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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이 급진적 정치인이 왜
'패륜 여성'으로 기록됐을까

by오마이뉴스

팜 파탈에 관한 진실과 거짓말


16세기 영국 튜더 왕조의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의 드라마틱한 삶은 많은 소설과 연극, 영화에 흥미로운 소재거리를 제공했다. 나탈리 포트만, 에릭 바나, 스칼렛 요한슨 등 호화 캐스팅의 <천일의 스캔들, 2008년작> 역시 그들의 이야기이다. 이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왜곡했다는 이유로 많은 논란을 일으킨 영국 작가 필리파 그레고리의 <The Other Boleyn Girl, 2001>을 원작으로 하여 제작한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국 귀족 불린가의 야심적인 딸 앤(나탈리 포트만)은 외삼촌이자 왕의 측근 노포크 공작의 도움으로, 헨리 8세(에릭 바나)를 유혹하여 권력과 명예를 얻으려 한다. 그러나 왕은 순수하고 다소곳한 동생 메리(스칼렛 요한슨)를 마음에 들어하여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마침내 메리는 왕의 정부가 되어 궁으로 가게 되고, 이에 질투심과 분노에 빠진 앤은 왕을 빼앗을 기회만 노린다.


마침내 왕은 앤에게 빠지게 되고, 그녀는 그가 이혼하고 정식으로 자신을 왕비로 만들어줄 때까지 그와의 잠자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고 애간장을 태운다. 천신만고 끝에, 메리도 버리고 왕비 캐서린과도 이혼한 헨리 8세는 그녀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그러나 앤에 대한 왕의 열정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식어가고, 사랑은 궁정의 다른 시녀들에게로 옮겨간다. 결국 남동생인 조지 불린과의 근친상간의 죄를 덮어쓰고, 망나니의 칼에 의해 목이 잘리는 처참한 최후를 맞는다.

역사가들은 다르게 말한다

하지만 많은 역사가들은 앤 불린에 대해 다르게 말한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작가인 알렉스 폰 툰젤만에 의하면, 이 영화의 내용이 역사적 사실과 많이 다르다고 한다. 즉, 앤 불린의 여동생 메리 불린은 원래 헨리 8세의 역사적 라이벌이었던 프랑스의 왕 프랑소아 1세와 내연관계에 있었고, 그의 왕비에 의해 영국으로 쫓겨난 후 다시 헨리 8세를 연인으로 낚아챘다고 한다.


프랑수아 1세는 "메리가 타고 놀기 재미있는 여자"라고 말하면서 짓궂게 '나의 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따라서 영화에서 메리를 수줍고 순진한 여성으로 묘사한 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또한, 앤을 교활하게 왕을 조정하는 여성으로, 헨리 8세를 단순히 잘 속아 넘어가는 섹스 중독자로 묘사한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

오마이뉴스

앤 불린과 메리 불린 자매의 초상화 ⓒ wikipedia

이 영화에서처럼, 앤 불린은 5백여 년 동안 사람들에게 왕을 유혹하여 이혼까지 시킨 '요부'의 이미지로 각인되어 왔다. 그리고 많은 소설, 영화, 연극에서도 이러한 캐릭터로 묘사되어 왔다. 나탈리 포트만 역시 앤 불린을 야심적인 팜 파탈(femme fatale) 유형의 여성으로 연기했다.


그런데 역사학자 헤일리 놀란은 그녀의 책 <앤 불린 : 500년의 거짓말>을 통해 앤 불린의 인도주의적, 종교적, 정치적 행보를 추적하면서, 이제까지 사람들로 하여금 그녀의 삶을 잘못 판단하게 한 역사 자료들을 비판한다. 그 자료들은 앤 불린을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헨리 8세를 유혹한 팜 파탈로, 왕에 대해서는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는 희생을 감수한 남자로 그림을 그렸다.


놀랍게도, 이것들은 모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책에 따르면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만나기 전부터 캐서린 왕비와 이혼하기 위해 은밀하게 그 방법을 모색하고 있었고, 앤 불린은 왕의 구애를 피하기 위해 1526년 여름부터 한 해 동안 궁정을 떠나 도망가 있었다.


헨리 8세는 앤 볼린에게 거의 3년간이나 연애편지를 썼는데, 이 편지들은 그녀를 유혹하기 위한 일종의 성적 괴롭힘, 혹은 성희롱이었다. 그중 한 편지에는 "여자가 노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예스를 의미한다"라는 식으로, 제멋대로 여자의 마음을 해석한 구절도 있다. 여성에 대한 16세기 남자들의 사고방식이 21세기 현대 사회에서도 그다지 크게 변화한 것 같지는 않다.


앤 불린의 전기 작가 에릭 아이브스와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은 불린의 권력으로부터의 추락, 그리고 처형은 토마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 의해 정치적으로 기획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앤 불린은 교회 수입의 사용처와 외교 정책에 있어 크롬웰과 대립했고, 크롬웰은 그녀가 자신에게 정치적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여 간음, 근친상간 및 반역죄를 뒤집어 씌웠다는 것이다. 사실, 앤 불린은 깊은 종교적 믿음이 있었고, 궁정 생활은 외간 남자와 밀회를 즐길 만큼의 사생활이 보호되지 않았으므로, 그녀의 불륜은 사실상 조작 가능성이 높다.


이렇게 볼 때, 앤 불린은 팜 파탈 형의 유혹자가 아니었고 오히려 의회를 통해 급진적인 빈곤 퇴치법을 추진한 열정적인 정치가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5명의 남자와 성관계를 맺고 심지어 남동생과 근친상간을 한 패륜여성, 그리고 왕을 시해하려 한 독부로 기소되었다. 이 모든 죄에 대한 증거들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았지만, 이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모두 가차 없이 사형당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볼린이 처형당한 다음날, 정부 제인 시모어와 약혼을 했다.

악녀는 없다, 악녀를 원하는 남자들만 존재할 뿐

그렇다면, 왜 이렇게 앤 불린에 대한 악의적인 이미지가 굳어진 것일까? 당시 스페인 대사였던 유스티스 차퍼이즈(Eustace Chapuys)의 기록이 앤 볼린에 대한 현대의 이미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그는 전 왕비 캐서린 왕비의 모국인 스페인의 외교관으로서 당연히 캐서린의 편이었고, 불린에 대해서는 적대적이었던 것이다. 또한, 1500년대에 기록을 하고 보관한 사람들, 그리고 수 세기 동안 그 기록을 해석해온 사람들도 모두 남자들이었던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이다. 그들은 여성이란 오직 속임수와 성적 매력만으로 권력을 얻는다는 편견을 가졌고, 앤 불린의 지적 능력과 도덕적 품성은 간과했던 것이다.


우리 문화는 데릴라, 살로메, 유디트 등 성서의 여인들에서부터 메데아, 헬렌, 세이렌 등 그리스 신화의 여인들, 양귀비, 서시, 달기, 장희빈, 어우동, 클레오파트라, 루크레치아, 마타하리 같은 실제 역사의 인물 등, 수많은 팜 파탈의 자산을 갖고 있다. 일본의 여성 소설가 시오노 나나미는 "원래 팜 파탈인 여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팜 파탈을 원하는 남자가 팜 파탈을 만든다"고 말한다. 악녀는 원래 없고, 악녀를 원하는 남자들만 존재할 뿐이라니!


인간은 안락한 일상을 희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위험과 모험, 일탈에 대한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존재이기도 하다. 세이렌의 부드럽고 감미로운 노랫소리를 듣고 스스로 깊은 바닷속으로 뛰어드는 뱃사람들처럼, 자신에게 지워진 무거운 사회적 역할과 이성에 짓눌린 남자들이 누군가 해방감과 일탈의 자유를 누리도록 유혹해 주기를 바란다는 것인가. 그것이 비록 파멸의 길일지라도?


사실, 팜 파탈의 개념은 19세기 산업혁명에 환멸을 느끼고 환상과 꿈의 세계로 도피하려고 한 낭만주의자들의 판타지가 만들어낸 것이다. "치명적 매력을 소유하여 남성을 파멸로 이끄는 요부", 이것이 소위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팜 파탈의 사전적 정의이다. 그러나 팜 파탈은 실체가 없는, 그리고 그저 사람들의 환상을 자극하는, 여성에 대한 왜곡된 시선이 만들어낸 용어일 뿐이다.


남자나 여자나, 남을 속이고 이용하며 파멸시키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며, 남자를 파멸시키는 마성을 가진 특별한 여자란 판타지에 불과하다. 어쩌면, 우리는 팜 파탈 신화를 통해,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벗어나 우리 내면의 위험과 금기에 대한 욕망을 충족시키고 싶은지도 모른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이 단어 '팜 파탈'이 주는 매혹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 존재를 철썩 같이 믿고 싶어 하는 이유가 아닐까.


그렇다면, 멀쩡한 앤 불린도 역사에서 심하게 왜곡된 가짜 팜 파탈이란 말인가. 어쩌면, 우리는 역사 속의 한 죄 없는 여성을 이용하여, 팜 파탈이라는 가슴 설레는 짜릿한 환상을 즐기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1. Suyin Haynes, "Why Anne Boleyn Doesn't Deserve Her Bad Reputation, Time, Dec 2, 2019
  2. Anne Boleyn, Wikipedia

김선지 기자(sjkim138@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