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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사라질 뻔한 역에 KTX가... '고현정' 만나 인생역전

by오마이뉴스

내년부터 서울-동해 KTX 정차하는 정동진역의 영화 같은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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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햇살을 가득 받은 정동진역의 모습. 정동진역은 그 자체로 영화와 같은 이야기를 간직한 역이기도 하다. ⓒ 박장식

과거 통일호도 지나쳐갔던 기차역이 있었다. 해수욕장의 너른 백사장이 끝나는 지점에 플랫폼이 있었다는 이 역은 아는 사람들만 비둘기호를 타고 일부러 찾던 숨은 명소였다. 그랬던 곳이 25년만에 커다란 역으로 변했다. 모든 열차가 서는가 하면, 내년부터는 서울에서 오는 KTX도 이 역에 들렀다 동해로 간다.


1962년 태어난 영동선 정동진역은 그 자체로 사람과 같은 인생을 살아왔다. 인기가 없어 폐역될 뻔했다가 <모래시계>라는 영화같은 드라마를 만나 한국인이라면 안 들러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 관광지가 됐다. 서울-동해 간 KTX 개통을 앞두고 정동진역의 일생을 되짚어 보았다.

폐역 직전, 고현정이 이 역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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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드라마 8회의 한 장면. 주인공 고현정은 이 역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로 가려다 경찰들에게 잡혀간다. ⓒ SBS

1962년 영동선 동해-강릉 구간 개통과 함께 태어난 정동진역은 영동선과 태백선에 숱하게 널렸던 다른 기차역들이 그랬듯, 강원도의 '검은 황금'이었던 석탄 운반을 위해 만들어졌던 역이었다. 정동진역은 강릉시 강동면(당시 명주군) 지역의 탄광에서 생산된 석탄과 탄광의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정차지 역할을 했다. 하지만 석탄 합리화 사업 이후 강동면의 인구가 크게 줄었고, 정동진역 역시 이용객이 크게 줄어들었다.


서울 사는 사람들이 정동진역에서 해돋이를 보러 가려면 서울에서 강릉역으로 향한 다음, 다시 강릉역에서 비둘기호로 갈아타야 했다. 무궁화호나 통일호처럼 속도가 비교적 빠른 열차는 선택지에 없었다. 가장 느린 완행열차인 비둘기호가 정동진역으로 향하는 유일한 열차였다. 그 정도로 정차하는 열차가 적었다. 1990년대 초에는 차량, 버스 등에 수요가 밀려 철도청이 폐역을 검토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995년 1월 19일의 저녁, 영화같은 일이 일어났다. 당시 SBS에서 방송했던 인기 드라마 <모래시계>가 이 역의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극중 윤혜린(고현정)이 정동진역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열차를 기다리다 경찰에게 잡혀가던 그날, <모래시계>의 시청률은 43.9%를 기록했다. 그렇게 정동진역은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고현정이 체포되던 그 역은 열차에서 내리자마자 동해를 볼 수 있는 관광 명소, 해돋이 명소로 떠오르면서 엉겁결에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승강장에 서 있었던 소나무에는 '고현정 소나무'(현재 '모래시계 소나무')라는 이름까지 붙어버렸다. 철도청은 긴급히 관광열차를 편성했지만 몰려드는 승객이 너무도 많았다.


통일호와 무궁화호가 정동진역에 정차하기 시작했다. 철도청은 넘쳐나는 승객을 잡기 위해 1996년부터 1년에 걸쳐 승강장을 개축하는 공사를 진행했다. 승강장은 바다와 마주할 정도로 충분히 넓어졌다. 승강장과 정동진해수욕장을 연결하는 계단도 이때 만들어졌다.

관광지가 된 정동진, 기차 종착역도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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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맞붙은 정동진역의 '3번 승강장'. 이 곳에서 많은 이들이 내려 바다를 바라보았고, 여러 카메라가 이 곳에서 머무르다 떠났다. ⓒ 박장식

관광지가 된 정동진 일대는 정동진역과 함께 다양한 볼거리로 가득해졌다. 선크루즈 리조트, 시간박물관을 필두로 한 여러 박물관과 리조트가 정동진 일대에 입주했고, 옛 해양순찰로를 산책로로 탈바꿈한 바다부채길이 열려 관광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최근에는 레일바이크도 개장해 즐길거리도 늘었다.


수려한 풍경 덕분에 방송과 영화, 드라마에도 빠지지 않는 감초같은 조연이 됐다. 2009년 MBC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에서는 주인공 강마에(김명민)가 사기를 당한 두루미(이지아)를 이곳에서 위로하는가 하면, 최근에는 SBS 예능 <미운우리새끼>에서 임원희가 정석용과 함께 일출을 보러 오는 등 계속해서 미디어에 노출되고 있다.


정동진역은 특이한 기록도 가지고 있다. 평창 올림픽 준비로 인해 잠시 문을 닫은 강릉역을 대신해 영동선 여객열차의 종착역 역할을 수행한 것이다. 2014년부터 4년 남짓한 기간 동안 부산, 대구, 청량리 등 전국 각지의 역에서 '정동진행 열차'가 상시 운행하는 등, 불과 20년 전까지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역 건물도 과거에 비해 커졌다. 기존의 자그마한 역사로는 추운 바다를 피해 역 안에서 해돋이를 기다리는 승객, 새벽 첫차를 타고 동해 장으로 나가는 승객을 모두 맞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원래 있던 역 바로 옆에 새로운 역사를 신축했지만, 간이역처럼 아담한 옛 역사 역시 그대로 존치하고 있다.

간이역에서 KTX 정차역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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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행 KTX의 정동진역 바로 이전 정거장, 진부역에 KTX가 서 있다. 동해행 KTX가 개통하면 이 역의 다음 역은 강릉역과 정동진역으로 병기되게 된다. ⓒ 박장식

이제 정동진역은 한국철도 중 가장 빠른 고속열차인 KTX를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 늦어도 내년 초에 개통할 서울-평창-동해 간 KTX 노선이 이곳에 정차한다. 하루 여섯 번 동해와 묵호를 거쳐 서울역으로 향하는 KTX를 맞이하기 위해 맞이방을 증축하고 승강장을 재설비했다.


부동의 해돋이 명소로 손꼽혔던 정동진은 바다와 철도를 기반으로 여러 관광지가 생겨나면서 더욱 다채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곳이 됐다. 삼척과 강릉 사이를 오가며 동해의 수평선을 볼 수 있는 바다열차가 매일 운행하고 있으며, 인근 리조트에도 많은 이들이 찾아와 조용한 바다를 둘러보곤 한다.


정동진역은 내년 초 KTX 개통과 함께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할 예정이다. 겨울에는 새해를 다짐하는 해돋이를 보기 위해, 여름에는 시원한 바다를 마주하기 위해 KTX를 타고 두 시간 거리의 정동진역으로 향할 것이다.


그렇게 정동진역을 방문하게 된다면, 누군가는 <모래시계>의 고현정만큼이나 굴곡 있는 삶을 살아왔던 역의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고, 누군가는 '오메가 모양'의 일출을 볼 수 있는 곳이라는 바닷가를 떠올릴 것이다. 이렇듯 모두의 감상은 다르지만 단 하나, '영화와 같은 기차역'이라는 생각은 모두 같지 않을까.


박장식 기자(trainholic@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