


뱀사골이란 지명 역시 구불구불한 계곡이 뱀 모양을 닮았다 해서, 예전에 배암사란 절이 있었다 해서, 또 뱀이 두려워 해마다 뱀에게 승려를 제물로 바치다 서산대사의 지혜로 승려를 잡아먹던 이무기가 죽었다 해서 등등 여러 유래를 두고 있다.


뱀사골계곡을 거쳐 화개재, 삼도봉, 임걸령, 노고단 고개, 성삼재까지 20km 가까이 되는 산행을 계획하고 서둘러 일찍 길을 떠났다. 평일이라 그런지 지리산 탐방의 인기가 떨어져서인지 만나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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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룡대.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요룡대. 물이 맑고 투명하여 절로 수영이 하고 싶어졌다. ⓒ CHUNG JONGIN

용이 승천하는 모습을 닮았다는 요룡대를 지나자 사연 많은 와운마을이 나왔다. 마을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에 따르면 산이 높고 골이 깊어 구름도 누워간다고 해서 와운마을로 부르는데, 임진왜란 당시 국난을 피하고자 심산유곡을 피난처로 찾은 사람들이 정착하여 마을을 이뤘다고 한다.


이렇듯 전쟁으로 만들어진 와운마을은 이후로도 전쟁의 아픔을 몸서리치게 겪은 곳이다. 여순사건의 지휘관들이 반선에서 토벌된 후 와운마을은 토벌대와 빨치산의 치열한 전투장이 되어 전 주민이 피난 이주를 하기도 했단다.


와운마을을 지나니 용이 허물을 벗고 승천하다 이곳 암반 위에 떨어졌다는 탁용소가 단풍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옛날 사람들은 자연의 모습을 보며 용을 상상하곤 했는지 어딜 가나 용과 관련된 이야기가 참 많다.


계곡을 끼고 이어진 길은 상당히 평탄했다. 그저 울창한 숲길을 걷는 느낌을 받다가 계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널 때야 아래위를 보면서 깊은 산속임을 실감했다. 병소, 병풍소를 지나 옥류교를 건너 제승대를 만났다. 1300여 년 전 송림사 고승 정진 스님이 불자의 애환과 시름을 대신하여 제를 올렸던 장소란다. 그래서인지 주변의 기암괴석 사이로 흐르는 푸른 물이 경건해 보였다.


뱀사골계곡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간장소에 이르렀다. 간장소란 명칭의 유래는 상당히 소박했다. 간장소는 검푸른 색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옛날 소금 장수가 화개재를 넘어오다 소금 짐을 빠뜨려 간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간장소의 물을 마시면 간장까지 시원해진다는 이야기 등이 전해져 간장소라 불린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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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장소. 소금 장수가 물을 마시다가 소금 짐을 빠뜨렸다는 간장소. 바위 주변의 물 빛깔이 간장색이다. ⓒ CHUNG JONGIN

간장소를 지나면서 산길은 가팔라졌다. 2.7km 위에 있는 화개재에서 소금을 받아 험한 산길을 내려오던 소금 장수가 간장소를 만나자 땀을 식히려 소금 짐을 벗고 간장까지 시원해지는 물을 마셨는데, 그러는 사이 소금 짐이 물에 빠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은 각각의 이야기가 아니라 소금 장수의 안타까운 사연이 아닐는지.


화개재까지는 급경사를 올라가야 했다. 소금 장수는 무거운 소금 짐을 지고 가파른 산길을 내려왔으니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소금 장수는 소금을 팔아 무엇을 하려고 했을까? 병든 어머니 약 한 채를 지어 드리려고 했을까, 집에서 기다리는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곡식을 사 가려고 했을까, 아니면 남원 읍내에 들어가 오랜만에 하룻밤을 즐기려 했을까. 힘이 들어서인지 소금을 물에 몽땅 빠뜨리고 빈손으로 반선까지 내려갔을 소금 장수 생각이 자꾸 났다.


드디어 뱀사골계곡의 시작 점인 화개재에 도착했다. 화개장터 상인들이 넘나들어 화개재라 불렀단다. 그 옛날 화개재에서는 경남에서 소금과 해산물을 짊어지고 연동골을 따라 올라온 상인들이 전북에서 삼베와 산나물들을 지고 뱀사골로 올라온 상인들과 물물교환을 했단다. 화개재는 해발 1320m의 고지 장터였던 셈이다.


이로써 뱀사골계곡 탐방은 끝이 났다. 이제 본격적인 지리산 등반이 시작되었다. 첫 번째로 오른 곳은 700개 이상의 계단을 올라가야 하는 삼도봉이었다. 삼도봉은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가 모이는 꼭짓점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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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도봉. 경상남도, 전라남도, 전라북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 CHUNG JONGIN

사방이 확 트였는데, 한쪽의 경치가 특히 아름다웠다. 운무에 싸여 단풍 진 산등성이가 보이다 말다 했는데 사진을 찍고 있는 등산객에게 물어보니 반야봉이란다. 예정에 없던 반야봉 등정의 욕심이 생겼다. '예까지 왔는데 이번 산행의 최고봉인 반야봉을 가지 않을 수야'라는 생각으로 다시 힘을 내기로 했다.


반야봉까지 오르는 길은 쉽지 않았으나 일단 오르고 나니 멀리 조망이 시원하게 트이면서 구름과 함께 산 위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오래전 지리산 천왕봉에서 느꼈던 그 감동이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지리산의 산등성이들이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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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에서 바라본 지리산 산등성이. 산등성이들이 구름 속에서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 CHUNG JONGIN

반야봉을 오르느라 계획에 없던 한 시간 반을 썼으니 짧아진 해에 맞추어 성삼재까지 갈 길이 바빴다. 노루목부터 노고단 고개까지 길은 순한 편이었으나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면서 길게 느껴졌다. 임걸령을 지나 한참을 걷다 보니 삼각형 모양의 봉우리가 보였다. 노고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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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 노고단 고개로 가는 길목에서 바라 본 노고단 ⓒ CHUNG JONGIN

4시가 넘어 도착한 노고단 고개에서는 등산객을 통제하고 있었다. 이미 노고단 정상보다 높은 해발 1730m의 반야봉을 거쳐 왔기에 오를 생각도 오를 기운도 없었다. 또한, 뱀사골계곡에서 절정의 단풍을 보고 왔기에 노고단 고개는 그저 지나가는 길일 뿐이었다. 노고단부터 성삼재까지의 길은 차가 다닐 수 있는 도로여서 짧은 거리임에도 무척 지루했다.


한때는 화엄사부터 시작해 노고단을 거쳐 천왕봉으로 오르는 지리산 종주를 해 보는 것이 꿈이었는데 이제는 지리산 종주 거리가 달라진 셈이다. 삼십 오륙 년 만에 다시 찾은 지리산, 특히 삼십칠 년 전 뱀사골계곡에 와서 시원한 계곡물에 넋이 빠져 머리를 감느니 세수를 하느니 하며 떠들고 웃던 친구들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지리산은 그대로인데 우리만 나이가 든 것인가? 나의 버킷리스트에서 뱀사골계곡을 지우는 순간이었다.


백종인 기자(elliechung.5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