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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파리에서 사진을 읽다

by예술의전당

<매그넘 인 파리>展 9.25(수) - 2020.2.9(일) 한가람디자인미술관


“당신은 이런 사람을 알고 있나요?” 얼마 전 영국 BBC는 ‘오늘의 단어’로 ‘꼰대(Kkondae)’를 선정했다. 영국식 표현에 의하면 꼰대는 언제나 자신이 옳다고 믿는, 그리고 항상 타인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나이 든 사람이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꼰대는 ‘늙은이’와 ‘학교 선생님’을 이르는 은어로 정의된다. 꼰대의 어원에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백작을 가리키는 프랑스어 ‘콩테(Comte)’다. 일제강점기에 백작과 같은 작위를 받은 친일파들이 자신을 콩테라 불렀는데, 이들을 비웃기 위해 사람들이 일본식 발음으로 그들을 ‘꼰대’라 불렀다는 것이다. 제법 그럴듯한 ‘카더라’다.

기록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사진가

세계적인 보도 사진가가 모여 있는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이하 매그넘)의 전시를 이야기하는데 뜬금없이 웬 꼰대냐고 할 수 있다. 사진 전공 학생들에게 매그넘은 꼰대 성격이 짙다. 그들의 감각을 자극하는 건 보도사진이 아닌 ‘동시대 예술’이기 때문이다. 결정적 순간, 카파이즘(Capaism, 로버트 카파의 이름에서 따온 말로, 투철한 기자 정신을 뜻한다)등은 그저 고리타분한 개념일 뿐이다.


사실 굳이 매그넘까지 갈 필요도 없다. 국내외 보도사진 역사에 족적을 남긴 사진가들이 빼놓지 않고 말하는 문장이 있다. 바로 “나 때는 척박한 환경에서 사진을 찍었어”다. 이런 말을 들으면, 보통 다음과 같이 생각한다. ‘내가 그때로 간다면 더 좋은 사진을 찍을 것이다’라고. 그때는 사진가들의 ‘셔터 욕구’를 자극하는 사건 사고가 잦았다. 렌즈만 들이대도 작품이 탄생했다. 초상권 시비도 없었다. 그래서 살아 있는 표정을 담는 게 가능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선 전쟁이 드물다. 시위도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된다. 다만, 누군가의 얼굴을 보고 함부로 애틋하게 셔터를 누르는 것은 불가능하다. 캔디드(Candid, 자연스러운 모습을 그대로 찍은 것) 사진을 잘못 찍었다가는 카메라 대신 ‘변호사 선임계약서’를 손에 쥐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매그넘이 꼰대가 아닌 콩테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는 건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필드에 나와 보면 안다. 아니 과제만 해봐도 안다. 그들이 얼마나 위대한 사진가였는지를. 보도사진이 ‘기록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충족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떤 사건 사고가 일어났을 때 한 명의 사진가가 찍은 것 같은 천편일률적인 오늘날 신문 사진을 떠올린다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또한 매그넘은 인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진으로 유명하다. <어느 인민전선파 병사의 죽음>을 촬영한 로버트 카파(Robert Capa)는 보도사진의 역할을 정립했고, 유진 스미스(W. Eugene Smith)는 <목욕하는 도모코 우에무라>로 국제사회에 미나마타병의 심각성을 호소했으며,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Henri Cartier-Bresson)이 찍은 <아킬라 데글리 아브루치>는 보도사진을 예술의 경지에 올린 것으로 평가받는다. 한편 매그넘의 선배 사진가들이 ‘보도’에 더 큰 가치를 두었다면, 오늘날의 매그넘 사진가들은 일상 풍경을 예술적으로 기록하는 데 방점을 찍고 있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마틴 파(Martin Parr), 알렉 소스(Alec Soth), 앨릭스 웹(Alex Webb), 크리스토퍼 앤더슨(Christopher Anderson)등이 있다. 이들의 작업은 형식적 부분과 아울러 미학적 측면에서도 활발히 논의되고 있다. 사진만 놓고 본다면, 매그넘을 차가운 머리에서 비롯되는 ‘기록성’과 뜨거운 가슴에서 나오는 ‘예술성’을 겸비한, 그래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사진계의 백작’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 것이다.

혁명에 낭만과 패션을 더하다

로버트 카파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데이비드 시무어(David Seymour), 조지 로저(George Rodger)는 1947년 사진 에이전시 ‘매그넘 포토스’를 설립한다. 잡지사와 통신사가 원하는 사진을 찍어야만 했던 사진가들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지키고, 사진가 스스로 매체를 결정할 수 있는 선택권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되, 사진가의 개성을 반영하는 것이 매그넘의 모토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기록성과 예술성을 융합하는 것이다. 이렇게 탄생한 매그넘의 사진은 발생한 사건 사고의 ‘상황(Situation)과 진실(Truth)을 환기’하는 데 의의를 둔다.


업무상 비밀이지만, 매체와 전시에서 매그넘 사진을 소개하는 일은 꽤 힘들다. 물론, 인터넷에서 클릭 몇 번으로 매그넘을 만날 수 있지만, 사진의 매력은 멋들어진 프린트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던가. 보는 이에게 간간한 재미를 주기 위해서는 매그넘의 깐깐한 업무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 조명, 캡션, 트리밍(Trimming), 프린트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현재 한가람디자인미술관에서 진행 중인 <매그넘 인 파리>는 이러한 과정과 노력이 집약된 전시다. 단독 사진 264점과 여덟 개 영상 속 122점 등 약 400점의 사진과 더불어 한국의 시각 디자이너, 시인, 음악가, 조향사 등이 참여한 아티스트 컬래버레이션 작업, 화려하고 낭만적인 파리의 원형이 구축된 나폴레옹 3세 시대의 파리를 재현한 공간 ‘파리살롱’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파리의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을 조명하기 위해 기획된 <매그넘 인 파리>는 2014년 프랑스 파리 시청(Hôtel de Ville)에서 열린 Paris Magnum의 순회 전시로, 2017년 일본 교토를 거쳐 우리나라에 왔다. 여기서 현지화 전략을 더한 것이 눈에 띈다. 이 ‘혁명’에 무게를 뒀다면, <매그넘 인 파리>는 여기에 ‘낭만’과 ‘패션’을 더했다. 한국인이 특히 좋아하는 매그넘 사진가 엘리엇 어윗(Elliott Erwitt)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을 집중 감상할 수 있는 특별 섹션도 준비했다. 전시장 속 파리를 떠올리게 하는 파랑, 하양, 빨강 구조물은 보는 맛을 배가한다. “당신은 지금 파리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라고 끊임없이 각인시키는 것만 같다. 더욱이 로맨틱 무드를 자아내는 향까지 코끝을 맴돈다. 마치 센강의 윤슬을 벗 삼아 가로수 길을 자늑자늑 걷는 느낌이다.

파리로의 시간 여행

<매그넘 인 파리>에서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가 떠오르는 건 나혼자만이 아닐 것이다. 전시장에 첫발을 내디딘 관람객을 맞이하는 사진들이 연대순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시간 여행’이다. 맨 처음 만나게 되는 ‘파리, 가난과 전쟁으로 물들다(1832~1944)’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발발 이전 프랑스의 혼란스러운 사회상과 1944년 프랑스 해방 당시 파리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다. 세계 대공황에서 기인한 파리의 정치적 불안, 스페인 프랑코 정권(파시스트)과 소비에트 정권(사회주의)의 친선을 촉구하는 모순성이 드러난 사진이 기억에 남는다. 이어서 ‘재건의 시대(1945~1959)’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재건을 시작한 파리의 풍경이, ‘낭만과 혁명 사이에서(1960~1969)’는 금지하는 것을 금지하라던 ‘68혁명’ 현장이 사진의 주를 이룬다. 마크 리부(Marc Riboud)가 찍은 <에펠탑의 페인트공>, 기 르케렉(Guy le Querrec)과 브뤼노 바르베(Bruno Barbey)가 촬영한 <68혁명 시위 현장> 등이 뇌리에 깊게 박혀 있다. 이와 함께 ‘파리는 날마다 축제(1970~1989)’는 늘 새로움을 추구하는 파리를, ‘파리의 오늘과 만나다(1990~2019)’는 파리지앵의 평범한 일상과 최근 일어난 파리의 사건 사고를 파노라마처럼 보여준다. 아련함과 황홀함을 내세운 패트릭 자크만(Patrick Zachmann)의 <센강의 범람>과 르네 뷔리(René Burri)의 <프랑스 혁명 200주년 기념행사 퍼레이드>는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하며, 마크 파워(Mark Power)의 <2015년 11월 파리 테러의 희생자를 추모하는 리퍼블리카 광장>과 토마스 드보르작(Thomas Dworzak)의 <노트르담 대성당 대화재>는 비통한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한다.


다섯 구획의 시대별 전시가 끝나면, 주제별 전시가 이어진다. 유머러스하고 따뜻하게 인간 세상을 바라보는 사진가, 개(dog) 사진의 대명사 엘리엇 어윗과 세계 지성사와 예술사를 바꾼 24명의 초상 사진을 소개하는 <파리지앵의 초상>, 매그넘이 포착한 런웨이의 안과 밖을 볼 수 있는 <파리, 패션의 매혹>이 바로 그것이다. 이곳에서는 파리의 다양한 표정과 분위기를 읽을 수 있다.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파리>도 눈여겨볼 만하다. 파리 거리를 돌아다니며, 그만의 스타일로 담아낸 인물과 풍경이 전시장을 수놓고 있다. 브레송 전시의 백미는 독특한 조명이다. 일반 전시장에서 쉬이 볼 수 없는, 백라이트 효과를 주는 핀 조명을 설치한 덕분에 온전히 사진에 집중할 수 있다.

예민한 산책자

<매그넘 인 파리>가 내세우는 개념은 ‘플라뇌르(Flâneur, 산책자)’다. 플라뇌르는 도시 곳곳을 떠돌아다니며 중첩된 레이어를 발견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예민하게 도시 변화를 감지하고, 관찰하며, 탐구한다. 전시는 중간 지점에서 ‘내 삶과 분리된 다양한 면모의 천태만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바라볼 것인가?’라는 화두를 던진다. 낭만적인 도시의 변천 과정에 초점을 맞춰 전시장을 산책하다가 초입으로 발걸음을 돌린다. 흘러간 파리의 시간을 박제한 사진들로 이뤄진 크로노스 위에서 전시를 톺아보는 카이로스를 마주하기 위해서다.


전시는 사진의 미감에서 더 나아가 객관성과 진실성을 생각하게 한다. ‘기록’을 담보로 하는 사진가들 전시에 연출된 장면이 등장한 것에서 시작됐다.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의 사진을 둘러싼 신화는 여전히 유효한 것일까. 아쉽게도 사진은 ‘현실’을 그대로 담아내지 못한다. 현실의 증거는 ‘사물 자체(Ding an sich)’지만, 이를 찍은 사진은 가공된 증거이기 때문이다. 사진가의 태도가 반영된 결과다. 이러한 의문에는 ‘시대별 전시’에서 흑백사진과 컬러사진이 섞여 있는 것도 한몫했다. 예를 들어, 세상을 뒤흔들었던 흑백사진 속 사방으로 흩날리던 핏방울이 실제로는 꽃잎이나 흙가루였다면 우리는 어떤 오늘을 살고 있었을까. 비슷한 맥락으로 컬러사진의 색을 과하게 조정했을 수도 있다. 사진이 주는 아름다움에 현혹돼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앞서 매그넘 사진가의 작업이 어떤 변주를 보이는지 살펴보았다. 그들의 형식과 태도는 동시대 사진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상황과 진실의 환기’를 상기해보자. 권력에 빌붙어 악의적으로 조작된 언론 사진이 아닌 이상, 기록성과 예술성을 추구하는 사진은 현실을 통찰력 있게 바라보도록 우리를 인도한다. 이를 위해서는 사진을 이미지 자체로만 보지 말고 이면에 숨겨진 내용을 끄집어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진가의 역할이다. 만약 사진이 단순한 기록에 그쳤다면 <매그넘 인 파리>는 아카이브 전시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매그넘은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차가웠던 현실의 흔적을 둘러싼 온도를 사진에 녹여냈다. 이는 고스란히 보는 이에게 전달됐고, 마음의 울림은 파리 유랑을 넘어 사진을 다른 차원에서 접근하도록 했다. 기록을 뛰어넘은 예술이 플라뇌르 역할을 다변화시킨 셈이다. 그렇다면 궁금하지 않은가. 삶의 흔적을 예술로 승화시킨, 사진 확장의 물꼬를 튼 매그넘이 누군지를. 이런 위대한 사진가들을 알아야 하는 당위성으로 점철된 이번 전시에서 사진이 선사하는, 표면적 가치를 뛰어넘은 묘미를 만끽해보길 바란다.


글 박이현 「월간사진」기자, 사진 가우디움어소시에이츠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9년 12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