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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가의 시선

by예술의전당

벨라스케스 <시녀들> vs 베르디 <리골레토>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은 스페인의 황금시대를 기억하게 해주는 화려한 추억이다. 스페인은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이베리아 반도를 탈환한 1492년부터 유럽 최고의 국가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이사벨라 여왕이 제노아 뱃사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신대륙 탐험을 후원한 덕분에 스페인은 남아메리카 대부분을 식민지로 얻었다. 남아메리카 식민지에서 1500년부터 1600년까지 스페인으로 들어온 은의 양은 그때까지 유럽이 보유하고 있던 은의 총량의 세 배가 넘을 정도였다. 해군 세력을 기반으로 한 스페인의 황금기는 1588년 스페인 무적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패하며 급격하게 내리막을 걷게 된다. 가톨릭 신앙에 대한 지나친 열정으로 식민지에서 들여온 재화 대부분을 성당 건설에 쏟아부은 것도 악재라면 악재였다. 17세기 중반에 이르면 스페인의 위세는 이미 저물어가는 해와 같았다.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등이 유럽의 맹주 자리를 놓고 각축을 벌이는 와중에 스페인의 황금시대는 역사의 뒤편 너머로 서서히 사라져갔다.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가의 시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펠리페 4세의 초상'(1623). 캔버스에 유채. 101 x 198 cm. 프라도미술관, 마드리드.

펠리페 4세가 재위한 1621년부터 1665년까지의 30여 년은 스페인의 황금시대가 마지막 광휘를 빛내던 때였다. 펠리페 4세의 치세 중에 벨라스케스, 수르바란, 리베라 같은 예술가들이 활동했다. 이들 중 펠리페 4세가 가장 총애했던 화가는 벨라스케스였다. 1623년, 스물네 살의 벨라스케스는 자신보다 여섯 살 연하인 젊은 국왕 펠리페 4세의 초상을 그리게 된다. 왕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의 젊은이가 초상 속에서 젊음과 군주의 위엄을 함께 표현할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첫 알현 6주 후에 벨라스케스는 궁중 화가로 임명되었다. 이때부터 1660년 화가가 사망할 때까지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에게 무한정의 신뢰와 애정을 보여주었다. 당시 스페인 왕실의 살림은 결코 넉넉하지 않았지만 펠리페 4세는 벨라스케스의 작업에 대해 아낌없는 후원을 베풀었고, 두 번이나 로마로 국비 유학을 보내주기도 했다.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돼 있는 120여 점의 벨라스케스 작품들은 이 시기, 황금시대의 마지막 순간에 위치했던 17세기 전반 스페인 궁중의 일상을 자연스러우면서도 치밀하게 복원해내고 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들은 보는 이들에게 어떤 ‘예술적 환영’을 선사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스페인의 황금시대가 남긴 문화적 유산이기도 하다.

치밀하게 계산된 자연스러움과 예술적 환영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가의 시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1656). 캔버스에 유채. 276 x 316 cm. 프라도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된 벨라스케스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그림은 단연 <시녀들>이다. <시녀들>이라는 제목이 붙긴 했지만, 이 그림의 주인공이 시녀들은 아니다. 그림은 여러 등장인물 중 그 누구에게도 포커스를 맞추고 있지 않다. 가운데에는 막 다섯 살이 된 펠리페 4세의 고명딸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가 서 있고 공주의 양편으로는 두 명의 시녀들이 공주에게 붉은 병을 건네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공주 뒤편의 거울에는 펠리페 4세와 마리아나 왕비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친다. 그림의 왼편에는 붓과 팔레트를 든 채로 캔버스를 응시하는 벨라스케스의 모습이 보인다. 이 그림이 정확하게 어떤 순간을 묘사하고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다. 벨라스케스가 국왕 부부의 초상을 그리고 있는 방에 마르가리타 테레사 공주가 방문했다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이외에도 여러 가능성이 존재한다. 예컨대 화가가 공주의 초상을 그리는 중에 국왕 부부가 화실을 방문한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다. 그림에서 특히 눈에 띄는 점은 왼편에 과장될 정도로 크게 그려진 캔버스와 화가 본인의 모습이다. 당시 벨라스케스는 귀족들만이 입회할 수 있는 산티아고 기사단의 기사로 막 선발된 참이었다. 성공한 화가로서 벨라스케스의 자부심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가의 시선

앤서니 반 다이크의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1633). 캔버스에 유채. 135 x 220 cm. 미국 국립미술관, 워싱턴 D.C.

<시녀들>의 장면은 어느 평온한 날 오후, 왕실 가족들의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있지만 사실 그 안의 모든 것들은 대단히 치밀하게 계산되어 그려졌다. 벽에 걸린 그림들은 대부분 그리스 신화 속의 장면들로, 그림이 주는 위엄과 교양 넘치는 분위기를 한결 더 상승시키고 있다. 애당초 이 작품의 제목은 <펠리페 4세의 가족 초상화>였으나 19세기에 만들어진 프라도미술관의 작품 목록집에 ‘시녀들’로 기록되면서 이제는 <시녀들>이 공식 명칭처럼 되었다. 그런데 그림을 자세히 보면 화면 오른쪽에서 정면을 응시하는 한 키 작은 여자와 남자아이가 보인다. 이들은 누구길래 국왕 가족의 거실에 와 있을까? 두 사람은 궁중의 어릿광대인 난쟁이들이다. 난쟁이들을 궁중의 어릿광대로 쓰는 일은 17세기 유럽의 왕실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관습이었다. 예를 들어 엇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영국 궁정화가 반 다이크의 <헨리에타 마리아 왕비의 초상>에서도 어린아이처럼 그려진 난쟁이가 등장한다.

웃음 뒤에 숨겨진 눈물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가의 시선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세바스티안 데 모라의 초상'(1645). 캔버스에 유채. 82 x 106 cm. 프라도미술관, 마드리드.

반 다이크의 그림에서 난쟁이 어릿광대는 마치 천진난만한 남자아이처럼 그려져 있다. 난쟁이의 작은 몸은 늘씬한 왕비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보이게끔 만든다. 그러나 실제 이들의 신체가 반 다이크 그림 속의 모습처럼 귀여웠을 리는 만무하다. 불구의 몸으로 태어나 왕족들에게 웃음을 주어야 하는 딱한 처지가 이 난쟁이 어릿광대들에게 주어진,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이었다. 벨라스케스가 그린 <세바스티안 데 모라의 초상>에는 처연한 처지에도 불구하고 한 인간의 존엄성을 잃지 않으려 하는 남자의 눈빛이 생생하게 살아 있다. 세바스티안 데 모라 역시 궁중의 어릿광대인 난쟁이였다. 아이같이 작은 몸에 중년의 얼굴을 한 남자는 꿋꿋한, 꺾이지 않는 눈빛으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그 눈빛이 너무도 형형해서 그림을 보는 우리를 조금 슬프게 만든다. 그들의 실제 삶은 어떠했을까? 고귀한 신분의 이들을 웃기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던 그들의 삶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슬프지 않았을까? 불구의 몸으로 왕족이나 귀족들을 웃겨야 하는 이들의 슬픔을 들여다보려 했던 예술가는 벨라스케스 말고도 또 있었다. 1851년 작인 오페라 <리골레토>에서 베르디는 파격적으로 곱사등이 광대 리골레토를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이 당시 베르디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최고봉으로, 그리고 막 불붙기 시작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상징으로 맹활약을 펼치고 있었다. <에르나니>와 같은 작품들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벗어나 통일을 이루려 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민족의식을 자극한 오페라로 손꼽힌다. 그러나 베르디의 관심은 민족주의나 통일보다는 선량하지만 힘없는 개인이 받아야 하는 고통, 그 인간적인 비극을 음악으로 재현하는 데에 있었다. 어릿광대이자 딸에게는 자상한 아버지, 복수를 맹세하지만 그 복수마저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던 꼽추 리골레토는 베르디의 마음을 강력하게 잡아끈 캐릭터였다. 리골레토는 난봉꾼 만토바 공작에게 재롱을 부리며 살아가는 광대다. 바람둥이 공작이 여러 여자를 희롱하는 걸 도와주고 공작에게 딸을 빼앗긴 신하를 조롱하기도 한다. 정작 광대의 분장을 지운 리골레토에게는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딸 질다가 있었다. 리골레토는 결국 딸도, 그리고 아버지로서의 존엄성도 모두 절대 권력자인 공작에게 뺏기고 만다. 질다를 공작이 데려갔다는 사실을알고 “이 저주받을 놈들아!”라고 분노하며 소리치다 제발 딸을 돌려달라고 울며 매달리는 리골레토의 모습은 신하들뿐만 아니라 관객들의 마음도 아프게 한다. 베르디는 벨라스케스와 마찬가지로 최고의 성공을 거둔 예술가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고통받고 소외당하는 약한 영혼에 대한 애정이 늘 자리하고 있었다. <리골레토>는 1851년 베네치아 라페니체극장의 초연부터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리골레토는 음악적으로나, 연극적인 요소로나 결코 쉬운 역할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바리톤 가수들은 꼭 한번 해보고 싶은 역할로 꼽는다. 리골레토의 이중적인 면모, 살기 위해 웃음을 파는 광대와 하염없는 애정을 가진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절로 보는 이의 마음을 움직인다. <리골레토>의 원작인 「환락의 왕」을 쓴 작가 빅토르 위고도 <리골레토> 공연을 보고 “이 작품을 과연 내가 쓴 게 맞는지 놀랍다”라며 감탄을 거듭했다고 한다. 베르디 역시 이 작품에 대해 큰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만년의 베르디는 자신에게 한 작품만 선택할 권한이 있다면 어떤 작품을 고르겠냐는 질문에 <리골레토>라고 대답했다. <리골레토>의 만토바 공작은 권력자이고 잘생긴 미남이지만 이기적이고 냉혹하기 그지없는 악인이다. 리골레토는 곱사등이에 다리를 저는 추한 모습이지만 그 안에는 애처롭고도 연약한 영혼이 숨겨져있다. 그 어떤 모습을 하고 태어났더라도, 그리고 어떤 신분과 위치에 있다 하더라도 삶은 똑같이 고귀하고 엄숙한 것이다.

슬픈 영혼을 위로하는 예술가의 시선

국립오페라단의 '리골레토'(2017) 中 리골레토와 만토바 공작

전원경

연세대학교를 졸업하고 영국 시티대학교 런던에서 예술경영 및 비평 전공으로 석사를, 글라스고대학교에서 문화콘텐츠산업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객석」과 「주간동아」 문화팀 기자로 일했으며 현재 예술의전당 인문아카데미와 서울사이버대학교에서 예술과 역사, 사회 사이의 관계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 수원SK아트리움의 마티네콘서트 <미술관옆 음악당>의 진행자이기도 하다. 「예술, 역사를 만들다」, 「런던 미술관 산책」, 「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 「클림트」 등의 책을 썼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6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