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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오래 보아야 예쁘다, 삶도 그렇다… 예산 고택 나들이

by세계일보

세월 떠안은 지붕… 낡고 닳은 서까래…

고즈넉한 세상 속 나를 돌아보는 시간

피었다 지는 인생… 욕심 없이 살라하네

 

구한말 열사 이남규의 수당 고택

4대에 걸쳐 순국한 가족사 애절

추사 생가… 삶의 발자취 오롯이

 

자연이 그린 수묵화 예당호에 푹∼

달콤한 사과와인 한잔에 여독 싹∼

세계일보

고택여행은 화려하지 않지만 툇마루에 앉으면 쉬지 않고 달려온 내 삶을 돌아보는 소중한 시간을 만나게 된다.

“인간의 삶은 영원하지 않아요. 아직 모르세요. 많은 주인을 만났죠. 그들이 태어나고 자라고 늙어가는 일생을 다 지켜봐요. 그 어느 누구도 영원하지 않더군요. 그러니 욕심부리지 말아요. 봄꽃처럼 잠깐 화려하게 피었다 계절 속으로 사라지는 것이 인생이잖아요”.

몇백년이나 같은 자리를 지켰을까. 고색창연한 고택의 툇마루에 앉으니 낡고 닳은 서까래가 말을 걸어온다. 사람은 때가 되면 스러진다고. 생명 없는 물건도 오래되면 신비스런 존재, ‘영물’이 된다더니 그들보다 짧은 인간의 삶에 순간 숙연해진다. 그리고 떠오르는 물음표. 나는 무엇을 얻기 위해 이제껏 숨가쁘게 달려왔을까.

화려하지 않아도 돼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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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김정희 고택은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기둥마다 독특한 추사체가 새겨져 있다.

고택은 툇마루에 앉았던 많은 주인의 삶을 그려보게 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다른 이의 전생을 여행하는 기분이다. 사실 고택 여행은 ‘고리타분하다’는 단어가 먼저 떠오른다. 역동적인 레포츠도 없고 누군가에 자랑할 만큼 눈이 호강하는 아름다운 풍광도 찾기 어렵다. 오로지 사색과 성찰만이 있을 뿐. 그래서 찾는 이가 드물다. 하지만 덕분에 나만의 호젓한 공간을 누릴 수 있으니 쉬지 않고 달려온 내 삶을 반추하는 소중한 시간을 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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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에는 700년의 세월을 간직한 목조건물 수덕사 대웅전, 백제부흥운동의 근거지 임존성, 흥선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南延君) 묘, 윤봉길 의사 기념관인 충의사 등 백제 역사와 충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특히 추사체로 널리 알려진 조선 후기 실학의 대가이자 서예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의 고택이 있다는 점이 발길을 이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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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열사인 수당(修堂) 이남규(1855∼1907) 선생 고택을 먼저 찾았다. 바로 인근에 이광임 고택이 있어 한꺼번에 들러보기 좋다. 고려말 대학자인 한산이씨 목은(牧隱) 이색의 10대손 이산해의 손자 이구의 부인이 1637년(인조 15년)에 지었다고 하니 380년이 넘은 고택이다. 애절한 가족사가 가슴을 울린다. ‘궁내부 특진관’으로 일하던 수당은 1905년 을사조약 후 고종에게 외세를 척결할 것을 청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장남 이충구와 함께 홍주 항일의병에 선봉장으로 참여한다.

수백년 이야기 구구절절 느릿느릿 과거로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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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 고택 전경.

결국 일본 경찰에게 연행됐는데 끌려가는 도중 회유를 끝내 거부, 아들과 함께 순국했다. 그가 죽기 전 남긴 말이 ‘사가살 불가욕(士可殺 不可辱)’. 선비는 죽일 수 있으되 욕보일 수는 없다며 죽음을 택했으니 대단한 기개다.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펼친 손자 평주 이승복, 한국전쟁 때 소대장으로 배수진을 치고 싸우다 전사한 증손자 이장원까지 4대가 나라를 위해 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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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이남규 고택앞 오륜목.

대술면 상황리 수당 고택에 들어서면 포근하고 고즈넉하다. ‘오륜목’이란 이름표를 단 아름다운 고목이 고택과 어우러지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든다. 내 삶의 작은 쉼표를 찍는 시간. 사랑채 툇마루에 앉아 푸른 나무와 하늘을 올려다보니 도심을 떠나 작은 정원이 딸린 한옥 한칸 마련해 볼까 하고 꿈도 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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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고택에서 차로 2∼3분을 가면 도로가에 아담한 고택이 서 있다. 이색의 16대손 이광임이 1820년(순조 20년)에 건립해 200년 가까이 됐다. 사랑채는 7계단을 오를 정도로 경사 심한 곳에 세웠는데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여러 단으로 기단을 쌓는 방식으로 지어 중류 양반의 생활과 건축양식이 잘 드러난다. 신암면에 있는 추사 고택은 그가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낸 곳. 증조부 김한신이 영조의 딸 화순옹주와 결혼해 월성위에 봉해지면서 53칸 규모의 저택을 하사받았는데 1976년 일부만 복원됐다. 사랑채에 들어서면 기둥마다 온통 추사의 글씨로 덮여 있어 금방이라도 방문을 열고 추사가 걸어나올 것만 같다. 출세가도를 달리는 추사의 외롭고 힘들었던 말년이 가슴에 와 닿는다. 54세에 억울한 누명을 쓰고 제주도와 함경도에 10년 가까이 유배되면서 오히려 학문, 서예, 그림이 더욱 깊은 경지에 오르게 된다. 추사, 월성위, 화순옹주의 묘와 추사가 수도하던 화암사도 있고 추사가 청나라에서 필통에 종자를 넣어와 직접 심은 높이 10m, 200년 수령의 백송도 만날 수 있다. 인근 추사기념관에서는 그의 작품 46점이 전시돼 있다.

호수, 산 그리고 광활한 여백이 만든 수묵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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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존성에서 내려다보는 예당호.

예산에 가면 꼭 들러 할 곳이 수자원 환경의 보고인 예당호다. 호수를 제대로 즐기려면 체력소모가 좀 필요하다. 봉수산을 둘러싼 험준한 임존성 성곽을 따라 높이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자연이 만든 수묵화를 볼 기회가 흔치 않으니 날이 좋다면 사서 고생해 보자. 임도를 따라 차로 올라갈 수 있지만 워낙 길이 좁고 낭떠러지를 끼고 있어 조심해야 한다. 백제 의자왕 20년인 660년 나·당연합군으로 백제가 멸망한 뒤 흑치상지가 임존성을 거점으로 3만명을 모아 나·당연합군을 몰아내기 위한 항전의 햇불을 올린 역사적인 장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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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존성 개망지 군락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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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지 밑에 주차하고 임존성을 따라 전망대가 있는 북동치까지 오르는 길에서는 뜻밖의 손님을 만난다. 오솔길을 허리 높이로 하얗게 물들인 개망초 군락지가 비밀의 화원에 온듯 신비롭다. 연인들은 손을 잡고 걸으면서 잊지 못할 또 하나의 추억을 남긴다. 북동치까지 20분정도 거리인데 막판에 아주 가파른 길을 오르면 드론이 촬영한 듯 예당호가 그림처럼 펼쳐진다.

사과의 본고장에서 맛보는 ‘한국 시드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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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사과와인의 오크통 양조시설.

산을 좀 오르고 나니 갈증이 심하다. 사이다 같은 시원한 청량음료가 생각나는데 예산에 왔으니 사이다의 원조인 시드르를 찾아가자. 은성농원이나 예산사과와인을 검색하면 된다. 사이다는 프랑스 노르망디에서 탄생한 시드르(Cidre)에서 유래됐다. 사과를 발효해 만든 술로 알코올 도수가 보통 1∼6%로 낮아 여름철 칠링해서 가볍게 즐기기 좋은 스파클링 와인이다. 이를 증류한 것이 유명한 칼바도스(Calvados)다. 시드르가 일본으로 건너가 사과와 알코올을 빼버린 엉뚱한 청량음료 사이다로 둔갑했다.


독일, 스페인, 영국, 벨기에 등 고품질 사과 재배지에서 시드르가 생산된다. 당연히 사과의 본고장 예산에도 시드르가 있다. 예산은 예로부터 새콤달콤하고 아삭아삭하며 사과 고유의 싱그러운 향이 짙게 배어 있는 황토사과가 유명하다. 추사의 고향이니 예산사과와인 이름도 추사. 사과는 가을을 대표하는 과일인데 풍성하고 넉넉한 ‘가을(秋) 이야기(史)’라는 뜻도 담았다니 재치있는 네이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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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황토사과특구로 지정된 농원에 들어서자 아직 새파란 사과들이 가을을 기다리며 영글고 있다. 3만9669㎡의 광활한 과수원에 6000여그루가 심어져 가을이면 들녘을 빨갛게 물들인다. 서정학 대표가 40여년 동안 공들여 가꾼 농원에서 사위인 정제민 부대표가 와인을 빚는데 캐나다에서 직접 배운 아이스와인 양조기술을 접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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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의 발효와 1년간의 숙성을 거쳐 탄생한 추사 애플와인은 그야말로 꿀맛. 차갑게 마시면 하루의 피로는 모두 달아난다. 셀러에 들어가니 보르도 와이너리를 방문한 듯, 수입 오크통에서 알코올 도수 40%도의 브랜디 ‘추사40’과 ‘소서노의 꿈’이 익어간다.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와 달리 신선한 사과의 풍미와 오크 숙성에 오는 은은한 바닐라향, 초콜릿향이 어우러지며 실크처럼 목을 타고 넘어간다. 고도주에 강한 술꾼이라면 꼭 도전해 보길. 3종류의 와인과 브랜디를 시음하고 사과따기, 사과파이·사과잼 만들기 등의 체험프로그램도 마련돼 가족 단위로 즐겨 찾는다.


예산=사진·글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