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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크 ] 과학을읽다

'아이보리 러시'...동토에서 상아 찾기?

by아시아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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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묻혔다가 표면에 드러난 매머드의 상아를 캐는 현지인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아이보리 러시(Ivory rush)'를 아시나요? '골드 러시(Gold rush)'는 알아도 '아이보리 러시'는 모른다고요? 아이보리는 '상아(象牙)'를 말합니다. 코끼리의 위턱에 있는 송곳니가 길게 자란 것을 일컫습니다.


코끼리 상아는 과거 당구공과 피아노 버튼, 장식품과 예술품 등을 만드는데 사용됐습니다. 상아의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공급 부족으로 가격이 폭등하자 상아를 노린 밀렵꾼들이 득세하게 됩니다. 코끼리가 멸종 위기에 이르게 된 근현대사의 한 장면입니다.


이처럼 상아를 노린 사냥꾼들이 최근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번에는 아프리카가 아닌 동토의 왕국 시베리아의 사하공화국입니다. 이 추운 곳에 코끼리가 있을까요? 최근에 등장한 사냥꾼들이 노리는 동물은 코끼리가 아닌 '매머드(Mammoth)'입니다.


'골드 러시'가 금을 캐기 위해 미국의 서부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던 현상을 의미한다면, '아이보리 러시'는 매머드의 상아를 캐기 위해 사냥꾼들이 동토의 왕국 시베리아로 몰려드는 현상을 일컫는 것입니다.


얼어붙은 땅속의 매머드 사체를 파헤치는 만큼 위험한 일이어서 골드 러시 당시처럼 아무나 덤벼들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골드 러시 때와 규모면에서는 큰 차이가 있다손치더라도, 일확천금을 노린 사냥꾼(업자)들이 몰려 든다는 점에서는 '러시'라고 표현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코끼리의 먼 친척인 매머드는 수백만 년 동안 시베리아에서 살았으나 약 4000년 전에 멸종했습니다. 고고학자들의 추정에 따르면, 약 1000만 마리 이상의 멸종한 매머드들이 시베리아의 두꺼운 동토에 묻혀 있는데 이 가운데 80% 정도가 사하공화국에 존재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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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사하공화국에서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된 매머드의 유해를 과학자들이 살펴보고 있습니다.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에 위치한 사하공화국은 러시아에서 가장 넓은 행정 구역입니다. 러시아 안에는 22개 공화국과 85개의 연방주가 있는데 연방주 가운데 가장 상위 개념이 공화국이지요. 각 공화국에는 대통령과 총리가 따로 있습니다. 미국의 주정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땅이 넓은 러시아만의 독특한 제도입니다.


최근 사하공화국에 '매머드 사냥꾼'이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로 인한 환경 훼손도 심각한 수준이라고 합니다. '아이보리 러시'를 불러온 가장 큰 원인은 지구 온난화입니다. 지구 온난화로 최근 사하공화국의 기온이 급격히 높아져 동토층이 빠르게 녹으면서 얼어붙었던 매머드의 무덤이 드러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2017년 유럽이, 2018년부터는 중국이 코끼리 상아 거래를 불법화했습니다. 이후 유럽과 중국을 중심으로 매머드 상아의 수요가 늘고 있다고 합니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있기 마련입니다. 매머드 상아 발굴량은 10여 년 전 연간 20톤 정도였다면, 지난해는 123톤으로 크게 늘어났다고 합니다.


문제는 환경훼손과 과학적 손실입니다. 정부의 승인을 받아 공식적으로 활동하는 사냥꾼은 극히 일부이고, 대부분의 사냥꾼이 불법으로 상아를 발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허가받은 토착민들은 툰드라에 묻힌 상아를 삽이나 창으로 파내지만, 불법 사냥꾼들은 무리지어 다니면서 산업용 장비를 사용해 강기슭을 공략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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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머드 상아를 노린 불법 사냥꾼들이 파헤친 시베리아 동토의 모습. [사진=BBC 화면캡처]

특별한 직업이 없는 시베리아 동토의 주민들은 과학적이거나 상업적인 매머드 채굴로 생계를 이어가는 경우가 많은데 불법 사냥꾼들이 이들의 생계마저 빼앗는 셈입니다.


불법 사냥꾼들은 인근의 강이나 바다에서 물을 끌어와 강기슭이나 무너져 가는 동토층의 절벽에 휘발유로 작동하는 엔진을 이용해 물대포를 쏘아 댑니다. 고압의 물대포가 녹기 시작한 동토를 완전히 녹여 자갈과 악취가 뒤섞인 흙탕물을 만들고, 이 흙탕물은 수로로 흘러들며, 이 과정에 모습을 드러낸 매머드의 유해는 바닥에 굴러 떨어집니다.


사냥꾼들은 보존 상태가 완벽한 매머드의 유해 중 상아만 챙기고, 나머지 뼈와 치아, 상아의 파편 등은 모두 버립니다. 버려져 비바람을 맞은 매머드의 남은 부위들은 몇 년이 지나면 물에 쓸려가거나 풍화돼 흔적을 잃게 됩니다.


어떤 사냥꾼들은 산비탈을 완전히 도려내 땅속으로 60미터나 파고 들어가는 터널을 만들기도 합니다. 영구 동토층을 완전히 파괴하는 행위이지요. 선사시대 인간이 매머드를 사냥한 사냥터이거나 매머드들이 자연사한 곳일 수도 있는 과학적 가치가 큰 거대한 매머드의 묘지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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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베리아 동토에서 발견되는 털 매머드를 복원한 모습. [사진=유튜브 화면캡처]

과학자들은 매머드의 상아는 길이가 4미터에 이르는데 매머드의 일생을 짐작할 수 있는 소중한 정보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유전자 연구에 활용할 수 있는 DNA와 나무의 나이테같은 무늬도 있어 이런 정보를 분석해 매머드의 나이를 유추하거나, 암컷 성체의 상아는 출산한 새끼의 숫자를 파악하는 등 일생에 관한 정보들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인간의 욕심이 모든 사건의 원인입니다. 동토를 녹여 매머드의 유해가 드러나게 한 원인은 지구 온난화지만, 지구 온난화를 야기시킨 것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코끼리 사냥을 못하게 하니 땅 속에서 매머드의 상아를 파내는 인간의 비정함이 동토의 왕국 시베리아마저 오염시키고 있습니다.


김종화 기자 justin@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