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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정해인 걷고, 지성 달리고…
달라진 여행 예능 왜 안통할까

by중앙일보

뉴욕서 ‘걸어보고서’, 피렌체 마라톤 ‘런’

배우 앞세운 버킷리스트 실현 포맷 증가

저비용 고효율로 드라마 빈자리 채워

목적성 부합 못하면 되려 외면 받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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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부작 예능 ‘정해인의 걸어보고서’. 미국 뉴욕을 걸어서 여행하는 다큐멘터리를 표방한다. [사진 KBS]

화요일 밤에는 정해인이 카메라를 들고 미국 뉴욕의 구석구석을 걸어 다니고(KBS2 ‘정해인의 걸어보고서’), 목요일 밤에는 지성이 나와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달리기를 한다(tvN ‘런’). 최근 달라진 여행 예능 풍경이다. tvN ‘더 짠내투어’나 KBS2 ‘배틀 트립’ 등 기존 여행 프로그램들이 어떻게 하면 가성비 높은 여행을 즐길 수 있는지 팁을 공유하거나 방청객들의 투표로 승자를 가리는 대결 구도에 집중했다면, 배우들을 앞세워 버킷리스트 완성이라는 새로운 임무를 부여한 것이다. 이를 완수하기 위해 이들은 부지런히 걷고 달린다.


영화와 드라마 촬영 스케줄로 일정이 빡빡한 배우들의 예능 나들이가 잦아진 이유는 간단하다. 여행 예능 특성상 제작 기간이 짧고, 일주일 남짓한 기간 동안 촬영하고 나면 1~2달 정도 방영할 수 있는 ‘저비용 고효율’이 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이다. 지난해 비용 절감을 위해 한시적 드라마 제작 중단을 선언한 지상파 3사가 일제히 배우 카드를 만지작거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SBS 역시 수목드라마 시간대에 ‘이동욱은 토크가 하고 싶어서’ 등을 편성하면서 반전을 꾀했다. 통상 한번 시작하면 지속적으로 운영되는 토크쇼와 달리 12부작으로 종영 시점이 정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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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에서는 지성, 강기영, 황희, 이태선 등 4명이 이탈리아에서 열리는 마라톤에 도전한다. [사진 tvN]

출연진 입장에서도 부담감이 덜한 편이다. 앞장서서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야 한다는 부담감이나 억지로 웃겨야 한다는 압박감에서 벗어나 친한 동료들과 함께 여행하면서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걸어서 세계 속으로’ 예능판을 표방하며 PD로 나선 정해인이 평소 친분이 두터운 배우 임현수나 모델 은종건 등을 동행으로 선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지성은 강기영ㆍ황희ㆍ이태선 등 작품을 함께 하며 인연을 쌓아온 배우들과 러닝 크루를 결성했고, 지난해 방영된 tvN ‘시베리아 선발대’ 역시 이선균을 주축으로 김남길ㆍ이상엽ㆍ고규필ㆍ김민식 등이 모여 기차로 러시아 횡단에 도전한 케이스다.


나영석 PD가 tvN ‘꽃보다 할배’를 시작으로 ‘삼시세끼’ ‘윤식당’ ‘스페인하숙’ 등 배우 중심의 예능을 론칭해 잇따라 성공을 거두면서 심리적 장벽이 낮아진 것도 한몫했다. 프로그램 콘셉트만 분명하면 예능 출연이 작품 활동에 방해가 되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심지어 이서진ㆍ차승원ㆍ유해진 등은 여러 편에 연이어 등장하고 있지만 하나의 시리즈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류준열과 이제훈이 쿠바로 떠났던 JTBC ‘트래블러’도 다음 달 강하늘·안재홍·옹성우가 아르헨티나 여행기를 담은 시즌 2를 준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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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기차로 러시아 횡단에 도전한 예능 ‘시베리아 선발대’.[사진 tvN]

한 방송사 편성 관계자는 “종편과 케이블의 자체 제작 프로그램이 많아지면서 한 주간 방영되는 예능만 50~60편에 달한다”며 “일부 예능인의 겹치기 출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배우를 기용하면 신선함과 화제성을 동시에 얻을 수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방송사 홍보 관계자는 “장르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드라마냐, 예능이냐 하는 장르의 차이보다 개별 콘텐트가 갖춘 경쟁력이 더 중요해진 것 같다”고 말했다.


TV가 아닌 모바일로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생긴 현상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여러 명이 단체로 나와 시끌벅적하게 하는 것보다 한 사람씩 내밀한 의사소통이 가능한 구조가 모바일의 속성과 부합한단 얘기다. 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는 “마라톤 대회 참가처럼 공통의 미션을 수행하는 등 소재적으로 차별화를 꾀하면서 개개인에 대한 집중도를 높여 시청자와 보다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며 “정해인처럼 젊은 층에서 인기가 높은 연예인일수록 더 모바일에서 더 큰 화제를 모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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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 학교’. 하정우가 교장을 맡고 있고, 황보라가 실무 운영을 담당한다. [사진 유튜브 캡처]

실제 웹예능에서는 이 같은 포맷 개발에 더욱 적극적이다. 라이프타임은 ‘김소현의 욜로홀로 캘리포니아’를 시작으로 ‘정은지의 시드니 선샤인’ ‘김재중의 트래블버디즈’ 등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에이앤이 네트웍스의 소영선 한국 대표는 “한 사람에 집중하다 보면 기존에 다른 방송에서 볼 수 없었던 진솔한 모습을 보다 깊이 보여줄 수 있다”며 “자막도 많이 필요하지 않아 국내보다 해외 반응이 더 좋은 편”이라고 설명했다. 남다른 걷기 사랑으로 2015년 ‘걷기 학교’를 세운 하정우는 지난해 동명의 유튜브 채널을 개설하고 황보라ㆍ주지훈 등과 함께 찍은 영상을 올리고 있다.


하지만 시청률은 1~2%대로 저조한 편이다. 최근 몇 년간 걷기와 달리기 등 일상에서 할 수 있는 운동이 부상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예능으로서 효용 가치는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김교석 대중문화평론가는 “여행 예능은 가장 경쟁이 치열한 분야 중 하나인데 ‘정해인의 걸어보고서’처럼 별다른 준비 없이 8일간 촬영해 8회에 걸쳐 내보내는 것은 너무 안일한 기획”이라고 지적했다. 뉴욕은 배경화면에 그칠 뿐 정해인 개인의 매력에 모든 것을 기대는 구조인 탓이다. 김 평론가는 이어 “여행의 목적성이 뚜렷하지 않으면 시청자들에게 외면받기 십상이라며 ‘런’ 역시 단순히 대리 체험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이 뒷받침 돼야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