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여성 형사 박미옥이 말하는 ‘형사의 시간들’[플랫][이진주의 finterview]

[라이프]by 경향신문

“ ‘최초’는 외로운 단어잖아요. 당시에는 여형사가 없으니 어떤 형사가 되어야 하는지를 고민했던 거 같아요. 사건만 보고 갔는데 다양한 길이 만들어진 거죠.”


한국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형사이자 국내 여자 경찰의 역사를 새롭게 쓴 박미옥 전 경정(55)이 33년 경찰 인생 기록을 담은 <형사 박미옥>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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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정년을 7년 남겨둔 2021년 제주 서귀포에서 형사과장을 끝으로 명예퇴직했다. 현재는 제주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서울 마포구 합정동에 있는 카페에서 지난 17일 만난 박씨는 “30여년간 쌓여온 내상을 말끔히 밀어내고 회복하기 위해 책을 쓰기 시작했다”며 “수년이 지났어도 (사건의) 아픔은 여전했고 결국 쓸 수 없는 이야기들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름 앞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최초 여성 강력반장’ ‘최초 여성 마약범죄수사팀장’ ‘최초 여성 강력계장’ 등을 맡았다.


1987년 순경 공채 시험에 합격해 경찰생활을 시작한 박씨는 교통순찰대와 민원실 업무 등을 했다. 1991년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여성 대상 범죄 수사를 전담시키려 여성형사기동대를 출범하면서 한국 경찰 역사상 첫 강력계 여형사로 선발됐다. 여성 형사 21명이 현장에 투입됐지만, 1~2년 만에 모두 다른 부서를 지원해 떠났다. 남은 사람은 박씨뿐이었다.


첫 출동 현장은 여성 전용 사우나였다. 여성 형사가 전무했던 당시 사우나는 여성 도박꾼들이 경찰 눈을 피해 판을 벌이기 좋은 장소였다. 그는 알몸 여성들 사이에서 도박판 운영자들을 검거했다.


박씨는 “여성이라는 소수자 위치, 순경 출신이라는 (부정적) 시선도 있었지만 그럴 때일수록 저만 바라보는 피해자들을 보며 사건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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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 박미옥

여성이라는 이유로 겪는 차별적 시선에도 그는 당당히 맞섰다. 짧은 머리인 박씨는 ‘보이시하다’ ‘시집은 안 가냐’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들었다. 박씨는 “그때마다 ‘보이시함은 산업재해고, 시집은 제 집이 있어서 안 갔다’고 대꾸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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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교도소 출신 납치범 검거, 탈옥수 신창원 검거 등에 이바지한 공로로 그는 순경에서 경위까지 9년 만에 초고속 승진을 했다. 2000년대 중반에는 연쇄살인범 유영철·정남규 사건, 2008년 숭례문 방화 사건 화재현장 감식, 2010년 한강변 여중생 살해·시신유기, 2011년 만삭의사 부인 살해 등 각종 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범죄 현장에서 본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고 아팠다고 박씨는 고백했다.


“형사가 된 1년차에 그만두고 절에 들어가고 싶었어요. 세상의 욕망을 들여다보는 일이 힘들었고 형사로서도 역부족을 느꼈죠. 제대로 하고 떠나자는 다짐을 하고 한 건 한 건 해결하는 사이에 사건이 저를 성장시켰고 진짜 형사로 만들어줬어요.”


드라마 <시그널> <괴물> <미세스 캅>, 영화 <감시자들> 등의 작품에 나오는 사건들은 모두 그가 수사했던 것들로, 박씨가 현장과 사건 등에 대해 자문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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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널> 모티브가 된 사건이 방송에서는 해결된 것으로 나오지만 실제론 해결이 안 됐죠. 아직도 그 사건에 관여했던 후배 형사는 술만 마시면 전화를 해요. 형사들은 미제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후회를 가지고 살 수밖에 없어요.”


범죄를 접할수록 사람에 대해 궁금해진 박씨는 심리학과 프로파일링을 공부했다. 이후 대학원에서 법의학 분야를 전공했다. 그는 “형사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해야 하고 수사란 결국 사람을 구체적으로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며 “애정 없이 범인을 잡는 일에만 성취감을 느낀다면 형사가 아니라 사냥꾼”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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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가 명예퇴직을 한 데 대해 아쉬워하는 동료도 많다. 하지만 그는 “50대에도 살인자나 범죄자 이야기만 하고 싶지 않았다”며 “체력과 마음의 호기심이 남아 있을 때 그만두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여행자 같은 마음으로 살고 싶어 제주 구좌읍 하도리에 집을 짓고 후배 여자 경찰과 살고 있다. 마당 한쪽에 서재 겸 지인들이 찾아와 책을 읽고 쉴 수 있는 책방을 꾸몄다. 커피콩을 볶고 글을 쓰며 꾸준히 무언가를 하는 할머니로 늙고 싶다는 그는 10년 후 많은 사람과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죽음 앞 카페’를 운영하고 싶다고 했다.


“앞으로는 이 공간에서 ‘현장이 된 사람’보다 ‘현장이 되기 전 사람들’을 만나 서로를 위로하고 희망을 나누고 싶습니다.”


▼이진주 기자 jinju@khan.kr


플랫팀 기자 areumlee2@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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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1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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