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 절도마저도 용서가 된다…‘99억의 여자’ 빚는 조여정

[컬처]by 중앙일보

[민경원의 심스틸러]

부모·남편·자식 복 없는 여자 정서연

벼랑 끝 현실서 돈다발 99억 손에 넣어

눈빛에 힘빼고 조용히 긴장감 유발해

‘기생충’ ‘방자전’과는 또다른 매력 자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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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KBS2 수목드라마 ‘99억의 여자’에서 정서연(조여정)은 현금 99억 앞에서 구약성경 욥기 8장 7절 말씀을 나지막이 읊조린다. 일찍이 부모에게 버림받고, 아이까지 먼저 떠나보내고, 하나 남은 가족인 남편이라곤 걸핏하면 아내를 때리는 것도 모자라 냉동창고에 가둬버리는 등 기행을 일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눈앞에 현금다발이 나타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 더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서 모든 걸 끝내버리자고 체념한 순간 “살아남으라는 계시처럼 느껴졌다”는 대사처럼 그 돈은 “시궁창 같은 삶을 리셋할 수 있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하지만 애초에 교통사고 현장에서 발견한 깨끗하지 않은 돈이었기에 이는 서연을 더 깊은 수렁으로 몰고 간다. 돈다발의 진짜 주인이 포위망을 점차 좁혀오는 가운데 공범이자 유일한 친구(오나라)의 남편(이지훈)은 호시탐탐 돈을 빼돌릴 기회를 노리고, 두 사람의 불륜 사실과 돈다발의 존재를 알게 된 남편(정웅인)까지 가세해 그를 쫓는다. 돈보다는 사고를 둘러싼 진실에 더 관심이 많은 전직 형사(김강우)를 제외하면 주변이 온통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지뢰밭인 셈이다. 공범이 가져간 5억과 수고비로 떼준 1억을 제하면 현재 남은 돈은 93억. 보는 눈이 점점 많아지면서 과연 그중 얼마나 손에 쥘 수 있을지 모르는 상황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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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황당할 수 있는 설정이지만 무게감 있게 다가오는 건 조여정(38)의 몫이 크다. 그는 누구보다 절박한 상황에 처해있지만 도움을 청하거나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누군가를 원망하거나 분노하는 대신 조용히 현실을 직시하고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헤쳐나갈 뿐이다. “지금까지 넘어졌던 건 내 잘못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런 기회를 잡고도 일어나지 못하면 그건 내 잘못”이라는 마음가짐으로. 그래선지 그녀에게 함부로 손가락질하기도 쉽지 않다. 사고 현장에서 죽음을 방관한 것부터 절도ㆍ불륜 등 많은 죄목이 있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모색한 살기 위한 방법임을 저도 모르게 수긍하게 되는 것이다.


이따금 갈 곳을 잃은 듯 멍해 보이지만 결코 흔들리지 않는 눈빛도 인상적이다. 동생의 죽음을 파헤치는 김강우나 아이의 죽음을 책망하는 정웅인, 욕정을 탐하는 이지훈은 각기 다른 이유로 잔뜩 눈에 힘이 들어가 있지만 조여정은 완전히 힘을 풀었다. 덕분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통 알 수 없다. 다음 행동이 빤히 예측되는 캐릭터들 속에서 그만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튀어나간다. 극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안내하는 어려운 임무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는 셈이다. 극 중 가장 약자인 것 같으면서도 가장 단단해 보이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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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여정은 제작발표회에서 “영화 ‘기생충’의 연교와는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소개했지만 두 캐릭터는 묘하게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 ‘기생충’에서는 세상 물정 모르는 부잣집 사모님으로 사람을 너무 잘 믿는 게 문제였다면, ‘99억의 여자’에서는 청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하며 아무도 믿지 않을 만큼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두 작품 모두 그가 일상에 균열을 내는 장본인이기 때문. 과외교사를 시작으로 미술치료 교사ㆍ운전기사ㆍ가정부 등 기택의 가족을 집으로 불러들인 것도, 99억의 돈다발 앞으로 여러 사람을 끌어들인 것도 모두 그의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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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 제왕의 첩’ 등을 통해 섹시한 이미지를 얻게 됐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조여정의 트레이드마크인 생기발랄한 눈웃음을 걷어낸 자리에 그로테스크한 세계로 빨아들이는 힘이 숨겨져 있을 줄은 미처 몰랐다. 1997년 ‘쎄씨’ 모델로 연예계에 첫발을 딛고, ‘뽀뽀뽀’의 최연소 뽀미 언니로 활동하던 시절은 물론 1999년 시트콤 ‘남자 셋 여자 셋’ ‘나어때’ 등 연기를 시작한 이후에도 가장 큰 무기는 늘 사랑스러움이었으니 말이다. 어려 보이는 얼굴과 달리 글래머러스한 몸매를 드러낸 영화 ‘방자전’(2010), ‘후궁: 제왕의 첩’(2012) 등으로 재평가받긴했지만, 여전히 연기력보다는 매력이 우선이었다. 그는 배우로서 “겉으로 보이는 것 외에 이면이 있는” 캐릭터를 갈구했지만, 대중은 그를 오랫동안 직관적인 이미지로 소비해온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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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청룡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눈물을 쏟은 조여정은 연기를 ‘짝사랑’에 비유했다. “언제든지 버림받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절대 그 사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원동력 삼아” 묵묵히 걸어왔고, “앞으로도 정말 묵묵히 걸어가 보겠다”고 했다. 봉준호 감독은 영화 ‘인간중독’(2014)의 진지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조여정의 모습을 눈여겨보고 ‘기생충’에 캐스팅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드라마 ‘완벽한 아내’(2017)에서 선보인 겉과 속이 다른 사이코패스 연기가 없었으면 지금 ‘99억의 여자’도 없었을지 모른다. 정작 본인은 작품이 끝날 때마다 “돌이켜보면 아쉬운 것 투성”이라고 하지만 항상 새로운 시도에 열린 마음으로 임해온 덕분에 창작자들로 하여금 그 속의 또 다른 모습을 끄집어낼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해준 것이다.


여러 차례 연기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했던 그는 ‘성실함’이 자신이 가진 가장 큰 재능이라고 했다. 타고난 재능이 많지 않음에도 성실한 덕분에 지난 20여년을 버틸 수 있었단 얘기다. 한데 지금의 그를 보면 작품을 선택하는 안목이나 자신을 열어두는 유연함, 함께 작업한 동료들의 장점을 배우는 흡수력까지 고루 갖춘 듯하다. 천재는 노력하는 자를 이길 수 없고,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 했는데 그는 스스로 노력하고 즐기면서 자신을 끌어올리고 있는 셈이다. 이제 막 그의 전성기가 시작됐다면, 그 나중은 어디까지 창대해질까. 심히 궁금해진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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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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