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이슈 ]

'불패신화' 박항서 감독이 만들어낸, 준비된 '기적'

by오마이뉴스

베트남 60년만의 SEA게임 금메달...

박 감독 부임 이후 5개 대회 연속 성공 신화

오마이뉴스

▲ 박항서 감독 ⓒ 연합뉴스

박항서 감독이 가는 길이 곧 베트남 축구의 새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22세 이하 축구대표팀이 10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2019 동남아시안게임(SEA Game)' 남자 축구 결승에서 인도네시아를 3-0으로 꺾고 정상에 올랐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이 3골차로 크게 앞서며 우승을 눈앞에 둔 후반 32분 주심에게 거센 항의를 하다가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박 감독의 공백에도 흔들리지 않고 남은 시간 실점없이 리드를 잘 지켜냈다. 박 감독의 이례적인 항의는 점수차가 벌어진 상황에서 자칫 느슨해질 수 있는 선수들의 긴장감을 다잡고, 혹시 발생할수 있는 상대의 거친 플레이나 판정 불이익으로부터 선수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승부수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동남아시안게임은 동남아 지역에서는 최대의 스포츠 제전으로 꼽힌다. 베트남 축구로서는 무려 60년 만에 맛보는 우승이었다. 베트남은 월남(남베트남)시절이던 1959년 초대 대회 우승을 차지한 바 있으나 통일 베트남 건국 이후로는 한번도 정상에 올라보지 못했기에 이번이 사실상 첫 우승이나 마찬가지다. 베트남 전역도 박항서호의 우승에 환호하며 들썩이고 있다.

준비된 기적

박항서 감독은 지난 11월 베트남 축구협회와 3년 재계약을 맺었다. 구체적인 조건은 양측 합의로 밝히지 않았지만 역대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 사상 최고대우를 보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계속해서 23세 이하 연령대별 대표팀과 A대표팀을 겸임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베트남 축구협회와 협상이 예상보다 길어지자, 일부 국내 팬들을 중심으로 이미 큰 성공을 거둔 박 감독이 '박수칠 때 떠나야한다'는 주장이 조심스럽게 제기되기도 했다. 박 감독이 처음 베트남에 부임할 때와는 달리 연이은 호성적에 고무된 베트남 축구협회와 국민들의 높아진 기대치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박 감독은 베트남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며 또 한 번의 도전을 선택했다. 동남아시안게임은 박 감독 재계약 이후 첫 대회였다. 큰 대회를 준비하기에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경기 일정 또한 무려 7경기를 치러야하는 등 빡빡했다. 하지만 박 감독은 신흥 강호로 부상한 베트남에 대한 상대팀들의 끊임없는 텃세와 신경전, 베트남 국민들의 높은 기대치 등 안팎의 부담감을 모두 극복하고 또 한 번의 역사를 썼다. 베트남 축구의 오랜 라이벌이자 일본 출신 니시노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태국과의 '감독 한일전'에서 판정승을 거둔 것은 국내 축구팬들에게도 큰 자부심을 안겨줬다.


베트남은 박 감독이 부임한 2017년 이후 그야말로 모든 대회에서 자국 축구의 최고성적을 잇딜아 경신하고 있다. 박 감독이 처음으로 지휘했던 2018년 AFC U-23 챔피언십에서의 준우승을 시작으로, 같은 해 열린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에서는 4강에 올랐다. 성인대표팀을 이끌고 첫 참가한 스즈키컵(AFF 챔피언십)에서는 10년 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박 감독이 사령탑으로서 이뤄낸 국제대회 첫 우승이기도 했다.


기세를 이어간 올해 초 AFC 아시안컵에서도 '죽음의 조'를 극복하고 베트남을 8강에 올려놨다. 그리고 이번 동아시안게임 우승까지 차지한 것이다. 베트남은 박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후 치른 5번의 국제대회에서 단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이제는 명실상부한 '동남아 축구의 패자'로 우뚝 섰다.


박 감독이 베트남에서 거둔 눈부신 성공은 한국축구에도 많은 것을 시사한다. '도전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과 '준비된 자만이 기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박항서 신화는 끝나지 않았다

어느덧 60대에 접어들며 한국 나이로 환갑을 넘긴 박 감독(1959년생, 실제는 57년생)은 한국축구계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젊은 지도자를 선호하는 분위기에 휩쓸려 조용히 잊혀졌을지도 모를 인물이었다. 지도자 경력은 길지만, 스타 출신 감독들에 밀려 프로 감독 데뷔도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편이었다.


하지만 박 감독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자리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하며 기회를 기다렸다. 생애 처음으로 해외에서 들어온 베트남 축구대표팀 감독직 제의는 박 감독에게 일생일대의 도전이었다. 국내에서도 K리그 2부와 실업팀 사령탑을 전전하며 하향세를 걷고 있는 박 감독을 선택한 베트남 축구협회의 결정도 당시에는 도박이었지만, 불안정한 기회를 '신의 한 수'로 바꾸어낸 것은 온전히 박 감독의 능력과 노력이었다.


철저한 팀스피릿, 왕성한 체력과 활동량을 강조하는 축구스타일, 구성원들과의 신뢰와 존중를 중시하는 겸손한 인품 등은 사실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맡기 훨씬 전부터 박항서 리더십의 특징으로 꼽혔다. 수십 년간 잡초처럼 여기저기서 시행착오를 겪으며 축적한 경험과 연륜이 베트남이라는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결합되면서 비로소 만개하기 시작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꼰대'처럼 박 감독이 그저 과거의 성공이나 현실에 적당히 안주하는 베테랑 지도자들의 전철을 밟았다면 오늘날 베트남에서 인생역전에 가까운 대성공은 결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제 박 감독은 더 이상 '쌀딩크'라는 별명처럼 누군가의 아류를 넘어서, 박항서라는 이름 그 자체로 한국과 베트남 축구를 상징하는 하나의 '전설'이 되었다.


박 감독 앞에 놓인 다음 과제는 베트남 축구의 2022년 FIFA 카타르 월드컵 본선진출이다. 베트남 축구는 아직 월드컵 본선은커녕 월드컵 최종 예선에 오른 적도 전무하다. 베트남 A대표팀은 현재 진행 중인 아시아 2차 예선에서 G조 1위(승점 11)를 달리고 있어 최종 예선진출을 눈앞에 두고 있다.


박 감독의 역량에 힘입어 어느덧 동남아 축구의 절대강자로 떠오른 베트남이지만 극동과 중동의 강호들이 버티고 있는 월드컵 예선에서는 여전히 약체 신세인 것도 사실이다. 월드컵 본선진출은 어쩌면 박 감독이 베트남 축구를 이끌고 극복해야할 가장 '어려운 난제'이자, 동시에 가장 '위대한 업적'이 될 수도 있는 도전이다. 박 감독의 신화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준목 기자(seaoflee@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