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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숭고한 무대

by예술의전당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들어서자 거대한 무대막에 그려진 웃는 남자의 미소가 보였다. 막을 둘로 나누는 듯 거대하게 양옆으로 늘려진 괴이한 웃는 입의 형상. 빅토르 위고의 「웃는 남자」가 소설로 쓰이고, 몇 번이나 영화로 만들어지고, <배트맨> 시리즈의 조커 얼굴로 형상화되고, 마침내 뮤지컬로 무대에 오르기까지 가장 중요한 이미지가 관객을 맞는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숭고한 무대

© EMK뮤지컬컴퍼니

<웃는 남자>는 「레미제라블」과 「노트르담의 꼽추」로 잘 알려진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17세기 영국에는 콤프라치코스라 불리는 인신매매단이 있었다. 아이들을 납치해 귀족의 유흥거리로 파는 콤프라치코스에 의해 입이 찢어진 소년 그윈플렌은 그들에게 버림받고, 눈밭에서 죽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는아기 데아를 발견한다. 떠돌이 약장수 우르수스는 그들을 거두는데, 데아가 앞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된다. 15년의 시간이 흘러, 그윈플렌은 평생 웃는 얼굴일 수밖에 없는 기형적인 얼굴을 갖고 성장하여, 우르수스, 데아와 함께 유랑극단 무대에 선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황을 극으로 만들어 인기를 얻고, 그윈플렌과 데아는 서로를 사랑하기에 이른다. 그러던 어느 날, 그윈플렌의 진짜 신분이 밝혀지며 이야기는 급박하게 전개된다.

 

<웃는 남자>의 서사는 떠돌이 유랑극단 사람들의 허름한 천막부터 영국 앤 여왕의 화려한 궁정과 귀족들이 활동했던 의회를 오간다. 작품은 캐릭터와 음악, 무대, 의상을 중심으로 서사의 힘을 극대화한다. <지킬 앤 하이드>의 곡을 쓴 프랭크 와일드혼은 특히 유랑극단 사람들의 노래를 때로 유쾌하게, 때로 먹먹한 슬픔에 잠기게 음악으로 표현해냈는데, 집시의 선율이 갖는 자유분방하고 경쾌한 즐거움과 권력자들만의 오만하고 힘 있는 냉소가 곳곳에서 힘을 발휘한다. 프랭크 와일드혼은 인터뷰를 통해 이렇게 밝혔다. “부자들과 가난한 자들의 세상을 뮤지컬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그윈플렌, 우르수스, 데아가 소속된 집시들의 세상과 부유하고 화려한 귀족들의 삶은 어땠을까를 상상하며 계급에 따른장소의 느낌과 분위기를 음악에 담고 싶었다.” 와일드혼은 그윈플렌의 ‘모두의 세상’이라는 곡이 우리 시대에 강력한 메시지를 준다며 <지킬 앤 하이드>의 ‘지금 이 순간’에 비유하기도 했다. 뮤지컬 대작을 오래 기억하게 만드는 힘이 서사에 걸맞은 특별한 노래에 있음을 떠올린다면,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곡이다.

인물 고유의 정서를 세밀하게 새겨 넣은 무대와 의상

<웃는 남자>의 캐릭터들은 복잡한 이야기를 쉽게 전달한다. 주요 인물들은 각기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공간이 있고, 그와 관련한 정서가 있다. 무대를 다른 장소로 바꾸는 순간마다 지배하는 캐릭터가 분명히 드러난다는 것은 대본과 연출을 맡은 로버트 요한슨의 공일 것이다.

 

그윈플렌의 찢어진 입 모양을 한 막의 윗부분이 열리면 인신매매단 콤프라치코스가 등장한다. 콤프라치코스의 존재는 초반부에 정서적으로는 공포를 선사하고, 후반부에 서사적으로는 그윈플렌의 실제 신분에 대한 반전을 던져준다. 바다와 고문실이 콤프라치코스와 관련된 장소가 되는데, 바다는 깊이를 선사하며 무대를 확장한다. 콤프라치코스는 첫 장면의 지배자로서 주인공을 소개하는 역할을 맡는데, 소년 그윈플렌의 막막함이 배를 타고 도주하는 콤프라치코스와 대비되어 묘사된다. 그윈플렌은 여린 듯하지만 심지 굳은, 외양에서 오는 편견으로부터 자신의 선함을 지켜내는 인물이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의 가창력이 귀를 사로잡는데, 원작과 비교하면 ‘행복할 권리’라는 곡에서 그윈플렌이 적극적으로 행복해지고자 하는 의지가 더 드러나도록 연출되었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숭고한 무대

© EMK뮤지컬컴퍼니

그윈플렌이 아기 데아를 안고 찾아드는 우르수스의 이동식 주택은 우르수스라는 말 많고 코믹한, 동시에 따뜻한 남자를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이곳은 이후 성인이 된 그윈플렌과 데아가 우르수스의 해설 아래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와 함께 중요한 ‘극중극’ 장치이기도 하다. 원래 약을 팔며 떠돌던 우르수스는 입이 찢어진 그윈플렌의 모습이 돈벌이가 된다는 사실, 그리고 그윈플렌과 데아의 슬픈 사정이야말로 사람들을 끌어모은다는 사실을 알고 적극 활용한다. 무대 디자이너 오필영은 “그들만의 작은 세계인 극중극의 무대 위 공간은 그들이 살고 있는 차가운 사회와 대비되도록 따뜻함이 가득하고, 따뜻한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간이었으면 좋겠다 는 생각을 가지고 디자인했다”고 밝혔다.

 

눈이 보이지 않는 데아가 안전하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으로는 유랑극단 사람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실내외 공간들이 제시되는데, 데아의 의상은 순수함을 상징하는 흰색으로 설정되었고 그녀와 함께 어울려 웃고 떠들고 희망을 말하는 이들은 모두 유랑극단의 다른 여성들이다. 우르수스, 그윈플렌, 데아가 모두 그렇듯, 유랑극단원들, 서커스단원들은 피가 섞이지는 않았지만 가족과 같은 유대를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눈물은 강물에’ 같은 곡은 전반적으로 차분한 분위기로 비극의 주인공을 연기하는 데아가 강가에서 활기차게 자유를 만끽하게 한다. 템포가 빠르고 스텝은 경쾌하며 이후에 오는 파국과 대비되는 밝은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린다. 유랑극단원들의 차림새 역시 집시를 연상시키는 분위기로 디자인되었다. 의상 디자이너 그레고리 포플릭은 특정 시대에 국한하지않은 의상을 만들었다. “(극의 배경이 되는) 17세기 의상뿐만 아니라 크리스찬 디올, 알렉산더 매퀸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영감을 받았다.” 그는 영국 사회의 왕족, 귀족, 하인과 가난한 사람까지 여러 계층에 대해 다방면에서 자료를 찾았고, 서커스 공연 등 실제 그 시대의 광대가 입은 옷을 리서치해 200여 벌 이상 의상을 디자인했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숭고한 무대

© EMK뮤지컬컴퍼니

왕과 귀족들의 공간은 화려하고, 음악 역시 웅장한 느낌으로 연출됐다. 왕궁 장면에서는 예외 없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배우들이 무대를 채우는데, 인형극을 보는 듯 알록달록하고 화려하다. 그윈플렌이 생존해야 했던 극중 다른 공간들과 달리 왕과 귀족의 공간은 겉으로는 번드르르한 상류사회의 허영과 거짓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윈플렌에게 사랑을 느끼는 또 다른 여성인 공작 조시아나의 공간은 금색으로 반짝이는, 미니멀하지만 눈부신 인상을 주는 은밀한 느낌으로 연출되었다. 조시아나의 의상이 가장 화려하지만, 남성 귀족들의 옷차림 역시 드라마틱하고 화려한 디자인으로 만들어져 장식이 많고 고급스러운 느낌을 살렸다. 그윈플렌이 지내게 되는 저택은 침대 높이가 계단을 가져와야 내려설 수 있을 정도로 높다. 왕과 귀족들의 경우는 움직임도 다르게 연출되었다. 안무를 맡은 제이미 맥다니엘에 따르면 현대무용보다는 고전무용의 도움을 받은 동작들이다. “연습 날이면 거의 매번 한 시간가량의 테크닉 댄스 클래스를 진행했다. 귀족들과 신하 등의 캐릭터를 표현하기 위해, 배우들이 발레 트레이닝을 받으면 동작을 마스터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웃는 남자>에서 반드시 모든 감각을 집중해서 만끽하라고 말하고 싶은 부분은 2막의 ‘행복할 권리 리프라이즈’부터 ‘우린 상위 1퍼센트’, ‘그 눈을 떠’, ‘웃는 남자’를 거쳐 ‘내 삶을 살아가’로 끝나는 엔딩까지다. 심금을 울리는 그윈플렌의 노래가 끝나면 오만한 귀족들과 여왕이 의회에 모여 그들 자신의 낙원을 만들기 위해 가난한 자들의 지옥을 만들어내는 장면이 펼쳐진다. 최고 권력자를 위해 아부하는 귀족들이라는 속성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노래’라는 설정으로 보여주는 ‘우린 상위 1퍼센트’는 뮤지컬 <웃는 남자>에서 웃음과 찬탄을 동시에 유발한다.

죽음과 삶이 교차하는 숭고한 무대

© EMK뮤지컬컴퍼니

마지막의 환상적인 연출은 글로 옮기기보다는 직접 보기를 권하고 싶은데, 마찬가지로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뮤지컬로 만든 <레미제라블>의 엔딩처럼, 죽음과 삶이 교차되며 숭고함과 감동이 무대를 지배한다. 빅토르 위고는 개인의 목소리를 사회의 물결로 바꾸어내는 법을 잘 알고 있다. “부자들의 낙원은 가난한 자들의 지옥으로 세워진 것이다”라는 <웃는 남자>의 문장은 뮤지컬에서 캐릭터들의 생생함을 통해 현재에도 유효한 방식으로 재해석되었다. 그리고 사랑과 드라마가 작품의 뉘앙스를 풍부하게 덧칠한다. “그들은 낙원에 있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다. 그윈플렌은 데아를 숭배했다. 데아는 그윈플렌을 우상으로 삼았다. 이 지상에서는 오직 한 여인만이 그윈플렌을 볼 수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눈먼 여인이었다.”

 

글 이다혜 「씨네21」 기자

사진 EMK뮤지컬컴퍼니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8년 9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