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감한 어느 현상을 관망하며

[컬처]by 웹진 <문화 다>

※ 이것은 ‘영화 리뷰’가 아닌, ‘영화를 통한 오늘에 대한 리뷰’임을 밝힙니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섰다. 잃어버린 대통령을 다시 가졌다. 그리고 며칠 지나지 않아 온라인에서는 여러 공방이 이어졌다. 특정 정치인과 정당을 구심점으로 전개되는 공방이야 어제 오늘 일은 아니라지만, 그 와중에 눈에 띄었던 건 새 정권을 지지했거나 새 정권과 크게 다르지 않은 생각을 지닌(혹은 지닌 걸로 짐작했던) 사람들 간의 공방이었다. 특히 진보 언론인과 새 정권 지지자 사이의 공방으로 이어지는 지류들은 SNS 페이지의 스크롤을 계속 내리게 만들었다. 이를 두고 누군가는 진흙탕 싸움으로 보고, 누구는 신구 구도로, 또 엘리트주의와 편향성 그리고 한국 정치의 다원주의로... 여러 말들이 이어졌다. 개인적으로는 이에 대한 동의나 부정할 마음이 들지 않지만 현상적으로 이번 일이 같은 진영, 혹은 유사 진영이라는 포괄 속에 미처 드러날 기회를 얻지 못했던 여러 층위가 차이를 드러내고 대립이 표면화되는 현상으로 보여 인상적이었다.

 

내용이 정치라서 거창한 것이지 실은 우리 삶도 그렇지 않은가, 실없는 예를 들어보자면, 점심 메뉴로 중식이냐 한식이냐 어렵게 정하고서도 중국집 가서 다시 짜장이냐 짬뽕이냐를 고민해야 하는 것, 헌데 그 와중에 짜장, 짬뽕 중 하나만 정해야 한다면, 그리하여 점심시간마다 닥쳐올 대립과 격론의 파장을 짐작해보라. 격론 중인 정치 이야기가 더 길어지기 전에 본론으로 넘어가야겠다. 이번 일을 바라보며 내가 느낀 이미지는 ‘격렬함’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봉인되었다 해방된 격렬함일 것이다. 잃었던 ‘우리’를 되찾은 쪽의 열성이나 ‘우리’라는 포괄 안에서 미처 발언하기를 꺼려 봉인해 두었던 쪽 공히 마찬가지다. 그 봉인이 풀렸다. 대치에 나선 양측 일선에서 상대를 공격하는 사람들의 메시지는 단호하고 명징하다. 마치 오래도록 싸울 준비를 해 온 것처럼. 단호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효과적인 수단 중 하나는 피아 구분을 명징하게 하는 것이다. 이는 수많은 영웅주의 영화에서 그려낸 장르 도식과도 일치한다. 이러한 예는 멀지 않게 찾아볼 수 있는데, 영화 '변호인'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을 그려가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민감한 어느 현상을 관망하며

'변호인'에서 송우석이란 이름에 투영된 인간 노무현은 성공한 변호사를 꿈꾸다 단골 국밥집 아들이 불법 체포되자 이를 조사하게 되고 점차 인권변호사로 성장해 간다. 송우석은 여러 갈등에 직면하고 이를 이겨내는데 그 대상은 군부 정권의 독재 권력과 이들의 하수인, 부정의한 사법부 등이다. 장르 서사의 문법상 영웅주의 영화가 지니는 서사전개 과정은 이렇다. ‘악의 세력은 악행을 저지르거나 그 힘을 키워가고 그 사이 주인공은 실패를 딛고 성장하거나 각성한다. 그리고 마침내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변호인'은 이러한 장르 서사에 충실한 영화다. 카우보이는 황야에서, 권투 선수는 링 위에서, 그리고 '변호인'에서의 우석은 법정에서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변호인'을 통해 양우석 감독이 보낸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연민과 지지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또한, '변호인'이 흔한 영웅주의를 답습한 정도라고 평가절하 할 만큼 완성도가 못 미치는 영화도 아니다. 실제 인물을 주인공으로 그려낸 만큼 보는 이의 따라 차이는 있겠지만 이 영화는 주인공을 향한 감정 이입과 그에 따른 정서적 울림이 잘 전달되는, 서사 구축이 충실히 구현된 영화다. '변호인'을 비롯해 최근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그려내는 여러 영화들에서도 우리는 단호하고 명징한 피아 구분을 바탕으로 한 격렬한 대결을 소비한다. 다른 말 대신 ‘소비한다’는 단어를 사용하는 이유는 개별적인 영화가 지니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이들 영화가 반복해 나아가는 피아 구분과 서사 전개의 방식이 상업적인 기획으로서의 그것과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수십억, 어느덧 100억 규모의 영화가 제작되는 한국영화시장에서 자본의 논리를 굳이 지적하고 싶지 않다. 따라서 기획모델에 충실한 정치 소재의 영화도 있을 수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고 본다. 다만 장르적 문법, 상업적 기획에 조금은 떨어진 지점에서 차별적인 방법, 혹은 다양한 시선으로서 자리매김하는 영화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에는 의문을 가져 봐도 되지 않을까? 우리는 5지선다 객관식의 시대가 보다는 찬성과 반대라는 양자택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이하 '인빅터스')에서 그리는 만델라는 취임 초기 흑백으로 분열된 나라를 화합하고자 고뇌한다. 갈등을 풀어나가는 그의 모습은 역시 또 하나의 영웅서사라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영화가 지닌 차이라면 적을 상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빅터스'에서 만델라가 국가 화합을 목표로 선택한 것은 럭비 월드컵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남아프리가 공화국에서의 럭비는 백인들의 전유물이었고 그 상징과도 같은 것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가대표 럭비팀 스프링복스였다. 만델라는 스프링복스의 해체 주장을 만류하고 자국에서 열리는 럭비 월드컵에서의 우승을 위해 경주한다. 백인문화에 대한 징벌적 응징이 아닌, 백인 문화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흑백갈등을 해소하고자 한 것이다. 특정한 적을 상정하는 대신 영화는 통합을 위해 정치적 아젠다를 구축하는 과정에서의 고민과 결정, 이것이 스포츠를 통해 완성되는 여정을 쫓는다. 만델라는 설득한다. 그의 의지는 그의 연설과 대화로 발화되고 그 의지를 공감한 스프링복스는 우승을 목표로 경기에 임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말하는 만델라보다 박진감 넘치는 럭비 장면에 관객은 더 감정이입할 수 있다.

민감한 어느 현상을 관망하며

하지만 이미 스프링복스의 경기에는 만델라가 추구한 흑백통합의 의지가 녹아있다. 만델라의 통합의지는 그의 입에서 시작해 스프링복스 선수들의 몸을 통해 실현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영화에서 적을 내세우지 않는다. 그리고 만델라를 영웅시하는 것을 자제한다. 내용의 특성상 관객의 이목을 더 집중시키는 것은 마델라가 아닌 스프링복스일 것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영화 '변호인'이 노무현을 지지한다면, '인빅터스'는 만델라를 응원한다. '변호인'이 강렬하다면 '인빅터스'는 유연하다. 이 두 영화에 빗대서 서두에 언급한 온라인 공방을 다시 떠올려보자면 유연함을 찾아볼 수 없는 강렬함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것의 다른 표현이 격렬함은 아닐지.

 

어느 사회에서나 공방은 필요하다. 이 글은 말하자면 공방의 방법론 또는 방향성을 두고 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왜 적을 상정하는 것에 익숙한 걸까. 최근 한국 영화에서 정치 소재가 상업적 기획으로 이어지는 것, 그 방식에 있어 선악의 이분법이 주를 이루는 것, 그 방식이 관객으로부터 높은 확률로 좋은 성적을 얻는 것, 이 같은 경향이 저 온라인상을 뜨겁게 달구는 공방과 ‘어쩌면 어쩌면 어쩌면’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은 그저 엉뚱한 생각이기만 한 걸까. 이 사회의 격렬함을 열정의 또 다른 표출이라고 관망적으로 눙치고서라도, 격렬한 공방만큼 보고 싶은 것이 있다. 영웅담으로서만 우리가 누군가에 대한 지지를 표현하는 것이 아니듯, 적을 이겨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듯, 나와 반대하거나 다른 생각을 지닌 사람들을 그저 적이라고 부를 수 없듯, 나의 지지가 적을 상정하지 않더라도 오롯이 그 사람, 그 철학, 그 가치로서 피어날 수 있다는 것. 그런 공방을 보고 싶다. 그런 영화를 만나고 싶다.

 

장지욱(영화평론가)

2017.05.27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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