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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이케아(IKEA)와 바우하우스

by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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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데어로에가 1927년에 디자인한 '안락의자 MR534'. 조성관 작가 제공

이케아(IKEA)를 한번 이용한 사람들은 계속 이케아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다. 착한 가격도 가격이지만 쓰면 쓸수록 기능성과 실용성에 소비자가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4년 전 이케아에서 3만9000원에 구입한 조립식 나무의자를 애용한다. 디자인이 '심플'한 데다 시간이 흐를수록 편리하다는 것을 느낀다. 집에서 원고를 쓸 때 대부분 은 이 나무의자에 앉아 무릎 위에 노트북을 펴놓고 몸을 뒤로 젖힌 채 가장 편안한 상태로 작업을 한다(물론 노트북은 전용 받침대에 올려놓고서).


3만9000원이면, 커피 8잔 값이다. 누구에게나 부담이 없는 가격이다. 나무의자에서 작업을 할 때마다 생각나는 슬로건이 있다.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편리하게 쓸 수 있어야 좋은 디자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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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마르의 바우하우스 박물관. 조성관 작가 제공

이 슬로건은 독일의 건축·디자인학교 바우하우스(Bauhaus)의 교육 철학이었다.


천재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1919년 독일 튀링엔주 바이마르에 세운 혁신적인 학교가 바우하우스다. 바이마르는 괴테와 쉴러를 품고 키운 독일의 대표적 인문도시다. 그런 바이마르였지만 바우하우스의 혁신성은 부담스러웠던 모양이다.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로 교사(校舍)를 새로 지어 학교를 옮긴다. 저 유명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계했다. 그러나 바우하우스는 1933년 히틀러가 권력을 잡으면서 '디자인이 '게르만'(Germanen)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강제 폐교된다.


바우하우스의 혁신 실험은 불과 14년으로 끝났지만 우리는 지금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 속에 살아간다. 앞서 언급한 나무조립의자를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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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드비히 미스 반데어로에(1886~1969)

이 나무의자는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인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Mies van der Rhoe 1886~1969)의 1927년 작 '안락의자 MR534'와 디자인이 많이 비슷하다. 반데어로에가 강철파이프로 설계한 것을 이케아에서는 나무로 바꿨을 뿐이다.


우리가 지금 편리하게 사용하는 책상, 탁자, 의자, 조명등, 저장용기와 같은 생활용품은 대부분 그 디자인을 바우하우스의 건축가와 공예가들에게서 빌려온 것이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서울 금호미술관에서 2020년 2월 2일까지 전시하는 '바우하우스와 현대 생활' 전에 가보면 실감한다.


일체의 장식을 생략한 채 기능성과 실용성을 극대화한 디자인이 바로 바우하우스 디자인이다. 반데어로에는 평생을 걸쳐 '더 적을수록 더 많다'(Less is More)라는 디자인 철학을 가구와 건축에 구현했다.


그렇다면, 바우하우스 디자인은 어디서 왔을까.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인가. 무엇이 바우하우스 디자인 철학에 영향을 미쳤을까. 예술에서 무(無)로부터의 창조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만들어진 것에 다른 이의 생각과 개성을 접목할 때 새로운 것이 탄생한다.


우리는 그 단서를 오스트리아 수도 빈에서 만나게 된다. 옛 합스부르크 왕가의 궁전이 호프부르크(Hofburg)다.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구시가의 랜드마크인 슈테판성당 쪽으로 나가는 문이 궁전 정문이다. 호프부르크는 르네상스, 바로크와 같은 역사주의 건축양식의 콤플렉스다. 아치형 궁전 정문을 나서면 작은 광장인 미하엘러 광장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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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러 광장의 로스 하우스. 왼편의 장식이 있는 건물과 대비가 된다. 조성관 작가 제공

광장 정면에 아무런 장식이 없는 건물이 떡 버티고 있다. 주상복합건물인 로스 하우스(Loos Haus)다. 두 눈 감고 걷지 않는다면 이 건축물을 피할 수가 없다. 화려한 장식의 건축물 사이에서 외롭게 떠 있는 섬처럼 보인다.


건축가 아돌프 로스(Adolf Loos 1870~1933)가 설계한 건축물이다. 이 주상복합건물이 로스하우스로 의연히 자리매김하는 데는 고독한 투쟁의 시간을 거쳐야 했다.


로스는 체코 브르노 태생이다. 드레스덴 공대에서 건축을 공부한 뒤 가업을 이으라는 어머니를 거역한 채 시카고만국박람회를 보고 싶은 마음에 대서양을 건넌다. 미국에서 목수와 석공으로 3년을 보내며 그는 기능주의와 실용주의에 눈을 떴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고향 브르노로 가지 않고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 빈을 선택한다. 아무런 연고도 없는 빈에서 문화비평가로 활동하며 조금씩 입지를 넓혀 나갔다. 그러면서 서서히 건축설계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1908년 '장식과 범죄'라는 책을 펴내 빈에 만연한 장식의 남용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문화의 진보는 장식을 멀리하는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로스 하우스는 1911년에 세상 빛을 봤다. 로스는 모든 장식을 완전히 드러낸 주상복합건물을 설계했다. 호프부르크 정문 앞에 '장식 없는 건물'이 들어선다고 알려지자 빈 사회는 발칵 뒤집혔다. 온갖 비난이 봇물 터지듯 나왔다. 태어나면서부터 장식적인 건축물만 보면서 살아온 이들에게 '장식 없는 건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혐오스러움 그 자체였다.


로스는 경찰에 소환되어 심문을 받았다. 범재(凡才)가 천재(天才)에게 따져 묻는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그 집은 너무 단순합니다. 도대체 장식은 어디 있는 겁니까?"(경찰)


"호수 자체가 바람이 없을 때는 밋밋하고 도대체 장식이라곤 없습니다. 그런데도 여러 사람이 상당히 괜찮다고 말합니다."(로스)


경찰은 공사 중지 명령을 내렸지만 로스는 설계도면대로 밀어붙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로스는 창문에 화분을 설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장식의 바다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와 고고한 섬이 된다는 것은 이토록 지난(至難)하다. 극소수 지성인들만 로스하우스의 가치를 제대로 보았을 뿐이다. 로스하우스는 기능주의 현대건축의 시조(始祖)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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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본 투겐다트 빌라 전경. 조성관 작가 제공

로스의 고향 브르노는 체코 제2의 도시다. 브르노는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생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건축과 디자인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브르노는 성지(聖地)와 같다. 바로 모더니즘 건축물 투겐타트 빌라(Tugendhat Villa)가 있기 때문이다.


투겐타트 빌라는 바로 바우하우스의 마지막 교장 반데어로에가 설계한 1929년 작품이다. 브르노 중심에서 살짝 벗어난 외곽 언덕 위에 자리한 이 빌라는 실용성과 아름다움으로 2001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현재의 기준으로도 봐도 시대를 앞서가는 혁신적인 디자인이다. 외부에서 보면 평범해 보이는 단층 건물이지만 정원에서 보면 3층 건물이다. 빌라 내부의 가구와 인테리어는 모두 반데어로에가 설계했다. 반데어로에는 미국의 프랭크 로이드 롸이트, 프랑스의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3대 모더니즘 건축가로 평가받는다.


아돌프 로스, 발터 그로피우스, 미스 반데어로에…. 바우하우스 100주년에 다시 되새겨 보는 이름이다. 이들로 인해 우리는 지금 일상생활에서 편리함과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만끽하고 있다. 천재들에 감사해야 하는 이유다.


(서울=뉴스1) 조성관 작가 author@naver.com @news1.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