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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창고’…홍콩 삼수이포

by경향신문

홍콩 삼수이포

 

1950년대 난민들 살던 판자촌, 서민 주거지와 공단이 들어섰고

이젠 도심 재생으로 거듭난 곳, 모여드는 사람들도 다양하다


전철역 번화가엔 거대한 시장, 굽고 찌고 볶는 냄새에 홀리고

차슈 덮밥 새우완탕 가게에서 결국 지갑을 열게 된다


부드럽고 홀랑홀랑한 ‘창펀’, 육즙의 향연 ‘옌퐁 만두’

달콤한 밀크티와 타르트… 가격도 매우 착해서 행복하다


골목 가게들이 문을 닫는 밤, 비로소 문을 여는 노천식당들

63년 전통 ‘오이만상’에 들러 이국적 맛과 분위기에 취해보자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창고’…홍콩

삼수이포엔 온갖 물건이 오가는 시장부터 젊고 개성있는 예술가들의 공방, 싸고 맛있는 식당까지 ‘진짜 홍콩’을 보여주는 매력적인 장소가 넘친다. 밤마다 상점가에 들어서는 노천식당 다이파이동(작은 사진)도 놓쳐선 안될 방문지다.

때로, 낯선 도시를 가장 빠르게 파악하는 방법은 지하철 노선도 안에 있다. 홍콩 전철 MTR의 11개 노선 가운데 츤완 라인(Tsen Wan Line)은 홍콩 섬과 구룡반도를 남북으로 잇는 최초의 노선이었다. 영국군이 처음 상륙했던 센트럴(Central)부터 20세기 중반 서민들의 주거 지역으로 개발된 신계(New Territories)까지, 한 줄의 빨간 선은 홍콩 근대사를 고스란히 관통한다.


당신이 홍콩을 한 번이라도 여행해본 적 있다면 츤완 라인 아래쪽의 몇몇 역명은 제법 낯익을 것이다. 센트럴역과 애드미럴티역 인근에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홍콩의 현대적 이미지가 도열해 있다. 은빛 마천루와 빅토리아 양식의 옛 건물들, 미쉐린(미슐랭) 스타 레스토랑, 거대한 명품 쇼핑몰은 언제나 인파로 가득하다. 빅토리아 하버의 푸른 물결 아래를 지나 전철이 구룡반도에 상륙하면, 또 하나의 명성 높은 여행지 침사추이(Tsim Sha Tsui)가 나타난다. 침사추이에는 청킹맨션, 격렬하게 깜빡이는 중국어 간판, 색 바랜 고층 빌딩들이 있다. 1990년대 홍콩 영화가 품었던 불온한 매혹과 재회하고 싶다면 이곳에서 하차해야 한다. 침사추이의 북쪽, 독특한 전통 시장으로 한 세기 전부터 관광객들을 끌어당긴 몽콕(Mong Kok)역에서 열차가 또 한 번 멎는다. 대부분의 여행자에게 익숙한 지명은 여기까지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몽콕보다 더 깊은 내륙을 안내하는 가이드북은 드물었다. 나는 이제 그 미지의 영역에 들어설 것이다. 문이 닫히고 기차가 다시 움직인다. 몽콕역에서 두 정거장이 더 지난 후 마침내 오늘의 목적지 삼수이포(Sham Shui Po)역에 도착했다.

진짜 홍콩을 만나다, 삼수이포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창고’…홍콩

홍콩은 여전히 장궈룽(장국영)의 도시다.

삼수이포가 여행자들에게 더 일찍 알려지지 않았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1950년대 이곳은 홍콩으로 망명 온 중국 난민들을 수용하던 판자촌이었다. 높은 인구밀도와 빈곤, 낙후된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20세기 중반 홍콩 최초의 공공 임대주택 메이호 하우스(Mei Ho House)가 건설되었지만, 몇 해 지나지 않아 화재로 건물이 소실됐다. 역설적이게도 이 사고가 홍콩 정부의 주거 복지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메이호 하우스의 잿더미 위로 거대한 규모의 공공 주택이 다시 올라섰고, 이후 삼수이포는 홍콩 서민들의 주거지이자 공업 단지로서 역사를 이어왔다. 이곳 주민들에게 삶은 단 한 번도 녹록한 적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삼수이포는 홍콩의 어느 지역보다 선명하고 희귀한 매력으로 약동한다. 전철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번화가에는 거대한 시장이 흐른다. 관광객이 모여드는 몽콕 시장에 비해 삼수이포에서는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물건을 구할 수 있다. 신선한 식재료부터 색색의 가죽, 전자제품까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좌판 위 물건들만큼 다채롭다. 교복을 입은 10대 소년들, 독특한 옷감을 사러온 패션 디자이너, 저녁거리를 흥정하는 노인이 같은 거리를 횡단한다. 현지인들로부터 사랑받는 거리에 싸고 맛있는 식당이 가득하다는 건 당연한 진리다. 삼수이포의 중심가를 걷다 보면 걸음이 한없이 느려진다. 굽고 찌고 볶는 냄새가 발길을 끊임없이 붙든다. 그러다 보면 입안에 맑은 침이 흥건하게 고인 채 결국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차슈덮밥이나 탱글한 새우완탕을 파는 노점 앞에서 지갑을 열게 되는 것이다. 힘겨운 일상 속에서도 삶의 기쁨을 찾고야 마는 사람의 의지는 삼수이포의 골목마다 활기차게 흐른다.


21세기를 지나며 삼수이포의 오늘은 한층 다채로워졌다. 도심 재생 사업으로 예술 학교와 아티스트 스튜디오가 지역 곳곳에 들어섰다. 북구룡 법원의 웅장한 건물은 디자인학교(SCAD)로 탈바꿈했고, 버려진 채 방치되던 공장 건물은 예술가들의 레지던시(JCCAC)로 거듭났다. 자그마한 독립 갤러리와 젊은 장인들의 공방, 감각적인 카페가 뒤이어 들어섰다. 아직 이곳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은 먼 이야기처럼 보인다. 골목의 노포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거리의 역사와 에너지 또한 굳건하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창고’…홍콩

홍콩섬과 구룡반도를 잇는 전철 츤완라인(붉은 색)에는 제법 낯익은 역이 많다. 삼수이포는 몽콕에서 두 정거장 더 내륙으로 가야 한다.

결국 진정 흥미로운 여행지들이 그렇듯, 삼수이포의 매력은 몇 개의 단어로 요약하기 어렵다. 이곳을 만끽하려면 어지러운 자극들에 둘러싸인 채 여행의 촉각을 잔뜩 곤두세워야 한다. 그 일은 조금 번거롭거나 불편할지도 모른다. 영어가 적힌 메뉴를 넘겨받는 대신 표정과 손짓을 요란하게 동원해 요리를 주문해야 한다. 그러나 한 그릇에 3000원 남짓한 가격으로 홍콩 최고의 물냉이 만둣국을 맛볼 수 있는 식당은 여기에만 있다. 21세기에도 신용카드가 통하지 않는 상점들에서 답답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조상에게 바치기 위해 종이로 만든 스마트폰 장식, 1980년대 광동 팝 레코드 컬렉션, 젊은 디자이너가 제작한 감각적인 가죽 가방을 전부 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삼수이포뿐이다. 뒷골목을 걷다 발견한 독립 갤러리의 전시를 돌아보고, 1960년대에 세워진 색색의 옛 건물들에 감탄한다. 번잡한 시장 너머 거짓말처럼 한적한 공원에서 장기 두는 노인들의 한 수를 구경한다. 그러다 해가 지면, 노천식당 ‘다이파이동’(Dai Pai Dong)에서 맥주와 함께 기막히게 맛있는 요리로 배를 채운다. 부지런하고 용감한 여행자들에게 삼수이포는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 창고나 마찬가지다. 혼자 맛본 보물들의 리스트를 살짝 공개한다.

노포와 노점에서 홍콩을 맛보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창고’…홍콩

옌퐁

‘창펀’을 싫어하는 홍콩 사람은 없다. 광둥 지역에서 유래한 창펀은 얼핏 떡처럼 보이지만, 쌀가루와 타피오카를 적절히 섞어 익혀내 그보다 훨씬 부드럽고 홀랑홀랑하다. ‘홉익타이’(Hop Yik Tai)는 오직 창펀만 파는 노점이다. 매일 아침 만든 신선한 창펀 위에 고소한 들깨소스와 간장, 매콤달콤한 스위트소스와 들깨를 뿌려준다. 입안을 비단처럼 감싸는 식감은 한 입 맛보면 잊기 힘들다. 한 접시 1500원에 불과하지만 미쉐린 빕 구르망 가이드에 소개된 바 있다.


‘옌퐁 만두 가게’(Yuen Fong Dumpling Store)는 겉보기엔 네온사인 하나 없는 낡은 점포에 불과하지만, 이곳의 군만두를 먹기 위해 홍콩 섬에서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다. 오전 나절 가게에 들어서면 바쁘게 만두를 빚고 있는 직원들이 보인다. 부추 고기 군만두는 바삭한 표면을 한 입 깨무는 순간 육즙이 사방으로 튀고, 물냉이 만둣국은 만두의 신선한 풍미와 생선수프의 감칠맛에 그저 행복해진다. 대부분의 메뉴가 4000원 이하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창고’…홍콩

선향옌의 샌드위치.

홍콩의 전통 음식은 중국식 국수나 덮밥에 그치지 않는다. 홍콩은 영국 식민지 역사와 함께 태어난 도시다. 밀크티부터 서양식 타르트, 샌드위치에 이르기까지 이곳 사람들은 서구의 일상적 요리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다시 창조해냈다. 삼수이포의 오래된 차찬탱(홍콩식 찻집) ‘선향옌’(Sun Hang Yuen) 역시 마찬가지다. 노릇하게 익힌 토스트 사이에 콘비프와 스크램블드에그를 끼워내는 이곳 샌드위치를 맛보기 위해 식사 시간마다 가게 앞으로 긴 줄이 생긴다. 달콤한 밀크티 ‘똥라이차’와 함께 기름진 샌드위치 두 쪽을 먹어치우고 나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보물창고’…홍콩

선향옌의 샌드위치(위 사진)와 팀호완의 딤섬을 맛보려면 긴 줄을 각오해야 한다.

20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홍콩의 딤섬 카트는 오후 서너 시에 멈추곤 했다. 차와 만두, 간식을 함께 먹는다는 뜻의 딤섬은 원래 식사가 아닌 브런치였다. 분주한 여행자의 일정 속에서 간식을 일일이 챙기기란 힘든 노릇이니, 삼수이포에서의 딤섬 경험은 점심식사로 대체하는 것이 좋겠다. 홍콩에서 ‘팀호완’(Tim Ho Wan)의 이름은 이미 전설이 되었다. 처음 문을 열었을 때는 삼수이포 변두리의 작은 가게에 불과했지만, 1년 후 미쉐린 가이드로부터 별 하나를 얻었고 현재는 하와이와 뉴욕에도 매장을 열었다. 팀호완의 오너 셰프는 포시즌스호텔 홍콩의 광둥식 레스토랑 ‘룽킹힌’에서 솜씨를 쌓은 후 가게를 열었다. 현재 팀호완을 대표하는 본점이 삼수이포에 있다. 마흔 개가 넘는 지점 중 오너 셰프의 요리를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가게다. 25종의 딤섬 메뉴는 모두 저렴하고 맛있다. 새우 딤섬 하가우, 연잎 밥, 돼지고기로 속을 채운 차슈바오가 가장 인기 높은데, 특히 차슈바오는 반드시 맛볼 필요가 있다. 전통적인 조리법과 달리 빵 안에 차슈를 넣었고 바삭바삭하다. 빵의 식감과 달콤한 맛, 차슈의 짠맛이 입안에서 환상적으로 섞인다.


도시에 밤이 찾아온다. 황혼마저 사라지고 어둠이 내리면 거리의 분위기도 완전히 변한다. 삼수이포의 다이파이동 ‘오이만상’(Oi Man Sang)은 그제야 손님들이 앉을 테이블과 의자를 꺼낸다. 다이파이동은 노천식당을 일컫는 광둥어다. 홍콩의 다이파이동은 저녁 무렵 상점들의 셔터가 닫히면 그 앞에 좌석을 펼쳐놓고 요리를 낸다.


1956년부터 영업을 시작한 오이만상은 홍콩 5대 다이파이동으로 꼽히는 곳으로, <스트리트 푸드 파이터>에서 백종원씨가 맥주와 음식을 즐겼던 식당이기도 하다. 요리도 맛있지만, 백종원씨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국적인 ‘분위기에 취한다’. 테이블뿐 아니라 주방도 노천에 있어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이미 냄비 아래 화르르 타오르는 불의 자욱한 향에 휩싸인다. 시끄러운 광둥어 사이에서 시원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마시는 맥주의 맛은 잊기 힘들다. 마늘 플레이크를 듬뿍 넣은 게 볶음과 쇠고기 간장 볶음, 염장한 노른자를 묻혀 튀긴 새우 요리가 인기 있다. 1인당 60~130홍콩달러 정도면 다양한 메뉴를 실컷 즐길 수 있다.


정미환 여행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