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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프루테리언-폴로… 150만 비건, 또 하나의 문화가 되다

by동아일보

우리 사회 일상이 된 ‘비거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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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 가죽이나 털은 물론이고 동물성 재료를 일절 배제하는 패션 브랜드도 최근 늘어나고 있다. 사진은 면을 가공해 가죽과 비슷한 재질로 표현한 비건 가방. 비건페스타 제공

최근 채식주의를 통칭하는 ‘비거니즘(veganism)’ 열풍이 거세다. 동물성 제품을 섭취하지 않는 식습관을 뛰어넘어 하나의 문화 현상으로 번지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성큼 다가온 비거니즘의 현재를 가상 인물인 이비건 씨(25)의 시선으로 구성해 봤다.


‘비건’으로 산 지 3년째다. 시작은 아토피였다. 음식으로 체질을 바꾸면 도움이 될 거란 지인 말에 채식을 시작했다. 채식주의자들과 만나 교류하면서 환경과 동물권, 가치소비로 관심이 뻗어나갔다. 채식은 보통 8단계로 나뉘는데, 열매에 해당하는 과일과 곡식만 먹는 ‘프루테리언’부터 어패류나 유제품, 가금류는 먹기도 하는 ‘폴로’까지 다양하다.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비건이라면 열에 다섯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격이 예민하고 까다로울 거라 지레짐작하는 이들이 열에 아홉쯤 됐다. 지금은 아니다. 1, 2년 전부터 젊은층을 중심으로 비건 문화가 빠르게 퍼지고 있다. 환경과 동물에 대한 관심이 비건 문화의 폭발적 성장에 기폭제 역할을 했다.


이젠 대학마다 비건의 가치를 공유하는 동호회가 생겼다. 인스타그램에는 비건 소모임 모집 공고가 줄줄이 올라온다. 한국채식연합이 추산한 국내 채식인구는 약 150만 명. 10년 전보다 두 배 정도 늘었다. 이달 2, 3일에 열린 ‘제7회 비건 페스티벌’은 3년 만에 참가자가 20배나 늘었다고 한다.


피부에 와 닿는 가장 큰 변화는 먹을거리다. 서울대와 동국대, 삼육대 등에 비건 식당이 들어섰다. 많은 대학 학생회가 비건을 위한 식당이나 메뉴를 개설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고 있다. 비건 모임에서 만난 선배 언니는 5년 전엔 서울에서 다섯 손가락에 꼽히던 비건 식당이 이제 80여 곳으로 늘었다며 박수를 쳤다.


이뿐 아니다. 채식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애플리케이션 ‘채식한끼’나 ‘베지카우’도 생겼다. 특히 내가 즐겨 찾는 곳은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 있는 비건 거리. 자취를 해서 이따금 요리를 해먹는데, 각종 향신료와 음식 재료를 살 수 있는 가게가 모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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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유, 달걀, 설탕을 사용하지 않고 빵을 만드는 비건 빵집이 서울 마포구 합정과 용산구 이태원 등을 중심으로 빠르게 늘고 있다. 사진은 마포구의 비건 빵집 ‘야미요밀’. 야미요밀 제공

우유 대신 코코넛크림을, 밀가루 대신 쌀가루를 쓰는 비건 빵집도 ‘핫 플레이스’로 각광받는다. 비건 빵집만 찾는 성지순례도 유행이다. 지난달 31일 찾은 서울 마포구의 비건 빵집 ‘야미요밀’은 평일인데도 손님들로 붐볐다. 이곳에서 만난 직장인 김미향 씨(31)는 “대표 메뉴인 크림빵은 3300원으로 다소 비싼 편이다. 하지만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면 1.5배 정도 차이는 감당할 만하다”고 했다.


야미요밀에 따르면 고객 구성은 비건이 20%, 건강식에 관심 많은 이들이 40% 정도다. 외국인 비율도 높다고 한다. “2017년 창업한 후 올해 매출이 200% 성장했다. 택배 서비스도 시작했다”고 직원이 귀띔했다.


대중화가 안 돼 일반 쇠고기보다 2∼3배나 비싸지만 인조고기도 인기다. 외국에서 만든 비건 달걀은 실물과 똑같다고 한다. 화장품과 세제, 초콜릿, 아이스크림, 고기, 치즈…. 필요한 모든 것에 비거니즘이 도입되고 있다. 가방은 에코백이나 가죽 느낌의 천으로 만든 제품을 쓴다. 패딩점퍼는 좀 비싸도 버려진 털을 재생해 만드는 브랜드나 오리털보다 몇 배 비싸도 고급 섬유로 만든 제품으로 사 입을 생각이다.


비거니즘에서 채식은 사실 모래알 같은 의미다. 비건의 핵심은 가치지향적인 태도다. ‘월간 비건’의 이향재 편집장은 “저마다의 이유로 채식을 시작하지만 결국 적게 쓰고 윤리적으로 소비하는 가치를 따르게 된다. 비건 문화의 핵심은 생명에 대한 존중과 공존”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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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건에 입문하는 이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뉜다. 건강, 환경 문제, 동물권에 대한 관심이다. 주축은 밀레니얼 세대다. 가치소비에 관심이 많은 데다, 풍부한 외국 경험을 통해 비건을 접하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특히 이들은 환경 문제를 생존과 연결해 생각하는 경향도 있다고 한다. 조길예 기후행동비건네트워크 대표는 “축산업으로 발생하는 온실가스가 전체의 18%를 차지한다. 비건을 실천하면 온실가스를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건인이 늘고 있다”고 했다.


비건 바람은 세계적 현상이다. 대체육류 시장은 2040년 세계 육류 소비시장의 60% 이상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세계 최초로 ‘비건 패션위크’가 열리기도 했다.


물론 여전히 갈 길은 멀다. 최근 입사한 은주 언니는 최근 이따금 고기를 섭취하는 플렉시테리언으로 전환했다.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할 때가 많다 보니 아예 안 먹을 순 없다고 한다. 언니는 비건과 논비건이 함께하는 소모임을 제안했다. 나는 적극 찬성했다. 알면 이해하고, 이해하면 비건에 동참할 것이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으니까.


이설 snow@donga.com·신규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