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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슈 ]

탱크로리 사고 본 순간, 아버지는 일부러 핸들을 꺾지 않았다

by중앙일보

30년 베테랑 운전사 옥수수 싣고 가다 사고

추돌 순간 핸들 꺽지 않고 탱크로리 부딪혀

유족 “승용차 탑승자 피해 줄이려 했을 것”

도로공사 제설 해명에 “스키 타듯 미끄러져”

중앙일보

18일 전북 남원시 사매면 순천-완주고속도로 사매2터널 연쇄추돌 사고현장에서 현장감식 조사관들이 곡물 수송 화물차량 아래를 살펴보고 있다. 프리랜서 장정필

“제주도 땅 한 번 밟아본 적 없으세요. 여름 휴가 때 처음으로 비행기 태워드리려 했는데….”


18일 오후 전북 남원시 남원의료원 장례식장에서 만난 박모(34)씨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휴대전화만 들여다봤다. 휴대전화에는 35초(2월 5일)의 짧은 통화내용이 있었다. 박씨는 “이게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통화가 됐네요. 안부만 간단히 여쭤봤어요. 평소 더 잘 해드리지 못한 게 자꾸 생각나서 가슴이 아픕니다”라고 말했다.


박씨는 전날 낮 12시 20분쯤 완주-순천 간 고속도로 사매2터널에서 발생한 연쇄 추돌사고로 숨진 곡물 트럭 운전사(58)의 큰아들이다. 박씨는 “아버지가 외국을 한 번도 가보지 못하셔서 올여름 가족과 함께 필리핀 세부로 여행을 갈 계획이었다”며 “평생 자식 뒷바라지하느라 고생한 아버지께 준비한 선물이었는데 이제 할 수 없게 됐다”고 울먹였다.


운전사 박씨는 플라스틱 소재 원료를 실은 탱크로리 차량을 들이받고 현장에서 가까스로 구조됐지만, 병원 이송 후 목숨을 잃었다. 경찰은 운전사 박씨가 1차 추돌사고의 충격으로 숨진 것인지, 질산을 실은 탱크로리 차량 가스 누출로 인해 사망한 것인지를 밝히기 위해 부검을 의뢰했다.

중앙일보

지난 17일 낮 12시 23분께 순천~완주 간 고속도로 상행선 남원 사매 2터널에서 탱크로리가 쓰러져 화재가 발생, 차량 수십 대가 잇따라 추돌했다. CCTV에는 사고 당시 빙판길에 미끄러진 트레일러 등 차량 6~7대가 터널 내 1·2차로에 뒤엉킨 모습이 포착된다. [연합뉴스]

인천에 사는 박씨는 30년 경력의 베테랑 운전사였다. 매일 새벽 인천항에서 곡물을 싣고, 사료 회사가 있는 경기도 평택과 전북 남원을 오가며 짐을 날랐다. 사고 당일에도 평소처럼 오전 2시에 집을 나섰다. 인천항에서 물건을 떼서 평택에 옮긴 뒤, 남원에서 옥수수 등 곡물을 싣고 오후 3시까지 인천으로 돌아오는 일정이었다.


박씨의 처남 최모(53)씨는 “사고 소식을 접하고 매형이 아니길 빌었다”며 “반복적으로 다니던 길인 데다 시속 90㎞ 이상 속도를 내지 않는 평소 운전 습관으로 미뤄 크게 다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씨는 화물 트럭뿐만 아니라 자신이 몰던 그랜저 승용차도 평소 시속 90㎞ 이하로 운전했다고 한다.


유가족은 터널 안에 설치된 폐쇄회로TV(CCTV) 영상을 보고 나서야 박씨가 숨진 이유를 짐작했다. 사고 영상에는 정체된 터널 안에서 질산을 실은 트레일러가 전복된 뒤 탱크로리 차량이 추돌한다. 곧이어 박씨의 트럭이 탱크로리 후면 좌측을 들이받고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다. 큰아들 박씨는 “마지막 순간 아버지가 자신만 살겠다고 핸들을 크게 꺾었다면 옆 차로에 있던 승용차를 덮쳐서 더 큰 사상자가 나왔을 것”이라며 “트럭 조수석 쪽을 탱크로리에 부딪혀 피해를 최소화하려 했지만, 폭발이 발생하는 바람에 충격을 입으신 것 같다”고 했다.


1남 2녀를 둔 운전사 박씨는 자상한 가장이었다. 주말에는 조기 축구와 족구를 즐기고, 손자들과 주로 시간을 보냈다. 술은 거의 마시지 않았다고 한다. 한 유족은 “장시간 운전을 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 체력관리를 꾸준히 해 왔다. 운전 일을 하는 동료들이 힘든 일을 겪을 때마다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기도 했다”고 말했다.


박씨의 유족은 사고 구간 제설 작업이 제대로 이뤄졌는지 의문을 갖고 있다. 한국도로공사는 사고 발생 30여분 전인 17일 오전 11시 56분쯤 제설차를 이용해 사고 터널에 염수와 제설제를 살포했다고 밝혔다. 운전사 박씨의 처남 최모씨는 “제설 작업을 제대로 했다면 트럭이 미끄러지지 않아야 한다”며 “매형이 탱크로리에 부딪히기 전 사고를 직감하고 이미 비상등을 켜고,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트럭이 스키 타듯이 미끄러진 걸 보면 터널에 결빙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경찰관계자는 “사고 이전에 제설작업을 했더라도 당시 워낙 많은 양의 눈이 내리고 있어서 길이 미끄러워졌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박씨의 큰아들은 사고 당시 운전사 박씨를 사고 현장에서 꺼내 준 시민을 찾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트럭에서 나왔을 때 부상자 중 한 명이 아버지를 업어서 구급대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줬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그분을 찾는다면 꼭 감사 인사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남원 사매터널 추돌사고로 지금까지 5명이 숨지고 43명이 부상을 입었다. 경찰과 소방,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18일 합동감식을 하고 사고 원인을 조사하고 있다.


남원=최종권·진창일 기자 choigo@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