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팬 가슴에 영원히 남을 '맘바 인', 코비 브라이언트

[이슈]by 오마이뉴스

헬기사고로 우리 곁을 떠난 농구스타 코비... 전세계는 왜 그를 추모하는가


27일, 갑작스러운 헬기 사고로 딸과 함께 세상을 떠난 농구스타 코비 브라이언트를 향한 추모 물결이 전세계로 이어지고 있다. 향년 41세, 고인이 평생 몸담았던 NBA(미프로농구) 농구계와 팬들은 물론이고 타 종목이나 정치-연예계에 이르기까지 SNS를 통하여 고인의 업적이나 추억을 기리고 애도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KBL(한국프로농구) 경기중 첫 시작 24초와 8초간 플레이를 전개하지 않으며 고인을 추모하기도 했다. 24와 8은 고인이 현역 시절 달았던 등번호를 의미한다.


코비 브라이언트는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전체 13순위로 호명되며 NBA 무대를 처음 밟은 이래 오직 LA 레이커스에서만 20시즌을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한 농구계의 전설이었다. 서구권에서는 조던(마이클 조던)이나 커리(스테판 커리)처럼 보통 풀네임보다는 라스트 네임으로만 불리는데 비하여 코비는 독특한 이름 때문에 방송중계나 공식석상에서도 퍼스트 네임으로 더 자주 불릴만큼 농구를 잘 모르는 사람도 알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 됐다.


농구선수로서 코비가 남긴 업적은 화려하다. NBA 챔피언에 5번(2000-02, 2009-10)이나 올랐고, 1번의 정규리그 최우수선수(MVP, 2008), 2번의 파이널 MVP(2009,2010), 올스타는 무려 18번이나 선정됐다. 통산 득점 3만3643점은 카림 압둘자바, 칼 말론, 르브론 제임스에 이어 NBA 역대 4위에 해당한다. 2006년에는 토론토와의 경기에서 한 경기 81득점(역대 2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미국 농구대표팀의 일원으로 올림픽에도 2번(2008, 2012) 출전해 모두 금메달을 획득했다. 자신의 현역 마지막 경기였던 유타 재즈와의 홈경기에서 무려 60득점을 넣은 일화도 유명하다.


코비의 시대는 NBA가 '농구황제' 마이클 조던의 은퇴 이후 새로운 농구 아이콘을 필요로 하던 시절이었다. 조던의 실력과 인기는 NBA가 미국을 넘어 세계적인 스포츠 콘텐츠로 부상하는데 결정적인 위상을 담당했고, 자연스럽게 조던 이후 등장한 슈퍼스타들, 특히 그와 포지션이나 플레이스타일이 비슷한 스윙맨(슈팅가드-스몰포워드) 들은 하나같이 '넥스트 조던'으로 불리우며 조던과 비교되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코비와 함께 90년대 중반 이후 NBA에 등장한 앨런 아이버슨, 빈스 카터, 트레이시 맥그레디, 제리 스택하우스, 레이 앨런 등은 리그의 '슈팅 가드 전성시대'를 이끌며 조던 이후 NBA의 인기를 주도한 주역들이다.


코비는 이처럼 수많은 '넥스트 조던' 후보 중에서도 가장 성공한 슈퍼스타이자 최후의 생존자로 꼽혔다. 조던의 현역 말년에 프로에 데뷔한 코비는 풋내기 시절부터 외모, 포지션, 플레이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조던과 가장 닮은 선수로도 자주 거론됐다. 이 때문에 한동안 조던을 따라한다거나 아류에 불과하다는 혹평도 자주 받았다. 하지만 어쩌면 조던을 능가하는 농구에 대한 열정과 집요한 승부욕을 바탕으로 코비는 조던의 그림자에 갇히지 않고, 자신만의 커리어를 개척했다. 르브론 제임스나 케빈 듀란트같은 후배 세대에게도 깊은 영감을 주며 '코비가 곧 우리 세대의 조던'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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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월 11일 NCAA 대학농구 경기 후반전에 짐 왓슨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코비 브라이언트 전 LA레이커스 선수. ⓒ AP-연합뉴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LA 레이커스에서 '애증의 콤비' 샤킬 오닐과 형성한 원투펀치는 NBA 역사상 최고의 조합 중 하나로 꼽힌다. 레이커스는 오닐-코비 듀오를 앞세워 조던의 시카고 불스 이후 다시 한번 쓰리핏(3연패)에 성공한 팀에 이름을 올리며 NBA를 지배했다. NBA 역사상 가장 압도적인 센터였던 '빅맨' 오닐-조던의 향수를 느끼게하는 '스윙맨' 코비의 조합은 실력, 인기, 팀밸런스 등 모든 면을 통틀어도 농구에서 가장 이상적인 원투펀치로 꼽힌다.


코비는 오닐이 트레이드로 팀을 떠난 이후 2004년 이후부터는 에이스로 본격적인 홀로서기에 나섰고 몇 년간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고전하는 암흑기를 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2008년 트레이드를 통하여 또다른 특급 빅맨 파우 가솔이 합류하며 다시 우승권으로 올라섰고, 2009년과 2010년 연속 우승을 차지하며 마침내 오닐의 그림자를 벗어날 수 있었다.


누구보다 화려한 선수시절을 보낸 코비에게도 그림자는 존재했다. 자존심과 개성이 강한 농구 슈퍼스타들이 흔히 그렇듯, 코비에게도 커리어 내내 '이기적인 선수'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고 이는 코비의 커리어에 명과 암을 동시에 남겼다. 역사상 최고의 원투펀치라던 오닐과의 조합이 해체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1인자'가 되고싶었던 코비의 욕심이 큰 원인이었다. 오닐은 득점 욕심에 패스를 잘하지 않는 코비에게 자주 불만을 토로했고, 반면 코비는 농구 외에도 엔터테이너 기질이 강했던 오닐의 프로의식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이후로도 두 선수는 한동안 불편한 관계를 이어갔다.


사실 코비는 역대 NBA 전설 중에서도 손에 꼽힐만큼 동료복이 많았던 선수로 꼽힌다. 오닐- 가솔 외에도 칼 말론, 스티브 내쉬, 드와이트 하워드, 게리 페이튼 등 전설적인 선수들과 여러 차례 '슈퍼팀'을 결성했다. 코비와 가장 많이 비교되는 조던은 스카티 피펜과 데니스 로드맨 정도 외에는 '명예의 전당'급 선수들과 함께 뛰지 못했다. 코비와는 현역 기간과 우승 횟수가 겹치는 팀 던컨이 비록 연속 우승은 없지만 시대별로(90-2000-2010년대) 다른 동료들과 호흡을 맞추면서도 큰 불화나 기복없이 꾸준히 안정적으로 장기집권했던 것과도 대조된다. 코비는 명성에 비하여 정규리그 MVP는 고작 1회에 그쳤고, 챔프전 우승 5회도 본인이 진정한 팀의 에이스로 우승을 이끌었다고 할만한 경우는 많아야 2회 정도에 불과하다.


뛰어난 기량과 스타성에 비하여 한 팀을 아우르는 리더십이나 포용력도 부족했다는 평가다. 너무나도 유명한 오닐과의 불화 이외에도 많은 팀원들이 코비의 지나친 슛난사와 자기중심적인 플레이를 힘들어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특히 부상과 노쇠화에 시달린 말년은 아예 레이커스의 리빌딩을 방해하는 장애물로 전락했다. 치명적인 아킬레스건 부상과 장기간의 공백기를 딛고 코트에 복귀했지만 스타 선수들을 뿔뿔이 흩어지며 다시 코비의 원맨팀으로 전락했다. 코비는 어느덧 노장이 되었지만 던컨처럼 후배들의 성장을 돕는 멘토나 조연으로 물러나기보다는, 고액 연봉자임에도 여전히 개인 득점 기록에만 집착하는 이기적인 선수로 전락했고, 이는 말년에 그에 대한 평가를 깎아먹는 원인이 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구팬들은 코비를 사랑했다. 아마도 그가 평생에 걸쳐 보여준 농구에 대한 진정성과 순수함 때문일 것이다. 조던이 농구 외에도 야구, 골프, 도박 등 다방면에 관심을 보였던 것과 달리, 코비는 본인이 선수임에도 알아주는 농구광으로 유명했고, 농구에 대한 깊은 애정과 철저한 완벽주의 기질은 마지막 은퇴 순간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천하의 조던조차도 '코비는 내가 하는 모든 플레이를 그대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선수'라고 극찬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농구 레전드들이 코비의 승부욕과 열정을 인정했다. 무엇보다 야생마같던 어린 소년이 레이커스라는 팀에서만 20년 동안 훌륭하게 성장한 인생 스토리는, 미국인들이 가장 선호하는 영웅담의 전형적인 주인공에 부합했다.


또한 코트 위에서의 이기적인 이미지와는 달리 코비는 팬과 가족 앞에서는 한없이 따뜻하고 자상한 남자로 유명했다. 자의식이 강하다못해 거만한 선수들도 많은 NBA에서 코비의 팬서비스에 대한 미담은 유독 넘쳐난다. 2004년 성폭행 파문으로 한동안 이미지가 추락하며 곤욕을 치른 일도 있었지만 무혐의 처분을 받은 이후에는 더 이상 사생활에서 특별한 구설수 없이 화목한 가정사를 이어갔다.


한때 티격태격하던 오닐과도 현역 말년부터 화해한 뒤 우정을 회복했고, 과거에 SNS에서 자신을 비난했던 어린 선수를 쿨하게 용서하거나, 공교롭게도 사망 하루전 자신의 통산 득점기록을 넘어선 르브론 제임스를 따뜻하게 축하해주는 등 대인배 기질을 보이기도 했다. 한국에도 3번이나 방문했는데 당시 코비의 친절한 팬서비스와 최선을 다하는 프로의식에 깊은 감명을 받은 팬들이 많았다.


2016년 은퇴 이후 4년, 코비는 올해 농구선수로서 마지막 최고의 영예라고 할수 있는 '명예의 전당'에 들어갈 자격을 얻었고 당연히 입성이 확실시되고 있었다. 그러나 비극적인 사고로 인하여 농구팬들은 코비가 명예의 전당에 서는 모습을 영영 볼 수 없게 되었다. 마지막 순간도 사랑하는 딸의 농구경기를 함께하기 위하여 이동하는 길이었다. 평생 농구를 사랑했고 농구를 떠나서 살수 없었던 남자였기에 그와의 이른 작별이 더욱 안타까울 수밖에 없다.


'맘바 아웃'(Mamba Out), 2016년 은퇴 경기를 마치고 코비가 코트를 떠나면서 남긴 마지막 작별인사였다. '블랙 맘바'는 현역 시절 코비가 가장 애착을 가지고 있던 별명이었다. 슬프게도 이제 팬들은 코비를 코트에서만이 아니라 다시는 볼 수 없게 되었다. 코비는 조금 일찍 우리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되었지만, 그가 농구를 통하여 전해준 수많은 명장면들, 그리그 그 속에 담긴 열정과 투혼은 영원히 팬들의 가슴속에 '맘바 인(In)'으로 남을 것이다.


이준목 기자(seaoflee@naver.com)

2020.01.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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