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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연극적이고 유머가 있는 그림"...최석운 작가의 현대 풍속화

by중앙일보

갤러리나우, '화려한 풍경'개막

보통 사람들 '웃픈' 현실 그려

중앙일보

최석운, '진달래' 112x145cm ,Acryllic on canvas,2019~20.[사진 갤러리나우]

흐드러지게 핀 진달래 꽃 무리 앞에서 연인이 서로를 꼭 끌어안고 셀카를 찍고 있다. 휴대전화 카메라에 고정된 두 사람의 시선이 자못 결연해 보인다. 지금 아름다운 이 풍경도, 우리 사랑도 놓치지 않으리라, 우리 영원하리라 다짐하는 듯하다. 하얀 구름이 무심하게 흩어져 있는 하늘 아래 새 한 마리가 꽃나무 가지 않아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서양화가 최석운(60)의 신작 '진달래'가 보여주는 봄 풍경이다. 화면을 잘 들여다보면 꽃보다 더 이글거리는 진달래 나뭇가지가 보이고, 푸른 아이섀도부터 빨간 립스틱까지 한껏 꾸민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그래, 봄이구나, 짧게 스쳐 지나갈 봄이구나." 나이 60을 앞둔 작가가 연인을 보며 말하는 듯하다.


'우리 시대의 풍속화가' 최석운의 개인전 '화려한 풍경'(Splendid Scene)이 서울 강남구 신사동 갤러리나 우에서 열리고 있다. 코로나 19 확산에 대한 우려로 공연과 전시 등 모든 문화 행사가 얼어붙은 가운데 작가는 10일 전시 개막을 밀어붙였다. "주변에서 괜찮겠냐고 하더라. 하지만 난 조금도 고민하지 않았다. 5년 만에 서울서 큰맘 먹고 여는 전시를 포기할 수 없었다"는 그는 "그림에 대해 원점부터 다시 고민하며 작업해온 신작을 종용하게나마 풀어보고 싶었다"고 말했다.

익살스럽고 처연한

80년대 후반 활동을 시작한 최석운 작가는 우리 시대 소시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해온 작가로 꼽힌다. '파리 잡는 남자' '에어로빅' '고추 따는 노인' '지하도' '옥상' 등의 제목으로 한 그의 작품엔 그가 일상에서 본 사람과 주변 풍경이 고스란히 화폭으로 녹아 들어가 있다. 그냥 들어간 게 아니다. 일그러진 얼굴로 노래방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양복 차림의 남자('노래 부르는 남자')처럼 친근하면서도 한편으론 민망하고, 우스꽝스럽고, 처연한 풍경으로 재현됐다.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우리 시대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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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운, 'Horse Riding', (259x193.9cm, Acrylic on canvas, 2019-20).[사진 갤러리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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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운, '두 남자', (162.2x130cm, Acrylic on canvas, 2018-29).[사진 갤러리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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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운, 'Subway'. (153x195cm, Acrylic on canvas, 2018). [사진 갤러리나우]

이번 전시에 선보인 작품들도 주제 면에선 그 연장선에 있다. 'Horse Riding(승마)'이란 작품에서 그는 실내에서 머리에 헤어롤을 잔뜩 말고 무표정한 얼굴로 승마 운동기구 위에 앉아 있는 중년 여성을 보여준다. 말쑥한 양복 차림에 심각한 표정으로 귓속말을 주고받는 두 남자('두 남자'), 지하철 플랫폼 벤치에 서로 얼싸안고 '당당하게' 앉아 있는 젊은 연인과 그 끄트머리에 겨우 엉덩이를 걸친 중년 남녀의 무표정한 모습('Subway') 이 보는 이의 웃음을 자아낸다.


최석운 작가를 지켜봐 온 김민숙 소설가는 일찍이 그를 가리켜 "우리 화단에서 드문 이야기꾼"이라고 부른 바 있다. "그의 그림에는 보는 이에게 장면의 겉과 속,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 상상하게 하는 이야기가 있다. 모두가 어딘가에서 맞닥뜨린 것이지만 너무나 익숙하게 보던 그것들이 최석운이라는 렌즈를 통과하면 특별하고, 새삼 새롭고, 재미있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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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운, '도착4', (53/5x45.5cm,Acrylic on canvas, 2018). [사진 갤러리나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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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석운. '화려한 풍경' (130x97cm, Acrylic on canvas, 2019). [사진 갤러리나우]

그러나 작가는 그 자리에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50대 중반을 넘어서며 "지난 4년 동안 그림 그리기가 무서웠다"고 털어놓았다. "계속 습관적으로 반복된다는 생각이 참을 수 없었다. 거의 2년간 작업할 수 없었다"는 그는 "지우고 싶은 그림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 내놓은 작품들은 그 "힘든 시기"를 지나 다시 붓을 쥐고 그린 것들이다. "2년 전 어느 날 제주도에 들어온 난민 이야기를 접하며 나 자신을 돌아봤다. 가족까지 거느리고 살던 터전을 떠나 격랑을 헤치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온 사람들의 처지가 나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도착'이라는 제목으로 어느 섬에 도착한 가족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딘가에 당도한 그림 속 사람들 얼굴엔 표정이 없다. 어딘가에 도착은 했지만, 불안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미묘한 표정이다. "정착하지 못하는 것이 삶의 연속이고, 우리 삶이란 그 현실에서 해결해야 할 고민과 숙제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

"항상 중요한 것은 가까이에 있다고 믿는다"는 작가는 "일상에서 소재를 찾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번 신작은 전작들과 비교할 때 많이 달라졌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이순심 갤러리나우 대표는 "신작에선 사람의 이미지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다. 작가의 관심은 항상 자신을 포함한 '사람들' 그 자체였다"면서 "그는 이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을 이렇게 그려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하나하나의 이미지에 집중했다"는 그는 "작품이 달라졌다는 게 작가에게는 위험한 일일 수도 있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몇 점을 그릴지 몰라도 그리고 싶은 만큼 눈치 보지 않고 쏟아내고 싶다. 이게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고충환 미술평론가는 "최석운 작가의 그림은 보통 사람들의 삶을 테마로 한 상황극처럼 연극적이고 서사적인 부분이 있다"면서 "치열하고 공허한 삶을 향한 작가의 시선에 유머가 있고 위트가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존재론적 연민이 있다"고 말했다. 전시는 30일까지.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