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 가기

[ 컬처 ]

'하쿠나 마타타' 라이프를 뒤로 하고

by예술의전당

뮤지컬 <라이온 킹> 1.9(수) - 3.28(목) 오페라극장

'하쿠나 마타타' 라이프를 뒤로 하고

ⓒ Disney

디즈니사의 브로드웨이 데뷔작은 1994년, <미녀와 야수>였다. 원작이 지닌 짙은 어두움을 지우기 위해 사악한 두 언니를 과감하게 삭제했고, 긍정주의자로 무장한 주인공 벨을 통해 가족 뮤지컬로 재탄생한 마술 같은 작품이었지만 평단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같은 시즌의 승자는 브로드웨이의 살아 있는 전설 스티븐 손드하임과 제임스 라파인 콤비의 이었다. 그 틈바구니에서 <미녀와 야수>는 겨우 토니어워즈 의상디자인상 하나를 건져 간신히 무관을 면했다. 하지만 그 시즌의 개막작 가운데 롱런한 작품은 <미녀와 야수> 하나뿐이었다. 그것도 10년이 넘는 롱런이었다. 상업적인 결과로 승부하는 냉정한 뮤지컬의 세계에서 디즈니는 그 상업성을 인정받은 셈이다.

 

디즈니는 곧이어 뮤지컬 <라이온 킹>의 브로드웨이 제작 일정을 발표했다. <미녀와 야수>에도 사람이 아닌 등장인물들이 온갖 특수 분장으로 등장하지만 그래도 그들은 한때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라이온 킹>은 인간이라고는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동물의 왕국, 그것도 아프리카의 사바나가 무대였다. 큰 머리 가면이 난무할 거라는 조롱이 연이었지만 연출가 줄리 테이머가 디자인한 가면 콘셉트가 하나씩 공개되자 조롱의 비웃음은 기대의 웃음으로 바뀌기 시작했고 기존의 티켓 오픈 기록을 갱신하며 이 작품에 대한 관객들의 폭발적인 관심을 증명했다. <라이온 킹>은 한동안 “한번 시작하면 끝이 나지 않는 공연”으로 자신만만하게 광고를 할 정도로 전 세계를 휩쓰는 콘텐츠로 무섭게 성장했다. ‘Big 4’를 내세우며 런던과 뉴욕의 동시 개막을 선도했던 뮤지컬 기획자 카메론 매킨토시가 부러워할 글로벌 콘텐츠의 등장이었다. 디즈니사에는 전 세계에서 개봉해 히트한 뮤지컬 애니메이션이 창고에 가득했기에 <라이온 킹>은 무대 뮤지컬에서도 영토를 넓혀가려던 디즈니의 최대 아웃풋이자 흥행 열풍의 시초가 됐다.

'하쿠나 마타타' 라이프를 뒤로 하고

ⓒ Disney

뮤지컬 <라이온 킹>의 한국 공연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공연은 일본을 대표하는 뮤지컬 극단 ‘시키’가 제작한 라이선스 공연이었지만 적자로 끝났다. 한국의 뮤지컬 제작사들이 일본의 공룡 뮤지컬 극단인 시키의 한국 진출을 반대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가족공연’ 시장의 부재와 뮤지컬 팬들의 외면 등이 더 큰 요인이 됐다. 가족공연 시장은 브로드웨이에서도 결코 만만한 시장이 아니다. <라이온 킹>이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등이 인기를 모은 것은 성인들도 좋아할 만한 콘텐츠와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건전함과 즐거움이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공존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라이온 킹>의 경우, 4인 가족이 40만 원에 가까운 티켓값을 지불하고 공연을 보기에는 가성비 좋은 만화영화에 대한 인식이 너무 강했다. 만화영화는 고작 만 원에 DVD를 사서 몇 번이고 거듭 볼 수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똑같은 노래를 굳이 극장에서 보기 위해 그 비싼 돈을 내겠다는 관객이 1년씩이나 공연장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던 것이다. 공연이 성공했다면 뮤지컬 시장 규모를 크게 키우는 데 한몫했겠지만 <라이온 킹>은 그렇게 우리나라의 공연 현실만 확인한 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이번 투어프로덕션에 대한 반응은 전과는 사뭇 다르다. 우선 <라이온 킹>의 티켓 구입은 ‘피켓팅’이 됐다. ‘피 튀기는 티켓’ 확보 전쟁에 나서야 하는 핫한 공연이 된 것은 단지 이 작품이 외국 배우들로 구성된 공식 국제 투어팀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뮤지컬 <라이온 킹>의 첫 번째 매력은 누가 뭐래도 가면과 분장을 통해 동물의 형상을 만들어낸 디자인이다. 연출가인 줄리 테이머는 가면을 만들어 쓰되 배우의 얼굴을 가리지 않는 방식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 줄리 테이머의 전작인 스트라빈스키의 오페라 <오이디푸스 렉스> 1992년 프로덕션에서 지휘자인 오자와 세이지는 그리스 비극의 형식을 재현하기 위해 가면을 쓰더라도 가수의 얼굴은 가리지 않기를 바랐다. 줄리 테이머는 가면을 머리에 모자처럼 씌우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유명 오페라 가수인 제시 노먼의 얼굴과 목소리를 다 살려내는 데 성공했다. 이와 유사하게 뮤지컬 <라이온 킹>에서도 머리에 씌우는 가면들이 다양하게 등장하는데, ‘심바’의 친구 ‘날라’를 비롯한 암사자들의 가면은 얼굴 전체를 드러내는 모자형이지만 갈기가 특징인 수사자들은 머리의 반을 덮어 고개를 숙이면 사자의 가면이 객석을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게 제작됐다. 특히 악당 역의 ‘스카’는 모자가 아니라 등에 부착된 폴대를 통해 건들건들 움직이게 만들어 불안정한 악당의 내면을 더욱 잘 보여준다. 하지만 역시 가장 압권은 첫 노래인 ‘Circle in the Life’에서부터 관객들의 감탄을 자아내는 긴 다리의 기린과 영양들, 하늘의 새들이다. 특히 기린의 경우, 죽마를 다리만이 아니라 팔에도 연결하여 기린의 가느다란 다리를 구현했고 긴 모자를 써서 기린을 표현했다. 이런 방식을 통해 표정이 없는 인형들은 배우들의 표정연기로 생명을 얻는다. 네 사람이 각각 다리 하나씩을 맡은 코끼리는 그 자체로 코끼리의 큰 덩치를 잘 보여준다. <라이온 킹>은 인도네시아의 가면극이나 일본의 가면극 분라쿠 등에서 영향을 받았지만, 배우들이 이를 자유롭게 운용하는 모습이나 아프리카 특유의 색감과 질감을 의상과 분장을 통해 디자인에 반영한 모습은 이 이야기가 사회의 은유라는 사실을 다시금 짚어준다.

'하쿠나 마타타' 라이프를 뒤로 하고

ⓒ Disney

<라이온 킹>은 내용에 있어서도 셰익스피어의 햄릿과 모세를 모티프 삼아 사바나로 옮겨 담았다는 원작 애니메이션보다 한 수 위의 결과를 보여주었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버전도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를 필두로 큰 성공을 거두었지만 지금으로서는 애니메이션의 인지도를 무대 뮤지컬이 뛰어넘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듯하다. 특히 무대로 옮기면서 심바의 어릴 적 친구인 날라의 역할도 깊어졌다. 날라는 자신을 신부로 삼아 새끼 사자를 낳으려는 악당 스카에게 대항해 균형이 깨지고 망가져버린 긍지의 땅을 떠나 희망의 땅을 탐색하러 떠난다. 이때 부르는 ‘Shadow Land’는 매우 강력한 넘버다. 줄거리에 대한 일체의 선입견 없이 이 작품을 본다면 심바가 아닌 날라가 주인공이라고 여길 수도 있을 정도다. 심바가 무리를 떠나 책임감을 회피하고 편안한 하쿠나 마타타 인생을 선택할 때 날라는 고통 속에서 자신을 강하게 훈련시켰고 마침내는 종족을 살릴 방법을 찾기 위해 길을 떠난다. 전형적인 영웅서사의 주인공이다. 하지만 이토록 영웅적인 날라의 역할은 심바를 만나는 지점에서 일단락되고 만다. 심바에게 삼촌인 스카의 만행과 고향의 망가진 모습을 전해서 그를 돌아오게 만드는 것이 이 작품이 날라에게 준 운명이다. 하지만 날라는 수줍게 남자 주인공의 사랑을 갈구하여 그를 돌아오게 만드는 그런 인물은 아니다. 날라는 실력으로 심바를 이기고 심바에게 직언을 직구로 날리는 캐릭터다.

 

이렇듯 날라가 행동으로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인물이라면 심바의 가치는 혈통이다. 무위도식했던 과거 때문에 심바에게는 라피키를 매개로 아버지의 영혼이 말을 거는 기적 같은 장면이 필요하다. 이 장면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인한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심바에게 마치 아버지가 살아 돌아와 괜찮다고 토닥여주는 듯한 따스함을 전하고, 그동안 벗고 있던 책임감을 한꺼번에 돌려주는 장면인 만큼 줄리 테이머의 무대 연출이 별처럼 빛을 발하는 중요한 장면 가운데 하나다. 사실 이 작품은 한 장면 한 장면이 모두 다, 가보지 못한 아프리카에 대한 환상을 품게 될 정도로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탱해주는 가장 큰 요소인 음악은 엘튼 존, 한스 짐머, 레보 엠 등 이름만으로도 이미 보증수표 같은 작곡가들이 포진해 풍성하게 극장을 채워준다. 뮤지컬 <라이온 킹>을 보고 나면 그런 생각도 문득 든다. 심바가 물고기를 잡아먹고 배를 두들기며 ‘하쿠나 마타타’를 부르는, 재밌는 친구들과 함께 노닥노닥 늙어가는 모습도 꽤 괜찮지 않았을까 하고. 심바가 두고온 하쿠나 마타타의 삶이 너무나 즐거워 보였기에.

 

글 이수진 극작가, 공연 칼럼니스트

사진 클립서비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9년 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