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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그리고 불꽃놀이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byKT&G 상상마당 웹진

영화감독 장건재는 일본에서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여행 영화를 만들었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한여름의 판타지아>는 이상한 여행 영화다. 여기에는 객지에서 우연히 맞닥뜨리게 되는 사건이나 낯선 곳에 서 있을 때 스며드는 감동이 없다. 영화를 반으로 나누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찍었지만 어느 곳에서도 그런 기미를 마주하기 어렵다. 다른 나라, 낯선 지역의 풍경에 좀처럼 시선을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고조시 자체에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영화감독 장건재는 대신 사람의 말을 따라간다. 인터뷰가 빈번하게 등장해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보이는 1부와 함께, 2부 또한 이와세 료가 연기한 유스케가 프레임 바깥에서 목소리로 먼저 등장해 이야기를 밀고 나간다는 건 꽤 의미심장하다. 많은 신을 롱테이크로 담아 영화 내내 이어지는 말들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물론 그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대단한 사연이나 지혜가 담긴 건 아니다. 그들은 그저 자신의 가게, 마을, 첫사랑, 그리고 자신이 믿는 가치에 대해 터놓고 말한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스튜디오 ‘빛나는’이 디자인 한 <한여름의 판타지아> 포스터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장건재는 전작 <회오리 바람>(2009), <잠 못 드는 밤>(2012)에서 젊은 남녀의 관계를 그려왔다. 여행 차 고조시를 찾은 혜정과 그 지역에서 감을 재배하는 유스케의 이틀을 따라다니는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도 이어지는 바다. 일본의 시네아스트 가와세 나오미가 이끄는 나라국제영화제에 <잠 못 드는 밤>이 출품된 인연으로 영화 제작 프로젝트 'NARAtive'의 지원을 받았고, 그녀가 직접 프로듀서를 맡았다. 당시 해외 합작 시스템에 관심을 가졌고, 평소 가와세 나오미의 작품을 좋아했던 장건재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적극적인 지원과 조언은 해외에서의 첫 작업을 한결 편하게 이끌었다. 다만 그녀의 조력이 매번 긍정적으로 작용했던 건 아니었다. 자신의 모든 영화를 고향 나라현에서 찍어온 감독과 그 스태프들과 함께 작업한 영화는 “풍경을 카메라에 담을 때마다 가와세 나오미 특유의 숏”처럼 보였기 때문에 “어떡하면 ‘남의 세트’에서 나의 영화를 찍을 수 있을지” 고민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본래 제작비 2억을 모두 나라국제영화제 측에서 지원 받을 수 있었지만, 장건재는 그 절반을 마련해 공동 프로듀서로 자기 이름을 올리는 조건을 고집했다. 자신의 영화를 만들어내겠다는 의지가 그만큼 굳건했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애로사항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래 구상했던 2부의 배경이 추운 계절이라 가을 촬영을 염두에 두고 있던 장건재는 갑작스럽게 여름으로 촬영을 앞당길 수밖에 없었다. 일본인 스탭과 작업하고 나라현 고조시의 유일한 연례 축제인 8월의 불꽃놀이를 포함해야 하는 'NARAtive' 프로젝트의 조건 때문이었다. 그렇게 1부의 시나리오만 완성한 채 무작정 일본으로 향했다. 장건재는 1부의 촬영을 마친 후 3일간의 휴식 중에 2부의 시나리오를 썼다. 1부의 영화감독이 고조시의 사람들을 만나며 얻은 인상이 곳곳에 배어 있는 또 하나의 영화라는 얼개 정도가 그려졌다. 촬영을 마친 줄 알았던 배우들도 분주해졌다. 김새벽은 당시 김경묵 감독의 <이것은 우리의 끝이다>(2013)를 앞두고 1부만 촬영하기 위해 일본에 왔지만 일정을 미루고 혜정을 준비했다. 1부 미정 역의 의상만 준비했기 때문에 급하게 통역사의 옷을 빌려 입었다. 이와세 료 역시 예정에 없던 또 다른 요스케를 준비하기 위해 감을 재배하는 사내라는 설정만 듣고 사흘 동안 땡볕에 몸을 태우고 수염을 길렀다. 시나리오의 희미한 얼개만 쥐고 감행한 촬영 역시 현장의 즉흥적인 에너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영화에서 보듯이 꽤 성공적이다. 오히려 즉흥에 기댔기 때문에 2부의 분방한 공기를 더 자연스럽게 담을 수 있었다. 형식이 꽤 뚜렷하게 정해져 있었던 1부 ‘첫사랑 유키코’에 비해 두 남녀의 대화와 여정이 이끄는 2부 ‘벚꽃우물’은 배우의 역할이 중요했을 터, 장건재 감독은 ‘벚꽃우물’의 공을 마땅히 김새벽과 이와세 료의 호연에 돌린다.

영화 '한여름의 판타지아'
각 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불꽃놀이 신을 (이에 잠에서 깨는 관객이 꼭 있기 때문에) 많은 관객들이 기억할 것이다. 고조에 사는 어른들의 고백과 생애 처음 만난 남녀의 대화가 끝나고 잠깐 드러난 정적을 가르듯 폭죽 소리가 펑 터진다. 장건재는 엄연히 조건에 의한 설정이기에 달갑지 않았다. 다만 설득력 있게 사용하기 위해 고민을 거듭해 현재의 장면을 만들었다. 번거로운 제약 덕분에, 하늘에서 불꽃이 터지는 절대적으로 황홀한 이미지를 보여주고, 1부와 2부 사이 흑백에서 컬러로의, 죽음에서 청춘으로의 이행을 구현해낼 수 있었다.

<한여름의 판타지아> 예고편

글. 문동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