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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소설속 배경을 찾아 거닐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사

by티티엘뉴스

2013년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소설가 알베르 까뮈가 탄생한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1913년 11월 알제리의 수도 알제의 허름한 동네인 몽도비의 벨쿠르트에서 태어나 1960년 1월에 파리로 향하던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그 중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 바로 이방인(L'etranger, 1942년)이다.

 

이방인에서 주인공 뫼르소는 살인을 왜 저질렀느냐는 질문에 "태양" 때문이라는 유명한 대답을 했다. 이방인의 주인공 문제적 인간 뫼르소는 어머니의 장례식에서도 눈물 흘리지 않고, 연애를 하긴 하지만 여자를 깊이 사랑해야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지중해 알제의 여름철 타는 듯한 태양빛에 홀려 살인을 저지르는 사내다. 이런 소설 배경 속의 뫼르소를 찾아 떠나는 알제리 여행은 기대를 가득하게 만든다. 까뮈의 글- 티파사의 결혼의 배경을 찾아 간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부이스마엘의 시장 - 지중해 연안에서 잡힌 생선들을 팔고 있다.

알제에서 티파사로 가는 길은 해안을 따라 지중해의 풍광을 즐기면서 간다. 생각보다는 도로사정이 좋지 못하다. 해안을 따라 난 길을 달려간다. 가는 중간에 ‘부이스마엘’이라는 작은 마을을 만난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지중해의 연안에 있는 곳답게 많은 과일들이 나온다.

부이스마엘은 '이스마엘의 집'이라는 뜻을 가진 작은 동네로 이곳에는 지중해 연안에서 잡힌 각종 크고작은 생선들과 지중해와 북아프리카를 달구는 뜨거운 태양 아래 무럭무럭 자란 각종 과일, 토마토, 감자 등이 마을의 한가운데 있는 시장에서 팔리고 있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알제리는 생활의 많은 면에서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프랑스풍의 바케트

시장의 구멍가게에는 길쭉한 프랑스빵인 바케트가 한무더기 쌓여 손님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곳에서는 동양인을 많이 접하지 못했는지 동양에서 온 사람들을 매우 신기해한다. 어디서 왔냐는 질문에 ‘월드컵, 꼬레’ 라고 대답하면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이들은 축구를 매우 좋아한다. 과거 프랑스의 유명한 축구선수인 지단도 알제리 출신이다. 축구는 언어와 인종을 떠나 여행자와 현지인과 친숙하게 만드는 하나의 매개체이다.

고대 로마도시의 흔적이 남은 티파사(Tipasa)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티파사의 해안은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한다.

알제리의 유적지 중 수도이자 아름다운 항구도시인 알제에서 가까운 티파사의 의미는 기항지라는 뜻인데 알제에서 서쪽으로 68km 떨어져 있는 지중해 연안의 오래된 도시이다. 거리 상으로는 멀지 않지만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가야 하기 때문에 차로는 약 1시간 반 이상을 달려야 도착할 수 있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유적의 돌과 그 옆에 피어있는 들꽃들

이곳은 기원전 7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건설된 역사 깊은 항구도시로 로마가 점령한 이후에는 바다와 연결된 항구를 중심으로 발전되었다. 이런 오래된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 티파사는 1982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지중해의 푸른 물결과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어오는 이 마을을 대하여 까뮈는 “태양과 대지가 결혼하는 곳”이라고 했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가이드가 티파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유적 입구에서 입장권을 끊은 후 들어가면 가이드가 안내를 해준다. 물론 프랑스어로 설명을 하기에 알아들을 수 없지만 관련정보를 열심히 설명해준다. 티파사는 카르타고의 쇠퇴 이후 1세기에 로마제국의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군대를 주둔하면서 본격적인 로마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3세기 초 기독교가 로마제국을 통해 전래가 되면서 기독교관련 유적지들이 생겼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유적으로는 원형 경기장과 신전, 극장, 목욕탕, 무덤 등의 유적들이 남아있다. 지금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해안의 접안시설은 바다에서 바로 도시로 연결되는 항구도시의 특징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해안을 중심으로한 지역에 8천 여명 이상의 인구가 살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였음을 알 수 있는 곳이다. 로마시대 당시 8천명-1만명의 인구는 상당히 많은 인구로 큰 도시에 속하는 곳이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성바실리카 유적

지금까지도 유적으로 남아있는 원형경기장과 분수대, 그리고 도시의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도로에는 당시에 마차가 다녔던 흔적이 생생하게 남아있다. 원형경기장은 우리가 생각하는 로마의 거대한 콜로세움같은 규모는 아니지만 당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경기를 관람할 수 있을 규모이다. 원형경기장의 석물 조각에는 말을 탄 사람의 조각 등이 있어 이곳이 상당히 중요한 건축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원형경기장 서쪽에는 납작한 돌을 깔아 만든 너비 14m, 길이 200m의 데쿠마누스 도로 유적이 있다. 두 대의 마차가 서로 다닐 수 있을 정도의 넓은 길로 너비 14m 길이 200m정도의 길이 남아있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바실리카 유적에 남아있는 기둥들, 당시의 화려한 모습을 짐작케한다.

서쪽으로 14km떨어진 Cherchell 까지 이어지는 이 길은 당시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추축을 해본다. 그 증거로 돌로 만든 도로에 마차 바퀴너비 만큼 파여진 흔적들이 있다. 그만큼 많은 물류와 사람들의 이동이 있었다는 증거일 것이다. 티파사는 1982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데 특히 4세기에 건립된 가로 52m, 세로 42m의 직사각형 구조의 바실리카식 대성당과 원형 세례당은 도시의 성안에 있는 서쪽의 라스 키니시아(Ras Knissia) 언덕 위에 있다. 아직까지 당시에 만들어진 건물의 일부와 모자이크 타일로 장식된 바닥이 남아있어 당시의 화려함을 짐작하게 한다. 바실리카 성당의 기둥의 아랫부분이 남아있다. 이곳에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음에도 당시에 만들었던 조각문양들이 선명히 남아있다. 여기에 기둥을 세워 건축했을 당시의 건물은 웅장한 규모를 자랑했을 것 같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지금도 선명한 색상을 가지고 있는 모자이크

티파사의 유적지 옆에는 수많은 무덤의 흔적들이 있다. 무덤의 주인은 바로 이지역의 기독교인들이다. 이곳은 북아프리카지역에서 카톨릭을 전파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기에 당시 이곳을 관장하던 알렉산더 주교가 기독교인들의 무덤을 이곳에 건축하였다. 돌을 파내어 만든 석관이 참 인상적이다. 바닷가에는 어린이들이 와서 수영을 하고 논다.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장면인데 뜨거운 여름날 수영을 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듯하다. 푸르른 지중해 바다를 배경과 까뮈의 소설의 배경을 연관지어 본다.

알베르 까뮈 문학기념비

"봄철에 티파사에는 신들이 내려와 산다. 태양 속에서, 은빛으로 철갑을 두른 바다며 야생의 푸른 하늘, 꽃들로 뒤덮인 폐허, 돌더미 속에서 굵은 거품을 부글거리며 빛 속에서 신들은 말을 한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1961년에 건립된 까뮈의 문학비

이 구절이 알제리의 티파사를 방문하면 피부에 와 닿는다. 알베르 까뮈의 산문집 '결혼·여름' 중 ‘티파사에서의 결혼’의 첫 구절에서 티파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알제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번 정도는 읽고 오는 책이기도 하다.

 

1961년 까뮈의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까뮈의 문학비가 이곳에 세워져있다. 지중해의 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고대 로마의 유적들 속에서 까뮈가 묘사한 바로 그 장면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다.

알베르 까뮈를 찾아서 - 알제리 티파

기념비에는 그가 다음과 같이 써놓았다.

Je comprends ici ce qu'on appelle gloire : le droit d'aimer sans mesure.

(I understand what we call glory is the right to love without any measure.)

-Albert Camus-

 

여기서 나는 사람들이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그것은 거침없이 사랑할 권리이다.

글. 권기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