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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스타를 꿈꾸던 청년 앤디 워홀, 예술의 경계 허물고 '셀럽'이 되다

by서울경제

팝아티스트 앤디 워홀


1960년대 풍요로운 소비문화 시대

TV·영화속 인물 동경하던 젊은 워홀

유명해지려 디자이너서 화가의 길로

실크스크린 활용 코카콜라 등 선보이고

스타의 환상에 젖어 먼로 초상화 제작

마침내 '팝 아트 거장'으로 자리매김

소원처럼 신비스러운 삶을 살다 떠나

서울경제

앤디 워홀의 1962년작 ‘마릴린 먼로 두폭화’

20세기 후반을 10년 단위로 생각해 볼 때 1960년대는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정치·사회·문화 그리고 사고의 가치관에서 하나의 전환기였다고 말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특히 많은 변화가 요구되던 떠들썩한 소요의 시기였다. 2차 세계대전 후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 미국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시절에 유례없는 안정과 평화를 누리게 되지만 곧이어 이제까지 침묵을 지키던 사회 문제들이 터져 나왔다. 인권문제가 제기되면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고,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암살됐으며, 월남전 반대 시위로 시끄러웠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60년대의 또 하나의 특징은 풍요로운 소비문화의 부각과 전후 베이비 붐에 의한 젊은 세대의 등장이었다.


디트로이트 공장에서 대량 생산된 자동차는 미국인의 생활을 크게 바꿨다. 대부분의 지역이 고속도로로 연결되자 많은 사람들이 복잡한 도시를 떠나 안락하고 넓은 교외의 주택으로 이사했고 곳곳에 들어선 큰 슈퍼마켓을 찾았다. 교외에 설립된 드라이브 인(Drive In) 영화관은 차를 가진 사람들이 몰려와 성시를 이뤘다. 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광고가 넘쳐났고, 국방비나 교육비보다 더 많은 돈이 광고비로 지출되기 시작했다. 미국인들은 텔레비전에서 광고하는 식품을 먹고 TV 드라마를 보았다. 이제 대중매체는 사람들의 생활습성에 영향을 미치고 심지어 획일화하는 경향까지 낳았다.


젊은 세대들은 자신들의 부모가 물질적인 풍요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빈부의 차나 정신적인 소외 등 부정적인 측면을 지적하면서 기존의 제도와 권위, 표현 방법, 생활방식에 반발했고 이것은 60년대 후반에 이르러 돌이킬 수 없는 흐름으로 나타났다. 젊은이들은 반항아 이미지의 제임스 딘과 가죽 점퍼를 입고 오토바이를 탄 말론 브란도를 숭배하고 엘비스 프레슬리에 열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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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체코슬로바키아의 이민 2세인 앤디 워홀(1928~1987)도 당시 이렇듯 변화하는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던 젊은 청년들 중 하나였다. 1949년에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현 카네기 멜론 대학)을 졸업한 그는 ‘글래머’나 ‘뉴요커’와 같은 잡지의 일러스트를 그리고 구두나 모자를 디자인하는 꽤 잘 나가는 디자이너이었다. 그러나 워홀은 TV나 영화에 나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화려한 스타를 동경하며 자신의 초라하고 평범한 배경에서 벗어나려 했다. 외모에 대한 열등감도 커서 30세에는 코를 성형수술하기도 했다. 그는 신비스러운 여배우 그레타 가르보와 비슷한 자세로 사진을 찍기도 하고, ‘티파니에서 아침을’ 등을 써 20대에 유명 작가가 된 트루먼 커포티에게 수년 동안 매일같이 팬레터를 보냈다.


1960년에 워홀은 화가로 전향했다. 방향을 바꾼 이유가 미술가 로버트 라우센버그가 크게 주목을 받는 것을 보고 ‘나도 화가가 되어 유명해져야겠다’고 생각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의 초기의 주제들은 코카콜라·캠벨 수프 깡통·달러 지폐 등이며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제작됐다. 판화의 일종인 실크스크린은 대담한 색 대조가 필요한 포스터류에 많이 사용되는 기법이었다. 하나의 실크스크린 원판은 수백 점의 동일한 이미지를 제작할 수 있지만 색상을 바꾸고 안료, 잉크의 양, 이미지의 배치, 밀대의 압력을 달리하면 이미지가 조금씩 달라져 완전히 똑같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동일하게 복제되는 상업 인쇄물과는 달랐다. 워홀은 제작 과정에서 잘못된 부분도 그대로 두었다.


그는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쉽게, 빨리, 대량으로 제작하면서도 동일하지 않은 작품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워홀이 원하던 바였다. 워홀의 작업실이 ‘공장(factory)’이라고 불린 것은 사실 그의 작업 방식이 공장의 조립 라인과 흡사했기 때문이다. 이제 예술작품은 독창적이고 화필의 특징이나 작가의 개성이 보여야 한다는 전제가 무너져버렸다. 워홀의 작품에서 코카콜라나 켐벨 수프 깡통들은 마치 슈퍼마켓에 나란히 규칙적으로 진열된 것처럼 구성됐다. 과거 그림에서 중요했던, 인물이나 주 대상이 가운데에 있고 덜 중요한 요소가 주변에 배치되는 구성은 없어져 버렸다. 슈퍼마켓에서 사오는 이 평범한 물건들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고급지식은 필요 없었다. 그의 작품은 단숨에 관심을 끌었다. 물론 여전히 미국의 지식인들은 유럽에서 유지해온 고급문화를 사수하려는 경향이 강했고, 앤디 워홀의 미술은 예술이 지녀야 할 진지함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앤디 워홀 이후 광고와 만화, 신문 사진 등 대중매체에서 나온 이미지를 이용하는 팝 아트(popular art의 줄인 말·대중적인 미술)는 이해하기가 쉬웠고, 곧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운동으로 발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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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1962년작 ‘캠벨 수프’

스타에 대한 환상을 갖는 워홀은 그 후에도 배우, 가수, 유명인들의 초상을 여러 점 제작한다. 영화배우 마릴린 먼로의 초상은 1962년 먼로가 사망한 후에 착수한 작품이었다. 그는 영화 ‘나이아가라’의 홍보용 사진을 얻어, 원하는 부분을 잘라 윤곽을 베끼고 캔버스에 옮겨 전체 구도를 잡았다. 그리고 특수 물감으로 캔버스를 칠한 후, 실크 스크린으로 머리·눈·입술 등을 과장되게 채색하고 원래 사진을 확대해 그 위에 전사했다. 여기서 마릴린 먼로의 이미지는 초상이라기보다 화장한 마스크(가면)이면서 상품화된 배우의 모습이다. 원본, 즉 마릴린 먼로의 실제 모습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금발 머리와 미소, 육감적인 몸매, 이러한 요소들은 광고에서 원하는 것들이었다. 먼로는 당대 대중문화의 아이콘이었지만 대중이 좋아하는 일종의 소비 상품이기도 했다. 워홀은 색채와 수를 달리 하며 마릴린 먼로의 작품을 기계적으로 거의 수십 점 제작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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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 ‘인종 폭동(race riot)’

또한 그는 일찍이 매스컴의 위력을 파악해 여러 점의 ‘재난’ 연작을 제작했다. 1960년대에는 사회적 혼란으로 시위나 폭력 진압, 자동차 사고나 비행기 추락사고 등이 사진과 함께 신문의 헤드라인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건이 보도되면 사람들은 충격을 받지만 머지않아 그것을 잊어버린다. 워홀은 희생자들에게 어떤 감정도 보이지 않으면서 이러한 이미지들을 반복해서 제작했다.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계속 되풀이되는 참상을 찍은 사진에 익숙해지고 거의 무감각해진다.


1960년대 중반 그는 그토록 바라던 소위 ‘셀럽’이 됐다. 그의 스튜디오에는 온갖 사람들이 들끓었다. 그들은 같이 작품 제작도 했지만 파티도 하고 마약도 했다(워홀 자신은 마약에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에는 트루먼 커포티, 라이자 미넬리, 밥 딜런, 롤링스톤즈의 멤버 믹 재거 등도 드나들었다고 전한다. 머리를 흰색으로 염색하고 가죽 재킷을 입고 선글라스를 낀 워홀은 당시 유명 인사들이 다니던 뉴욕의 디스코텍 ‘스튜디오 54’의 단골이기도 했다. 그는 이후 영화도 제작하고 ‘인터뷰’라는 잡지도 만들었다. 1970년대에 워홀은 주로 유명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렸고 이것은 그의 중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초상화는 우선 인물들이 화장을 한 다음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찍고 워홀의 공장에서 다시 확대하는 방법으로 제작되었다.


1987년 60세의 일기로 워홀은 세상을 떠났다. 스스로 1930년생이라고 했지만 실제로 그는 1928년생이었으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는 것도 극비였다는 사실이 사후에 밝혀졌다. 스타를 꿈꾸면서 스타처럼 신비스럽게 남기를 원했던 워홀이 개인적인 부분의 노출을 꺼렸다는 것이다. 그가 벗겨 버린 것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혹은 통속문화의 경계이며, 독창적이고 유일하고 개성이 보여야 한다는 고고한 미술가의 아우라였다.


조상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