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강사에서 30억 빚쟁이 돼보니...“인생과 게임을 헷갈리지 마세요”

[라이프]by 한국일보

[김지은의 ‘삶도’ 시즌2 : 실패연대기] <14>문단열

대장암과 간질성 폐질환, 잇단 건강 위기까지

“죽고 싶은 고비 많았지만, 죽지 않길 잘했다”

한국일보

2000년대 ‘스타 영어강사’로 이름을 날린 문단열 사다리필름 대표를 1일 서울 마포구 사무실에서 만났다. 사다리필름은 그가 8년 전 만든 영상제작 업체다. 그가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로 만들면 결국 투 트랙이었다는 의미로 슬레이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최주연 기자

그는 ‘참전 용사’다. 사업이란 게임의 전쟁에 세 번이나 몸을 던졌다. 결과는? 연이은 참패. 남은 건? 빚 30억 원. 그래도 그는 도망가지 않았다. 빚을 갚으려 “몸을 갈아 넣었다”. 그랬더니 암이란 놈이 찾아왔다. 맞섰다. 역시 싸워 이겼다.


20여 년 만에 누리는 ‘빚쟁이’가 아닌 삶. 이번엔 간질성 폐질환이 그의 삶을 흔들었다. 앞서 말했듯 그는 참전 용사. 과거보다 더 빨리 정신을 차렸다. “어둠 속 스나이퍼는 두려운 존재지만, 위치가 발각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병증을 일으키는 원인을 집요하게 탐색했고 찾아냈다.


2000년대 최고 인기를 누렸던 영어회화 강사 문단열(59) 사다리필름 대표다. 그는 한 달 순수입이 3,000만 원에 달했던 스타 강사. 지금으로 치면 ‘일타강사’다. 풍족한 강사로 살 수 있었지만,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이 화근이었다. 학원 사업을 벌였다 빚을 졌고, 만회하려고 인터넷 영어학습 사이트를 차렸다가 빚이 더 불었다. 홈쇼핑 방송에도 진출해봤지만 빚만 더 보탰을 뿐이다.


그의 30~40대는 그래서 성공과 실패, 인기와 불안, 도전과 빚이 공존했다. 어디서나 알아보는 인기 영어강사였지만, 한편으론 늘 채권자의 빚 상환 독촉 전화에 시달리는 채무자 신세였다. 울지언정 그는 걷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래서 얻은 결론. “게임에서 실패했지만 인생에서는 실패하지 않았다.”


사업과 삶에서 얻은 실패 경험을 담아 책 ‘인생은 투 트랙’(해냄)을 낸 문 대표를 1일 서울 마포구 사다리필름에서 만났다. 그가 걸어온 길도 결국은 ‘사다리필름’이란 생각이 들었다.

[실패①] 유명했지만 향유해보지 못했다

한국일보

그는 머리칼을 민 상태다. 자유로움이 느껴졌다. “평생 로망이었는데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을 하는 동안엔 시도하지 못하다가 카메라 뒤에 서는 일을 하면서 실현했다”고 말했다. 최주연 기자

어떤 길은 실패에서 시작된다.


그는 애초 강사가 아니라 통역사가 되려고 했다. ‘영어’하면 문단열이었으니까. 고등학교 때 코리아헤럴드가 주최한 영어 스피치 대회에 나가 부문 통합 1등을 하고, 토익(TOEIC) 도입 초창기엔 준비도 없이 시험 쳤다가 전국 2위(당시엔 전국 석차를 알 수 있었다고 한다)를 했으니까. 한국외국어대 통번역대학원을 준비했다. 그의 목표는 합격이 아니라 수석이었다. 그런데, 떨어졌다. 그것도 두 번이나. 두 번째 낙방 때엔 울다 울다 방바닥을 구르고 벽에다 머리를 찧어가며 울었다.


-그때 어떤 심정이었나요.


“유일한 탈출구로 여겼거든요. 대학(연세대) 때 전공이 신학이었어요. 부전공은 영어였지만, 취업 시장에선 도움이 안 되더라고요. 기업들은 어문계열, 상경계열, 이공계열로 나눠 신입 사원을 뽑는데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통번역대학원에 가서 통역사가 되기로 결심한 거죠.”


-떨어져서 어떻게 했나요.


“한 번 더 도전하지는 못 하겠더라고요. 그래서 학원 강의를 했어요. 어차피 대학 때부터 서울 강남 민병철어학원에서 강의를 해왔거든요. 졸업 앞두고는 아르바이트가 아니라 ‘풀 타임’ 강사로 가르치고 있었죠.”


-대학 재학 때부터요?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랬나 싶은데, 이력서 들고 가서 ‘저 영어 잘 가르치는데 한번 써보세요’라고 했죠. 하하. 사무국장님이 어이없는 표정을 짓더니 ‘그럼 한번 해보든가’라면서 수강생이 별로 없는 시간에 테스트 강의를 시키더라고요. 그때 바로 합격했어요.”


그는 3개월 만에 ‘A급’이 됐다. 수강생 재등록률이 가장 높은 축에 속하는 강사가 된 거다. 그렇게 3년 여를 일했다. 거기서 만족했으면 좋았을까. 그는 안주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당시 가장 큰 민병철어학원에서 인기 강사가 된 지 얼마 안 돼 창업을 했네요.


“동업으로 했다가 망하고 다시 2, 3년 동안 칼을 갈아서 신촌 연세대 앞에 ‘노토어학원’을 차렸어요. 1994년이니 서른 살 때죠. 그때는 ‘근자감 덩어리’라서 돈을 모으고 기다리는 시간이 답답할 정도였어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상태였죠. 빠져나오는 데 15년 이상이 걸렸지만.”


-그래도 잘 됐지요? 1년 6개월 만에 성공가도에 들어섰다고요.


“첫 달 수강생이 180명이었어요. 1년 반이 지나니까 수강생이 1,300명 정도로 늘어난 거예요. 한 달 순수익이 3,000만 원쯤 됐어요. 학원 규모가 원래 상가 건물 1개층이었는데 3개층으로 늘리기로 했죠. ‘돈을 한번 긁어 모아보자’ 한 거죠. 하하.”


-이미 창업할 때도 빚을 졌잖아요.


“모아놓은 돈에다가 은행 대출, 지인들한테 빌린 돈까지 합쳐서 종잣돈을 마련했죠. 그때 관련법상 외국어학원을 차리려면 실평수가 100평(330㎡)이 돼야 했거든요. 금리도 높았을 때죠. 그걸 갚아나가면서 운영하다가 드디어 수익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확장하려고 돈을 더 빌린 거예요.”


그러자마자 IMF 구제금융 위기가 닥쳤다.


-어떻게 됐나요.


“수강생이 절반으로 떨어지더라고요. 그런데 학원을 이미 확장한 상태잖아요. 그래도 버티면 될 줄 알았는데 빚을 빚으로 때우려다 나중에는 5억7,000만 원까지 채무가 늘어났어요. 막판엔 사채를 빌릴 생각도 들더라고요. 그래도 사채에는 손을 대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죠.”


-처음으로 그렇게 큰 빚을 떠안은 건데 막막했겠어요.


“그런데 그때는 ‘사업으로 진 빚이니 사업을 잘 해서 갚아보자’ 싶었어요. 마침 닷컴 열풍이 불던 때였죠. 원래 호기심 많고 새로운 문물에 적응을 잘하는 편이라 이번엔 인터넷 어학 학습 사이트(펀글리시)를 만들었어요.”


-그래도 종잣돈이 있어야 할 텐데요.


“엔젤 투자(자금이 부족한 신생 벤처 기업에 자본을 대는 개인 투자)를 받았어요. 제가 말하는 데는 재주가 있나 봐요. 엔젤 투자자 16명한테 투자를 받았어요. 그땐 그게 고통으로 들어가는 대문인 걸 모르고 능력을 인정받아 받은 벼슬처럼 여겼죠.”

[실패②] 유명해진 만큼 빚 독촉도 늘었다

한국일보

문단열 대표는 2002년부터 5년간 EBS ‘잉글리쉬 카페’를 진행하면서 큰 인기를 얻었다. EBS 유튜브 캡처

그가 만든 ‘펀글리시’는 잘 됐지만 돈이 벌리진 않았다. ‘인터넷은 공짜’란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거기다 닷컴 열풍의 거품까지 걷히자, 또다시 남은 건 빚. 빚은 배로 늘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다른 한쪽에선 그의 이름값도 상승했다는 사실. 첫 책 ‘김치발음에 빠다를 발라주마’를 내면서 만든 영상 콘텐츠를 보고 케이블 채널 재능TV에서 프로그램 제안을 한 것이다. 재능TV의 ‘버터발음 학당’은 EBS 진출의 발판이 됐다.


-EBS ‘잉글리쉬 카페’가 엄청 인기가 있었죠.


“당시 시청률이 3% 정도 나왔으니까요. 그때는 녹화해서 학교에서도 틀어줄 때니까 실제 시청한 사람들은 더 많았겠죠. 말하자면 ‘밤무대 가수’가 ‘가요톱10’에 출연한 것과 비슷했죠.”


-인기를 체감했나요.


“신기했어요. 첫 기억은 식구들하고 ‘에버랜드’에 놀러 갔을 때예요. 누가 ‘방송 잘 보고 있어요. 재미있고 공부도 돼요’라면서 저를 알아보기에 ‘감사합니다’ 했죠. 그런데 한두 달 지나니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알아보는 사람들이 생기는 거예요. 좀더 지나니까 어디를 가도 제가 누군지 알더라고요.”


-그런데 사업은 계속 적자가 났으니 참 묘한 심정이었겠네요.


“점점 유명해지는데 빚도 늘어갔죠. 그러니까 내 실존이 (양쪽으로) 갈라지는 느낌이었어요. 한쪽에선 사람들이 ‘와’ 하면서 알아보는가 하면, 다른 쪽에선 채무자들이 ‘빚 갚으라’고 독촉했죠. 인기를 향유해본 적이 없어요. 오히려 TV에 나오면 채무자들이 ‘그렇게 돈을 잘 버는데 왜 내 돈은 안 갚냐’고 전화를 하니까 더 불안해졌어요. ‘이번 생엔 안 되겠다. 빚만 갚다 끝나겠다’ 생각했죠.”


-유명해지는 게 좋지만은 않았겠어요.


“죽을 생각을 정말 많이 했죠. 가족 덕분에 살았어요. 그런 (이중적인) 시간이 계속되니까 굳은살이 박이더라고요. 낮에는 바깥에서 어떤 소리를 듣더라도 해가 떨어져서 집에 갈 시간이 되면 ‘지금부터는 천국이다’ 싶은 거예요. 낮에는 ‘사기꾼’ ‘거짓말쟁이’ ‘돈 숨겨놓고 안 갚는다’ 별별 자존감 떨어뜨리는 소리를 들어도 집에만 가면 괜찮았어요.”


살면서 들었던 가장 희망이 되는 얘기는 ‘한 사람만 있으면 된다’였다. “세상에서 나를 인정해주고 깊이 공감하는 한 사람만 있으면 사람은 살 수 있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정혜신 작가의 말이다. 그도 그랬나 보다.


-가족이 버팀목이었군요.


“다행히 가정 안에선 고통이 없었어요. 물론 채권추심업체가 현관문 두드리고, 집에 ‘빨간 딱지’ 붙고 하는 일들이 있었죠. 아내도 처음엔 큰 충격을 받았죠. 하지만, 단 한 번도 제게 ‘당신 때문이다’ ‘그 빚을 다 갚을 수나 있겠냐’ 같은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이 시기도 다 지나갈 거야’ ‘이런 일을 겪는 데에도 다 뜻이 있을 거야’ ‘이 어려움을 극복한 힘으로 더 큰일을 할 수 있을 거야’라고 해줬죠. 아내는 (저를 믿는 데에) 백 퍼센트였어요.”


사람이 주는 힘은 그렇게 크다.

[실패③] 자존감을 ‘공개 처형’ 당한 순간

한국일보

그는 일주일 중 절반은 강원 양양군에 마련한 거처에서 지낸다. 양양은 전국에서 가장 공기가 맑은 곳 중 하나다. 간질성 폐질환도 잘 관리해 좋은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맨발 걷기도 그의 중요한 일과다. 최주연 기자

-중간에 홈쇼핑에도 진출한 적이 있죠.


“‘펀글리시’ 시절에 홈쇼핑으로도 학습기나 교재를 팔아봤죠. 그런데 잘 팔릴수록 적자가 나더라고요. 나는 사업하는 사람이 아니었던 거죠.”


그렇게 해서 쌓인 빚은 어느새 30억 원.


-세 번째 망하고 나니 정말 막막했을 것 같아요.


“그때 나를 직면했어요. 사업은 그만하자고 결심했죠. 그리고 몸으로 빚을 갚기로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저를 불러주는 곳이 많아서 전국을 돌며 강의를 했죠. 언젠가 내가 쓴 책과 교재를 검색해보니 160권 정도 되더라고요. 그 시기에 고속도로 위에서 구상하고 쓴 것들이죠.”


-몸이 정말 고됐을 텐데 그때는 어떻게 버텼나요.


“강연 듣는 분들의 표정으로 버틴 것 같아요. 가장 많은 청중 앞에서 강연했던 때가 경희대 평화의전당(4,500석 규모)에서죠. 객석이 꽉 찼어요. 저는 연단에 서면 몇 천 명이 앞에 앉아있어도 맨 뒷줄 문 앞에 앉은 사람 표정까지 다 보이거든요. 청중의 반응을 보면서 톤과 강연 내용을 조절해요. 청중과 내가 싱크(synchronization·동기화)돼서 함께 호흡하는 수준까지 끌어올리려고 하죠. 그 과정에서 청중이 ‘와!’ 하고 깨닫는 표정을 볼 때는 내가 아무리 욕먹는 빚쟁이여도 ‘이거면 살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그때 느낀 행복감은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해요.”


그가 쓴 책 ‘인생은 투 트랙’에서 인상적인 대목이 있었다. 채권자들이 법원에 채무자 재산 명시 신청을 해 그가 법원에 출석했을 때의 일이다. 채무자는 법원에 재산 목록을 제출하고 그 내용이 진실하다고 판사 앞에서 선서해야 한다. 그런데 하필 판사가 그를 지목해 채무자 대표로 선서를 해야 했다. 그는 아직도 그 장면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문단열씨, 모자 벗으세요. 20명을 대표해서 문단열씨가 선서하세요.”


-그때 심정이 어땠나요.


“판사의 그 말이 마치 ‘단두대 앞으로 나오라’는 소리 같더라고요. ‘실패자’라는 낙인이 찍히는 기분이었죠. 누가 알아볼까 봐 그러잖아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 갔는데 이름이 불려 선서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어요. 평생 처음으로 머릿속이 하얘졌죠. 선서가 끝나고 화장실로 가서 토했던 기억 밖에 안 나요. 그래도 어떤 의미에서는 전환점이 되긴 했죠.”


-자신을 변화시킨 계기가 됐나요.


“더 이상 내려갈 데가 없는 곳에 있다는 걸 깨달았죠. 매번 여기가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그 지하에 지하가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는 ‘여기가 더 내려갈 데가 없는 지하구나’ 싶었어요. 그날 이후로는 더 떨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사라졌죠.”


-그때 선서가 그 정도로 상처가 된 이유가 뭘까요.


“그래도 그간 ‘남의 인생을 낫게 만드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으로 살았는데, ‘너도 별수 없는 사람’이라는 인증, 공개 처형을 당하는 기분이었어요. 빚쟁이로 살면서 했던 가장 큰 걱정이 ‘누가 EBS 앞에 가서 1인시위라도 하면 어쩌나’였어요. 그게 죽기보다 싫더라고요.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는데, 그보다 더한 수치를 당한 거죠. 어떤 의미에서는 그날 죽은 거예요. 마지막까지 내가 부여잡고 있던 자존심이 죽은 거니까. 나중엔 되레 마음이 편해지더라고요.”

[실패④] 엄습한 건강의 위기

한국일보

“인생은 결국 투 트랙으로 가는 거더라.” 그가 지난달 낸 책을 들어 보였다. 그는 “실패를 통해 조금 먼저 알게 된 것들을 담았다”고 말했다. 최주연 기자

-거기다 2011년엔 대장암까지 발병했어요.


“의사가 ‘초기다. 그래도 수술은 해야 한다. 항암치료를 할지 말지는 수술해보고 판단해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망치로 맞은 기분이었죠. 하긴 그렇게 몸을 갈아서 일을 했으니 걸린 게 당연하죠. 아내와 병원에 갔는데 머리가 띵해져서 진료실을 나왔어요. 수납창구에서 계산을 하고 돌아섰는데, 곧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던 아내가 갑자기 뒤돌아서서 이렇게 묻는 거예요. ‘저…, 현금영수증 되나요?’ 제가 그 말에 웃음을 터뜨렸죠.”


-어떤 생각이 들어서 웃었나요.


“아내는 정신 줄 안 놓은 거잖아요. 나는 놓고 있었거든요. 아내가 존경스럽더라고요. 나중에 그 일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생각했죠. ‘울면서 가더라도 가면서 울자. 그렇게 투 트랙으로 살자’고.”


수술을 성공적으로 마쳤고 그도 회복했다. 얄궂게도 건강의 위기는 그로부터 11년 뒤인 지난해 초 또 찾아왔다. 간질성 폐질환이 발병한 것이다. 악화하면 폐가 섬유화될 수 있는 병이다.


-그때 충격이 더 컸을 것 같아요.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도 이번엔 2, 3일 만에 정신을 차렸어요. 저는 한 번 싸워봤잖아요. 참전 용사잖아요. 간질성 폐질환은 이유가 셀 수 없어요. 사람마다 다르고요.”


그는 강원 양양군에 거처를 구했다. 양양은 미세먼지 적고 공기가 맑기로 유명한 곳. 그때부터 그는 몸 상태에 영향을 미칠 만한 모든 요소를 데이터로 만들어 몸의 반응과 함께 매일 기록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어떤가요.


“더 이상 진행되지 않고 깨끗하대요. 알고 보니 저는 소독제, 살충제, 방부제 같은 성분에 반응하더라고요. 그런 요소를 11개 발견했죠. 그 요인을 철저히 피하면서 살고 있어요.”


그의 환한 미소가 안심이 됐다.


-사업이라면 지긋지긋할 만도 한데 8년 전 또 창업을 했어요.


“생계를 꾸려야 하니까요. 이제는 예전처럼 몸으로 뛰는 강의를 할 수도 없고요. 사업 실패로 배운 원칙을 토대로 재미있는 일을 해보고 싶어 시작했죠. 그 원칙이 무점포, 무자본, 무차입, 무투자예요. 무점포로 시작했지만, 이제 안정이 돼서 사무실을 마련했죠.”


사다리필름은 기업의 사내 교육영상이나 제품 홍보영상을 제작한다. 영상기획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 사업도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하는 일이 결국은 ‘번역’이라고 했다. “제품이 지닌 기술이나 효용을 설명하는 기술 언어, 기능 언어는 공급자 언어예요. 우리는 공급자 언어를, 대중이 알아듣고 필요를 느끼도록 가치 언어, 유혹 언어 같은 소비자 언어로 번역하는 거죠. 제가 만든 설명이에요.”

[실패란] 백 퍼센트의 실패는 없다

한국일보

사다리필름은 그가 30대에 경험한 사업의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바탕으로 만들었다. 사무실 곳곳에서 업무를 하거나 직원과 대화하는 그의 모습을 한 장에 담았다. 이 사진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사진 네 컷을 분할해 한 장으로 합성한 것이다. 최주연 기자

-요즘은 어떤가요.


“이제 회사가 재무적으로도 단단해져서 평생 처음으로 공과금 걱정, 대출 이자 걱정, 직원들 월급 걱정 하지 않고 살고 있어요.”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성공의 시기와 실패의 시기가 언제였나요.


“음, 평생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가 함께 있었던 것 같아요. 얼굴이 알려지는 데는 성공했지만, 사업은 계속 실패했죠. 그 빚을 다 갚았지만, 빚 갚느라 너무 고생해서 암에 걸렸고요. 지하에서 이제 땅 위로 올라왔나 보다 했더니 간질성 폐질환에 걸렸어요.”


-그런 시간이 내게 준 것은 뭘까요.


“나를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바라보지 못했는데 열정은 지나쳤죠. 그러니 당연한 귀결로 사업에 실패한 거예요. 그런데 그 기간 덕분에 확실히 똑똑해진 것 같아요. 고난이 결국 겸손을 주고, 겸손한 사람이 똑똑해지나 봐요. 자신을 극사실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니까. 멋있게 말하면 지혜가 생겼다는 거고요.”


-실패라는 단어의 정의를 새롭게 쓴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요.


“실패를 통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배울 수 없다. 실패의 시간을 지나오면서 인생에서 쓸데없는 걸 걸러낼 수 있었거든요. 그래서 백 퍼센트의 실패란 없어요. 그리고 이걸 알게 됐죠. 게임과 인생을 헷갈리지 말자.”


-무슨 뜻인가요.


“대입? 사업? 이런 건 게임이에요. 가족이나 가까운 친구와의 관계, 이건 게임이 아니라 인생이죠. 게임에서 실패한 걸 인생에서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불행해져요. 그 둘을 착각하면 안 돼요. 내가 실패했던 건 다 게임에서였어요. 게임에서 실패한 순간에도 전 인생에선 괜찮았거든요. 살 만했고 감사했어요.”


-인생에서 부닥친 실패의 경험들로 얻은 삶의 도는 뭔가요.


“생긴 대로 살자! 살아보니까 내가 나였을 때 나는 일어났거든요. 한때는 내가 이렇게 생긴 걸 원망하고 저주하고 고치려고도 했죠. 그런데 나를 일으켰던 건 결국 나였어요. 생긴 대로의 나. 그래서 제일 잘했다고 생각하는 일이 안 죽은 것. 안 죽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어요.”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사다리 삼아 딛고 올라선 그의 반가운 깨달음이다.


김지은 선임기자 luna@hankookilbo.com

2023.08.28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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