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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1만 시간의 법칙 #3

디스토피아 세계 속의
유쾌한 사람들 「원수문서」

by은서율

요즘은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엉뚱한 상상을 할 때가 있다. 만약 지구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멸망한 이후에 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그런 상황이라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어린 시절에는 곧잘 하곤 했던 상상인데 어느새 잊어버린 내 즐거운 상상 속의 세계. 오늘의 1시간은 그 즐거운 추억 속으로 데리고 가줄 책을 만나보자.

디스토피아 세계 속의 유쾌한 사람들

ⓒYURI NARUSHIMA /대원씨아이

발전을 거듭하던 인류는 갑자기 생겨난 메두사 병으로 인해 급격한 인구감소를 겪게 된다. 그 이후에도 여러 가지 환경변화 등으로 인해 인류는 그 동안 살아왔던 세계의 대부분을 잃고 좁은 지역에서만 살아가게 된다. 그들이 들어가지 못하는 예전의 대륙들은 암흑대륙, 혹은 신대륙이라고 불리며 새로운 생태계로 변한 상태. 언제까지나 이런 상태로 살아갈 수는 없다고 생각한 인류는 신대륙으로의 탐험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세계 최고의 천재라고 불리는 레이 진 세이버 헤이겐 박사와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 파견된 신대륙 조사대 경비반 반장인 시즈마가 있었다.


위험으로 가득한 상황 속에서 최대한 안전하게 조사대를 이끌려는 시즈마의 골칫거리는 다름 아닌 천재 과학자 레이 진 박사. 그는 원주민 아이들과 덥석덥석 어울리고, 선물이라고 알 수 없는 것을 주면 그대로 받아와서 그게 또 문제를 일으킨다. 기지에 갑작스레 나타난 거대한 대형 곤충 역시 레이 진 박사가 누군가에게 선물 받았던 알에서 깨어난 것.

디스토피아 세계 속의 유쾌한 사람들

ⓒYURI NARUSHIMA /대원씨아이

그래서 시즈마 반장은 천적이라고 부를 정도로 레이 진 박사를 경계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레이 진 박사는 태평하게 반장만 있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든 안심해도 되겠어 같은 말이나 지껄이고 있다. 한 대 때려주고 싶은 귀여움이다! 물론 반장의 입장에서는 신에게, 부처님께, 본사에 이런 인간을 데리고 어떻게 이 대륙을 무사히 건너라는 건지 묻고 싶다고 절규하고 있지만. 


이렇게 시작한 이 탐험은 처음의 이 분위기와는 달리 요상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바로 운명의 돌 때문이다. 원주민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는 레이 진 박사에게 동네 원주민 꼬마들이 알 수 없는 돌을 하나 가지고 온다. 이 돌은 두 사람이 같이 잡았을 때 깨지게 되면 두 사람이 커플이 되고 마는, 소위 운명의 돌이다. 원주민 아이들은 레이 진과 커플이 되고 싶어서 이 돌을 가져온 것인데 결국은 실패하고 돌을 그에게 선물로 주게 된다. 그리고 모든 독자들이 예상했던 것처럼 레이 진과 시즈마가 함께 이 돌을 잡았을 때 바로 그 돌이 깨지게 된다. 

 

이 사건 이후 시즈마는 레이 진이 어디에 있든 그 향기로 그를 추적할 수 있게 된다. 대신 곁에 있으면 평소의 뛰어난 신체능력이 약해지게 되고, 레이 진은 반대로 시즈마의 향기를 맡게 되면 비상한 신체 능력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 모든 것이 이 돌의 영향으로 생긴 일인 것이다. 이 돌의 비밀을 알게 된 레이 진은 시즈마를 위해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되고 결국 그에게 진지하게 프러포즈 하게 되지만, 시즈마는 프러포즈를 듣고서 오히려 버럭! 하게 되는데…. 


스토리가 여기까지 진행되고 나면 다들 아, 남남 커플 이야기로구나 하게 되는데, 안타깝게도 두 사람은 독자의 기대를 저버리고 개그 커플로 일관하게 된다 아쉽다, 아쉬워. 이 둘을 이어주기 위한 주변 여성 대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둔하고 둔한 남자들은 그저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이 능력을 발휘한다. 이런 두 사람을 둘러싸고 신대륙에서는 여러 가지 사건이 벌어지는 것이 「원수문서」의 주요 내용이다. 「원수문서」 는 ‘서스펜스? 추리물?’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첫 장을 넘기기 시작해 ‘깔깔깔’ 개그의 향연을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

캐릭터의 매력. 깨알같이 박혀 있는 발군의 개그 감각

「원수문서」의 가장 큰 매력은 독특함과 개성이 넘치는 캐릭터들이다. 조건이나 능력만을 보면 아주 완벽해 보이는 레이 진 박사는 일상생활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싶을 정도로 얼빠진 모습을 지닌 사람이며, 무뚝뚝하고 책임감만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은 시즈마는 레이진 박사에게만 유독 그 동안은 볼 수 없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게 된다. 이런 두 사람의 조화가 개그와 얼버무려지면서 최강의 재미를 선사하고 있다. 

 

레이 진의 곁에 있으면 저절로 힘이 빠지는 부작용을 극복하기 위해서 완벽하게 모든 것을 차단하는 공기 차단복을 입고 레이 진에게 한 방을 날리는 시즈마라든가, 독설을 날리는 원주민 꼬마 알비레오를 바라보면서, 시즈마는 배짱이 두둑하다며 감탄하고 레이진은 똑똑하다고 칭찬하는 장면이라든가 여하튼 전개가 평범하게 돌아가진 않는다.

디스토피아 세계 속의 유쾌한 사람들

ⓒYURI NARUSHIMA /대원씨아이

의외성을 지닌 스토리

이 만화는 여러 측면에서 의외성을 지닌 스토리 구조를 보이고 있다. 먼저, 디스토피아적인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만화임에도 불구하고 요소마다 박혀 있는 이런 개그 덕분에 이 세계는 오히려 밝고 명랑한 느낌을 주게 된다. 암흑의 신대륙을 낙천성과 성실성이라는 것을 무기로 이겨나가는 레이 진 박사와 시즈마 반장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그들의 여정 속에 미스터리적 요소를 끊임 없이 투입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레이 진의 감춰진 어린 시절, 그리고 신대륙과 관계가 있는 듯한 그의 아버지 하인츠의 비밀.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는 마신 젠의 비밀과 행동들이 차근차근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이 모든 것이 레이 진과 맞물리면서 이야기는 처음에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발전한다. 즉, 아이러니컬 하게도 개그 감각으로 애정지수가 올라간 캐릭터들을 개그가 아닌 상황 속으로 몰아넣음으로써 향후 스토리에 대한 집중도와 흡인력을 형성하게 된다.

미완의 슬픔

그러나… 불행히도 이 작품은 미완의 명작이다. 현재 시점까지는 말이다. 이 작품이 연재되던 잡지가 폐간하면서 스토리가 8권 이후로 진행되지 않고 있다. 통탄을 금할 수 없는 일이다. 2005년 8권이 나온 이후 10여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고, 같이 연재하던 다른 작품에 대한 후속권만 꾸준히 나오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9권을 만나는 건 아직도 좀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 언제가 되었든 꼭 레이 진과 시즈마의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 만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하다. 

 

여덟 권이라는 긴 호흡에도 불구하고 개그와 탄탄한 스토리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최고의 작품 「원수문서」. 부디 내 생애에 또 하나의 안타까운 미완의 명작으로 남지는 않아주기를. 이미 40년이 넘게 연재하고 있는 「유리가면」과 「왕가의 문장」, 그리고 1편부터 연대표가 등장하여 기함하게 했던 「파이브 스타 스토리즈」만으로도 내 인생의 미완은 충분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