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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즈 ]

봉준호 美 돌풍에는
'신성한 통역'이 있었다

by조선일보

[아무튼, 주말]


언어의 아바타, 통역사의 세계

조선일보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NBC 토크쇼 '더 투나이트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 출연한 봉준호(가운데) 감독과 통역 최성재(왼쪽)씨. 진행자 지미 팰런의 질문에 봉 감독이 한국어로 말한 답을 최씨가 말풍선 안에 있는 것처럼 영어로 센스 있게 통역했다. 최씨는 해외 영화 담당 기자들 사이에서도 명통역이라고 찬사받고 있다. / 유튜브 캡처

영어에 꽤 자신 있다는 분들께 질문 하나. "나도 되도록 여기서 말을 안 하고 싶어요. 스토리를 모르고 가서 (영화를) 봐야 재밌거든요." 이 말을 영어로 통역한다면 어떻게 될까. 머릿속에 맴도는 문장이 혹시 다음과 비슷한가. "I don't want to talk about my film here because it's more interesting when you don't know the story." 의미 전달은 되지만 평범한 표현이다.


이 말은 지난 9일(현지 시각) 미국 NBC 토크쇼 '더 투나이트 쇼 스타링 지미 팰런'에 게스트로 출연한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이 어떤 영화인가"라는 진행자의 물음에 한 대답이었다. 봉 감독의 통역이 선택한 표현은 뭐였을까. "I'd like to say as little as possible here because the film is the best when you go into it cold." 핵심은 'cold(콜드)'. 준비나 사전 고지 없는 상태를 뜻하는 단어다. 한 베테랑 통역사는 "단어 선택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났다. 매끄러운 구어체를 구사해 봉 감독의 말맛을 입체적으로 살려냈다"고 호평했다. 해외에서도 화제다. 미국의 각본가 겸 기자 제넬 라일리는 자신의 트위터에 "샤론은 지금까지 본 최고의 통역사 중 하나. 그녀는 단지 단어뿐만 아니라 톤, 마음까지 전달한다"고 찬사를 보냈다.


해외에서 영화 '기생충'의 인기가 끓어오르면서 통역까지 주목받고 있다. '제2의 혀' 통역은 어떻게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할까. 현장의 베테랑 통역사들에게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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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아바타'

"언어의 아바타처럼 모든 통역을 완벽하게 해주는 놀라운 최성재씨." 최근 봉준호 감독이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전담 통역 최성재(영어 이름 샤론 최)씨에게 고마움을 전하면서 한 표현이다. '언어의 아바타.' 통역의 역할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차진 비유다. 최씨는 전문 통역사가 아니라 한국 국적 해외 유학파로 단편영화를 만든 적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 이해도가 높다는 얘기. 봉 감독과는 지난 칸 영화제부터 지금까지 손발을 맞췄다.


작은 디테일도 생생하게 살려 전달하는 솜씨 덕에 그의 통역으로 영어를 공부하는 유튜브 영상까지 등장했다. 통역사들이 말하는 통역의 제1원칙 '사견을 배제하고 토씨 하나까지 전달하기'에 부합한다. 10년 경력의 금융 전문 한수영 통역사는 "1~10까지 있는데 1, 3, 5, 7, 9만 전달하는 것도 통역사의 사견이 들어간 것"이라며 "취사선택해 생략하거나 요약하는 과정에 개인의 판단이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했다.


화자의 의중 파악도 통역에선 중요한 부분. 사르코지 전 프랑스 대통령, 박근혜 전 대통령 등을 통역했던 14년 차 한영불 통역사 이인나씨는 "잠시 연사의 삶에 들어갔다가 나온다고 생각하면서 통역하면 그의 마음이 자연스럽게 담긴다"고 했다.


국무총리실, 청와대 통역관 등으로 일했던 이주희 통역사는 '그림자 역할'을 강조했다. "통역사는 무대 위 주연배우를 서포트하는 조명, 음향 같은 무대장치다. 관객에겐 안 보이지만 주연배우가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기 위해서 무대에서 빠질 수 없는 존재다."

한국어 잘해야 유능한 통역사

통역사는 자격증이 없다. 통상 통번역대학원 졸업장이 자격증으로 인식된다. 자격시험이 없는 대신 졸업하기가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요즘엔 정식 통번역대를 졸업하지 않고 통역하는 사람도 꽤 되지만 '국제회의 전문 통역사'라고 지칭할 땐 통번역대 졸업장을 필수로 본다. 통역비는 실력에 따라 천차만별. 프리랜서의 경우 보통 6시간 기준으로 90만원 선이다. 회의를 녹음하는 경우는 지식재산권 때문에 비용이 더 들기도 한다.


외국어를 유창하게 해야 유능한 통역사일까? 통역사들은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인나 통역사는 "통역의 전통적 규칙엔 'into 모국어(모국어로 통역한다)'가 있다. 뉘앙스를 제대로 살리려면 모국어가 도착어(통역되는 언어)여야 한다는 것"이라고 했다. 한수영 통역사도 "통역할땐 정확도(accuracy), 완전성(coverage), 유창함(fluency) 등이 중요하다. 유창함은 영어 발음이 좋다, 나쁘다가 아니라 뉘앙스를 살려 원문을 얼마나 정확하게 커버하는가에 달렸다"고 했다. 이주희 통역사가 꼽는 좋은 통역의 판단 기준은 "얼마나 청중 친화적인가"였다. 한국에서는 청중의 언어, 즉 한국말을 잘해야 좋은 통역이란 얘기다.


깊이 있는 통역엔 한자 실력이 의외로 중요하단다. 한 통역사는 "아래 세대로 내려갈수록 해외파가 많다. 영어는 유창한데 한자를 잘 몰라 통역했을 때 한국말의 깊이가 안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고 했다.


북·미 정상회담 생중계 등을 담당한 통역사 안현모씨는 "통역사는 두 명 이상이 있을 때 말 한마디로 관계를 좁혀 가는 사람"이라며 "기계적 통역 기술자이기보단 '커뮤니케이터(소통자)' 역할이 커지고 있다"고 했다. 안씨는 지난해 BTS(방탄소년단)의 빌보드 뮤직 어워드 수상 생중계를 동시통역하다가 리더 RM이 수상 소감을 할 때 잠시 멈춘 적이 있었다. 그는 "RM의 유창한 영어를 시청자에게 들려주자고 작가와 미리 상의했다"며 "과거 같으면 몇 초 사이 방송 사고라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통역사가 주관적으로 판단할 여지가 좀 생긴 것 같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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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통역의 출발은 화자의 달변

통역사의 역량만으로 완벽한 통역이 나오진 않는다. 원재료인 연사의 말이 명쾌해야 한다. 아이러니하게 "한국 사람이 한국말을 너무 못해 통역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는 게 현장 얘기다. 이인나 통역사는 "영한·한영 양방 통역을 해보면 상대적으로 한국 사람은 중언부언, 주어 생략이 많다. 질문한다면서 자기 인생을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며 "주입식 사고 때문에 생각 주머니가 크지 못해 나오는 전형적 패턴"이라고 했다. 그래서 서양 연사들이 질의응답 때 "I am not sure if I understood you clearly(내가 당신 말을 잘 알아들었는지 모르겠지만…)"로 답을 시작할 때가 많단다.


미사여구를 좋아하는 한국인의 언어 습관이 통역에는 걸림돌이다. 이주희 통역사는 "한 문장에 여러 개의 아이디어를 담아 장황하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길게 하면 비논리적이 되기 쉽다. 중요한 연설문에도 굳이 필요 없는 수식이 많아 뜻이 모호할 때가 있다"고 했다. 정작 알맹이는 없다. 입버릇처럼 "우리가 열심히 해서 사업을 성공시키겠다"고 얘기하는 기업가에게 외국 사업 파트너는 신뢰 대신 의구심을 갖는다. "So what(소 왓·그래서 뭐를 하자는 얘기인가)?" 구체적 계획이 그들에겐 더 중요하다.


"AI(인공지능)가 발전하면 없어질 직업 중 하나로 꼽히는 게 통역이지만 한국어 통역은 그래도 좀 오래갈 것 같다"는 우스개가 나오는 이유다. 한국어는 사용 인구가 적어 빅데이터가 많지 않기 때문에 번역기 정확도도 낮은 편이다. 구글 번역기로 영어에서 한국어로 바로 바꾸면 오류가 많지만, 영어에서 우리말과 어순, 단어가 비슷한 일본어로 바꾼 뒤 이를 한국어로 돌리면 더 정확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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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연결하는 언어 배달부

"영어를 잘 못해서 죄송합니다. 한국어로 하겠습니다." 이인나 통역사는 "습관적으로 한국에서 열리는 회의인데 이렇게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며 "한국에서 한국말로 얘기하는 건 미안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일, 그러려고 통역이 있으니 이런 말은 안 하는 게 좋다"고 했다.


아이 콘택트를 꺼리는 문화 때문에 대화 상대가 아니라 통역사를 쳐다보고 말하는 사람도 많다고 한다. 상대가 내 말을 못 알아들어도 얘기할 때는 그의 눈을 쳐다봐야 한다. 가끔 상대편이 들으면 곤란한 얘기를 해놓고 "이것까지는 통역할 필요 없어요"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한 통역사는 "상대가 말을 못 알아들어도 공기는 읽는다. 이런 실례는 범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의 또 다른 영화 '옥자'에서 어눌한 한국어로 통역하는 케이(스티브 연)의 팔뚝엔 이런 문신이 새겨져 있다. "Translations are sacred(통역은 신성하다)." 마음에 말을 얹어 배달하는 일. 작은 언어 배달부들이 세상을 연결한다.

대통령 당선 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영어 통역관 구하기...임기 첫날 韓美정상 통역해야

한국에서 대통령 당선인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뭘까. 전담 영어 통역관 구하는 일이라고 한다. 당선 다음 날 미국 대통령과 전화 통화하는 게 오랜 외교 관례이기 때문. 당선 직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 외교부로 통역관을 구하라는 지시가 떨어진다. 당선 다음 날인 공식 임기 첫날 '정상(頂上) 통역'이 시작된다.


통역사들에겐 최고 영예의 자리로 꼽히지만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일급 기밀을 통역해야 하는 자리인 만큼 대부분 내부 인사를 주로 발탁한다. 전담 통역관을 두기 시작한 건 박정희 정권 때다. 그 이전 이승만·윤보선 전 대통령은 각각 미국과 영국 유학파, 최규하 전 대통령은 외교관 출신으로 영어가 유창해 통역이 필요 없었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까지는 청와대 의전수석비서관이 주로 담당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 시절엔 박진 전 의원이, 김대중 전 대통령 시절엔 강경화 현 외교부 장관이 담당했다.


최장수 '대통령 통역관'은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세 대통령을 거친 김일범(45) 전 외교부 북미2과장. 전무후무한 케이스다. 김 전 과장은 "세 분 모두 통역관이 단순히 말만 전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당신과 일체가 돼 감정과 고민까지도 암묵적으로 전달하는 사람이라는 걸 잘 이해했다. 통역관이 강약을 조절할 공간을 많이 줬다"고 했다. 통역하기 좋은 대통령으로는 김대중 대통령을 꼽았다. "영어 듣기가 90% 이상 되고 메시지가 명확해 호흡이 잘 맞았다"고 했다. 그는 "사전에 양국이 80% 정도 합의한 사안이라고 해도 정상이 만나 대화하면서 쌓는 호감과 신뢰가 협상에 결정적으로 작용한다"며 "정상들을 가까워지게 하는 중간 역할이라는 점에서 보람을 느꼈다"고 했다.


대통령이 바뀌는 동안 그는 바뀌지 않았다.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재임기간 2001~2009년)은 우리 대통령들보다 더 많이 만났다. 김 전 과장은 "부시 대통령은 매우 소탈해 잘 있었느냐고 먼저 인사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까. 만찬 자리에서 음식 설명, 사자성어가 나오면 통역하기 까다로웠다고 했다. 대통령 통역관이 갖추어야 할 요건을 물었더니 "체력"이라고 했다. 한 명이 담당하기 때문에 대체 인력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후임에게 조언한 말이 "절대 아프지 말아야 한다"였단다.


정상 통역의 본보기로 통하는 또 다른 인물은 이연향(62) 미 국무부 통역국장이다. 미·북 정상회담 때 트럼프 통역으로 익숙하다. 30여 년 동안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통역해온 베테랑. 부시 전 대통령, 힐러리 클린턴 전 미 국무부 장관 등을 통역했고, 2009년 미 국무부에 들어갔다. 과거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 국장은 "외교 통역은 뉘앙스, 저의(底意)가 중요하기 때문에 직역에 가까운 통역을 한다"며 "선물할 때 선물 자체도 중요하지만 어떤 박스에 담고 어떤 포장을 했느냐가 더 중요할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했다.


[김미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