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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삶을 무대로 소화하는
‘배우’의 이름으로

by예술의전당

연극 '사랑별곡' X SAC CUBE 2016 연극 '고모를 찾습니다'_ 배우 이순재, 정영숙

삶을 무대로 소화하는 ‘배우’의 이름

구태환 두 분과 작품을 함께한 연출가로서 오늘 인터뷰는 제가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이순재 배우님은 최근 연극 '사랑별곡'에서 열연을 펼치셨고, 정영숙 배우님은 SAC CUBE 2016 연극 '고모를 찾습니다(이하 고모)' 준비에 열성을 다하고 계십니다. 두 분께서는 TBC 선후배로 처음 만나셨죠?

 

정영숙 제가 1968년에 TBC 6기로 들어갔을 때 이미 하늘같은 선배님이셨어요.

 

이순재 TBC가 1964년도에 개국했는데, 내가 첫 멤버로 계약해서 1기였지.

 

구태환 그럼 2012년에 방영한 '그대를 사랑합니다'가 두 분이 처음으로 함께 출연한 TV 드라마인가요?

 

정영숙 농촌 드라마 '산하'에서 부부로 출연한 적이 있어요. 벌써 20년도 넘었어요. 그리고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 함께 연기했지요.

 

구태환 자그마치 48년 동안 이어온 인연이라 더욱 각별하실 것같아요. 이번에 제가 연출하는 연극에 각각 출연해주셨는데요. '사랑별곡'과 '고모'에 출연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궁금합니다.

 

정영숙 작품에 묘한 끌림이 있었어요. 우리 세대에게 다가오는 내용이 있더라고요.

 

이순재 작품이 좋았어.

 

구태환 연출은 시원치 않으셨나요?(웃음)

 

이순재 연출도 편하고. 요즘 동숭동을 보면 연출이 앞장서고 자꾸 배우들을 뒤에 두는데, 그러다 보니 무대와 형식은 보여도 배우들이 안 보이는 연극들이 많아. 게다가 본인이 쓰고 연출하는 작품은 그렇다 하더라도 번역극은 전혀 엉뚱하게 작품 해석을 해서 연출 자신만의 트레이드마크를 붙인다고. ‘이건 내 작품이다’, ‘내가 연출한 거다’ 하는 식으로 말이지. 그래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무조건 작품을 뒤집어엎는다든지 그런 식이야. 구식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정석으로 작품을 해석하는 눈으로 보면 마땅치 않은 경우가 많아. 구 연출과 함께 작업한 '사랑별곡'은 장윤진 극작가의 창작극이었고, 작품 자체도 물론 좋았어. 구 연출과 함께 일해 보니까 인품도 좋고 배우를 편하게 해주는 연출 같아. 배우가 표현할 여지도 열어주고.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줘서 편하게 연기했어.

 

구태환 '사랑별곡'에서 소외된 노년의 삶을 어떻게 표현하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이순재 내가 연기한 ‘박 씨’는 외롭진 않았어. 아내가 일찍 세상을 떠났을 뿐이지, 계속 혼자는 아니었으니까. 함께 살 때도 자기 멋대로 살았지. 다만 남편으로서 아내에게 못다 한 무언가가 가슴에 남았던 거야. 우리 세대는 요즘 젊은이들처럼 애정 표현에도 적극적이지 않았으니까.

 

구태환 손숙 배우님이 연기한 ‘순자’의 임종 후 ‘박 씨’ 혼자 외로이 그 집을 지키는 모습이 참 외로워 보였습니다. 정영숙 배우님은 '고모'에서 맡은 ‘그레이스’의 고독을 어떻게 표현하려고 하십니까.

 

정영숙 노인들을 자세히 보면 절대 말이 없는 게 아니에요. 말하고 또 하고 또 말하는 것이 노인의 습성이에요. 제가 이해한 ‘그레이스’는 원래 말이 없는 고독한 사람이라기보다 고립된 삶을 살면서 말을 잃은 사람입니다. 말하는 것을 잊게 할 정도의 삶인 것이죠. 주변에 대화할 사람이 없고 아무와도 만나지 않으면 할 말조차 없어요. 거기에서 오는 외로움이 있지요. 그러다 ‘켐프’를 만나게 됩니다. 몇 개월 동안 함께 생활하며 나누는 짧은 정으로 그 외로움이 점점 사라지는 거예요. 저도 동국대 이해랑예술극장에서 이순재 선배님이 출연하신 '사랑별곡'을 가슴 뭉클해 하며 관람했습니다. '사랑별곡'에서의 ‘박 씨’는 한국 남성의 고유한 정서가 여실히 반영된 인물 같아요. 아픈 아내를 간호하기보다 남편으로서 아내의 수발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모습이나 생전에 살갑게 대하지 못한 부분을 뒤늦게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요.

 

구태환 연출이 아닌 관객의 입장에서 저는 마지막에 이순재 배우님이 바윗덩어리에 혼자 앉은 모습과 툇마루 귀퉁이에 걸터앉아 나지막이 내뱉는 대사들이 가슴을 내리누르는 듯했습니다.

 

정영숙 맞아요. 그런 점에서 보면 '고모'와는 확연히 다른 외로움입니다. '사랑별곡'은 부대끼던 부부의 삶 이후에 홀로 남은 사람의 외로움이지요. 과거의 상처를 안고 홀로 남은 현실에서 감내하는 조용한 애통이에요. 반면에 '고모'는 다릅니다. 오롯이 ‘혼자’라는 외로움이에요.

 

구태환 배우로서 각자의 역할을 소화하며 어느 부분에서 공감하셨는지, 반면에 연기하기

어려운 점은 무엇이었는지 말씀해주세요.

 

이순재 나는 ‘박 씨’의 모든 부분에 공감이 되더라고. 하지만 딸을 도와주지 않은 것은 나로선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어. 어떤 면에서는 인색한 부분이 있어. 좀 더 베풀었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지.

 

정영숙 ‘그레이스’가 ‘켐프’의 수다스러운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말을 하지 않는 것에 대해 공감하기는 쉬워요. 하지만 연기로 풀어내기가 아직은 고민스러워요. 예전엔 대본 외우기가 벅차거나 잘 안 외워지는 장면을 연기할 때 우스갯소리로 ‘대사가 없는 장면은 정말 편하게 연기할 수 있는데’라고 말하고는 했어요. 하지만 점점 깨닫게 되었지요. 대사가 있으면 감정을 대사뿐 아니라 표정과 몸짓으로 모두 표현할 수 있지만, 대사가 없으면 오로지 표정과 몸짓만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게다가 말을 하지 않는다고 그저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듣는 연기’를 하고 있어야 하거든요. 바로 이 부분이 배우로서 무척 어려워요.

 

구태환 저도 그 말씀에 공감합니다. 지금 한창 연습하고 있는 '고모'도 정영숙 배우님이 오시는 날과 그렇지 않은 날은 똑같은 장면을 연습하더라도 느낌이 확연히 다릅니다. ‘켐프’ 역을 맡은 하성광 배우가 거의 모든 대사를 소화하기 때문에 대본만 보면 ‘혼자 연습해도 괜찮겠지’ 하면서도 ‘그레이스’가 들어주는 연기를 할 때의 ‘켐프’의 감정과 혼자 연습할 때의 감정이 다르더라고요.

 

이순재 '사랑별곡'은 우리 정서로 만들어진 창작극이니 배우로서 이해하는 부분이 컸지. 오히려 체호프의 작품처럼 문학적 상징이 있거나 문어체가 도드라지는 부분은 난해해서 표현하는 데 고민을 더 많이 하게 돼요. 연극에서는 극의 해석과 결론을 연출과 배우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지가 무척 중요해. 배우가 이 작품에 빠져들어야 관객도 함께 공감할 수 있으니까. 그런 면에서 ‘박씨’를 연기하는 데 크게 어려운 점은 없었어. 하지만 ‘최 씨’가 혼자 이야기할 때 같이 연기하는 게 좀 힘들었지. 조금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나눴지만, 들어야 하는 연기가 참 어려운 것 같아. 듣는 역할에서는 관객이 가까이서 봐야 알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있거든. 섬세한 표현의 연기가 필요한 거지. 그래서 극장의 규모에 따라서 연기에도 차이가 있어야 하는 거야. 큰 극장에서는 연기도 큼직큼직하게 해야겠지만, 소극장은 관객과의 거리도 가까우니 영상 연기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지. 영상 연기는 카메라가 배우의 얼굴을 가까이서 잡으니까 이런 미묘한 표현들이 잡히거든. 그런 점에서 '고모'가 소극장에서 열리고 또 정영숙 배우가 섬세한 연기에 능하니까 예술의전당에서 선택을 아주 잘한 것 같아. 기대가 돼.

삶을 무대로 소화하는 ‘배우’의 이름

대학로의 한 카페에서 만난 배우 정영숙(좌)과 배우 이순재(우)

구태환 두 작품을 포함해, 최근 중장년층 관객에게 인기를 얻은 공연이 많았습니다. 특히 한 매체는 “공연장서 동창회 모임 하는 ‘극장 마님’ 는다”라는 주제로 기사를 냈는데, 여기에 따르면 40대 이상 관객 비율이 2010년 14퍼센트에서 2015년에는 24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관객 저변이 넓어지고 있는 지금, '사랑별곡'과 '고모'가 중장년층 관객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가게 될까요.

 

이순재 어떠한 공연에서라도 배우들이 제대로 연기를 못했다면 관객은 좋아하지 않을 거야. 노련한 배우들이 열정을 담아 연기하는 모습을 관객들이 보러 와주는 거겠지. 게다가 희극과 비극을 동시에 담고 있는 노년의 삶은 연극무대에서 충분히 좋은 소재가 될 수 있고. '사랑별곡'에서도 관객의 80퍼센트 정도가 중년 관객이었어. 중장년층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가 공연으로 많이 만들어지고 다양한 연령층의 관심을 끌게 되는 건 배우로서도 반가운 일이야.

 

정영숙 바람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한두 번 재미로 공연을 보는 것도 있겠지만, 하나의 여가생활로 정착이 된다면 더 좋을 것 같아요. 연극이라는 예술 장르는 특정 세대의 전유물이 아닌 모든 세대가 느끼고 감상하는 것이니까요.

삶을 무대로 소화하는 ‘배우’의 이름

구태환 조금 무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여쭙겠습니다. '사랑별곡'과 '고모'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노년의 죽음’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지금 우리 사회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아니기에 관객들도 더욱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연기자로서 보시기에 이러한 연극들이 공연계와 우리 사회에 어떤 의미를 던져줄까요?

 

이순재 우리 사회의 노령화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책적인 부분이 필수적이겠지만, 우리 개개인이 할 수 있는 선에서는 노령화 부류가 사회에 부담이 되어선 안 된다고 생각해. 70, 80대가 되어서도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람들도 점점 많아지고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노년층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건강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해. 공연계 역시 메시지를 담아서 노령화 사회가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로 거듭 인식될 수 있게 해야겠지.

 

정영숙 지금이 과도기인 것 같아요. 사회가 점점 삭막해지고, 여러 사건사고로 다치는 사람도 많고…. 공연을 보면서 자신의 삶을 돌아볼 기회들이 생기면 좋겠어요. 젊은 사람 누구든 늙지 않는 사람 없으니까요. '고모'도 결국 나이를 떠나 고립되어 외로운 사람들의 이야기거든요. 앞으로 다가올,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외로움’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구태환 말씀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마무리하며 마지막으로 이번 '고모'에 출연하시는 정영숙 배우에게 격려의 말씀 부탁드려요.

 

이순재 훌륭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가 연극무대에 선다는 것만으로도 기대되는 일이야. 유능한 연기자들이 TV 밖으로 나오는 것도 환영할 일이고. ‘배우’는 장소를 떠나 본질적으로 ‘연기’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니까. 이런 말이 있어. 영화는 감독의 것이고, 드라마는 작가의 것이고,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는. 영화나 드라마나 연극이란 장르를 따지지 않고, 배우라면 어디에서라도 본연의 역할인 연기를 하면서 역량 발휘를 하는 것 같아. 이번에 좋은 작품이 나올 것 같아.

 

구태환 제게도 한 말씀 부탁드려요.

 

이순재 연출? 괜찮아. 잘할 거면서. 이번 공연 포함해서 앞으로 다양한 규모의 여러 작품으로 만나면 좋겠어.

 

인터뷰 구태환 (연출가) 정리 예술의전당 홍보마케팅부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6년 1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