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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예쁜’ 내가 아닌 ‘진짜’ 나를 찾는 여성들의 디폴트립

by이데일리

꾸밈노동 없이 여행하는 여성들의 새로운 여행 문화 '디폴트립'

여성을 위한 콘텐츠를 만드는 크리에이터 팀 '하말넘많'

"디폴트립으로 인생샷이 아닌 인생을 건지고 돌아왔다"

이데일리

(사진=유튜브 채널 '하말넘많')

‘디폴트립’이란 기본값을 뜻하는 영어 단어 Default value와 여행을 뜻하는 Trip의 합성어로 ‘사회가 정한 허구의 여성성을 벗어던진 디폴트인의 여행’을 뜻한다.


최근 많은 여성 사이에서 꾸밈의 압박을 벗어던지고 진짜 ‘나’를 찾아 여행을 떠나는 ‘디폴트립’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화장 하지 않아도 되고 ‘예쁜’ 원피스를 입지 않아도 되는 그리고 SNS에 업로드 할 ‘인생샷’을 남기지 않아도 되는 그런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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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 올라온 디폴트립 이미지 (사진=광주페미니즘독서모임 WOMME)

인스타그램에 디폴트립 이라는 해시태그를 달고 인증샷을 올리거나 유튜브에 디폴트립 브이로그를 올리는 이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인스타그램에는 1천여 개의 디폴트립 관련 게시글이 올라왔으며 유튜브에도 디폴트립이라는 제목으로 여행 브이로그가 다수 올라오고 있다.

‘예쁘게 꾸민 나’를 보여주는 것이 주류인 세상에 생긴 균열

지금껏 여성들은 여행을 가기 전 무엇을 준비해 왔을까. 첫째 날 입을 원피스? 둘째 날 눈 밑에 바를 반짝이는 글리터? 셋째 날 입을 수영복? 많은 여성이 9박 10일의 여행이면 10일 동안 입을 열 벌의 옷을 준비했을 것이다. 더불어 옷에 맞는 신발, 액세서리, 각자 다른 색조 화장품까지.


여행 전 꾸밈에 지출한 모든 비용은 어쩌면 SNS에 올릴 ‘인생샷’을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매일 찾아가는 다른 공간에서 사진을 찍은 나의 옷이 다른 사진과 겹치면 안 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디폴트립은 여성이 여행에 대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에 균열을 만들었다.


‘잘 꾸민 나를 보며 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예쁜 나를 보여주고자’ 하는 여행이 주류인 세상에 디폴트립을 떠나는 여성들은 균열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리고 여성들은 이러한 균열에 열광한다. 대학내일 유아란 에디터는 디폴트립에 대해 “남는 건 사진 '밖에' 없다는 말, 반대로 생각해보면 사진‘만’ 포기한다면 더 많은 게 남는다는 거 아닐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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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유튜브 채널 '하말넘많')

디폴트립은 페미니즘과 탈코르셋 운동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몇 해 전부터 여성들은 여성의 인권을 위해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2018년부터 탈코르셋 운동이 시작되며 사회가 만든 여성성에서 탈피하기 위해 힘썼다. 그리고 여성성에서 벗어난 여성들은 자유로운 여행을 떠나기 시작한 것이다.


디폴트립을 떠나는 이들은 인스타그램에 올릴 이른바 인생샷을 찍기 위한 여행을 하지 않는다. ‘여행은 사진 찍으러 가는 것’,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여행을 한다. 이들은 말한다. 인생샷 없는 인생여행을 떠나겠다고. 인생샷을 찍지 않아도 괜찮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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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립 영상 속 오프닝 장면(사진=유튜브 채널 '하말넘많')

디폴트립의 시작 : 여성 콘텐츠 크리에이터 팀 ‘하말넘많’

디폴트립은 유튜브 채널 ‘하말넘많(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이 처음 만든 단어다. 구독자 약 9만 7천 명을 보유한 하말넘많은 여성을 위한 영상을 만들고 있는 페미니스트 크리에이터 팀(강민지, 서솔)이다.


하말넘많은 TV나 유튜브 속 여행 영상에는 ‘여성의 꾸밈’이 빠지지 않는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했다. 이들은 “꾸밈의 압박을 벗어던진 여성의 여행기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디폴트립이라는 단어를 만들었고 여행을 떠났다”고 여행 계기를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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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폴트립 왓츠인마이백 영상에서 각자의 여행 짐을 소개하고 있다.(사진=유튜브 채널 '하말넘많')

이들은 올해 초 프랑스, 스위스, 포르투갈 등 유럽 곳곳을 여행했다. 눈에 띄는 것은 우리가 지금껏 봐온 여성의 여행과는 다른 방향이라는 점이다. 겨울에 떠난 장기간 여행임에도 챙긴 옷은 몇 벌 되지 않았고, 화장품 또한 스킨, 크림, 선스틱 등 정말 필요한 것들만 챙겼다. 고데기, 색조화장품, 귀걸이, 원피스와 같은 꾸밈에 필요한 물건은 그들의 가방에 없었다.


하말넘많은 디폴트립 왓츠인마이백 영상에서 “이번 여행 짐의 가장 큰 특징은 속옷은 팬티뿐”이라고 말한다. 사회가 정한 여성성을 지키는 물건인 ‘브래지어’를 하지 않음으로써 디폴트립이 말하고자 하는 ‘기본값’을 실천한다.


영상을 시청한 한 네티즌은 “몇 년 전에 코르셋 잔뜩 뒤집어쓰고 겨울에 여행 갔었다. 28인치 캐리어 안에는 화장품과 옷밖에 들어있지 않았다. 디폴트립으로 그 나라들 다시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그 어떤 여행 영상보다도 여행가고 싶게 만드는 편-안한 영상”이라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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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터 팀 하말넘많이 '인생샷과 마카롱의 상관관계' 영상에서 인생샷과 핑크택스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해당 영상은 조회수 20만 회를 돌파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사진=유튜브 채널 '하말넘많')

인생샷 없는 여행이 말이 돼? 응, 말이 돼.

하말넘많의 유럽 여행 영상 제목은 ‘기본만 챙긴다?인생샷 없는 인생여행 디폴트립’이다.


이들은 과거의 자신을 돌아봤을 때 여행 전 꾸밈을 위해 많은 돈을 지출하고 여행지에서도 잘 나온 사진 하나를 건지려 끊임없이 셔터를 눌렀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사진을 찍으러 간 여행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신들 뿐만 아니라 왜 많은 여성들이 이런 것들을 소비하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리고 SNS의 등장과 함께 많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끈 해시태그 인생샷에서 문제점을 찾았다.


그들은 “인생샷이라는 단어는 사진 속에 예쁘고 아름다운 내가 있어야 한다는 강박을 여성에게 주입시킨다. 추억을 쌓는 인증샷과 SNS에 만연한 인생샷은 완전히 다른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인스타그램 검색창에 ‘인생샷’을 검색하면 약 180만 개의 게시글이 나온다. 사람들이 얼마나 인생샷에 관심가지는지를 알 수 있는 지표다. 하말넘많은 “사람들 사이에 물 흐르듯 사용되는 인생샷이라는 단어에서 여성들이 자유로워졌으면 하는 마음에 '인생샷 없는 인생 여행' 문구를 전면에 내세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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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메지 씨가 올린 탈코르셋 이전과 이후의 본인 사진이다. (사진=유튜버 정메지님 제공)

유튜버 정메지씨는 하말넘많의 디폴트립을 본 이후 지난 9월 디폴트립을 떠났다. 그는 "여행을 가기 전 인생샷을 찍겠다고 끼니도 걸러가며 열심히 다리 붓기를 빼고 여행을 가서도 사진에만 집중했던 지난 날의 여행들이 안타깝고 왜 그랬을까 싶지만 지금이라도 디폴트의 모습으로 여행을 다닐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함을 느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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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메지 씨의 디폴트립 후기 사진이다. (사진=유튜버 정메지님 제공)

덧붙여 "나를 예쁘게 만드는 행위를 멈추고 갔던 이번 여행은 그 어떤 때보다 오롯이 여행지와 그 곳을 즐기는 저에게 집중할 수 있었고 여러 번 갔던 방콕이지만 이번이 가장 기억에 남을 듯 하다. 이렇게 또 한 번 탈코르셋을 통해 여행에서 인생샷이 아닌 인생을 건지고 돌아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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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월 하말넘많은 '디폴트립'의 상영회를 열었다. 행사에는 약 180여 명의 여성들이 참석했다. (사진=하말넘많)

하말넘많은 여성혐오에는 사회적으로 형성된 여성성에 따라 자기 자신에게 부여하는 자기혐오도 분명히 존재한다고 말한다. 모든 여성이 자기혐오를 벗고 자신의 삶을 해방시켜 보다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길 바란다.


그래서 디폴트립은 여성들이 주체적인 삶을 실천하는 새로운 방안일 수 있다. 디폴트립을 위한 조건에는 무엇이 있냐는 기자의 물음에 그들은 어떠한 규정도 없다고 답했다. 여성들이 디폴트립의 의미를 깨닫고 스스로 그 뜻에 입각한 여행을 하고 있다면 말이다.


/스냅타임 김연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