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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컬처 ] 사랑을 이야기하는 1월의 공연들

낭만이라는 전위;
사랑밖엔 난 몰라야 한다

by예술의전당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 1.15(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뮤지컬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1.22(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 2관

낭만이라는 전위; 사랑밖엔 난 몰라야

낭만의 자리

요즘 대학생들에게 청춘의 낭만 운운했다가는 돌 맞기 십상이다. 입학하자마자 취업 준비에 매달려야 하는 현실에서 낭만적인 대학 생활이란 70년대 청춘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얘기니 말이다. 자기만의 고래를 찾아 동해바다로 떠나는 병태의 이야기에 공감할 청춘이 과연 있을까? 젊은이에게 낭만이란 꿈과 방황 사이, 도전과 객기 사이에 있는 실패의 특권이어야 한다. 불가능과 비현실을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낭만의 멋이니까. 하지만 실패할 권리를 빼앗긴 청춘들에게 낭만의 불확실성은 안전의 확실성에 언제나 자리를 내줄 수밖에 없다. 그 확실성이란 게, 공무원이 됐든 정규직이 됐든,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낭만은 이제 더 이상 청춘의 수식어가 아닌 거다. 하지만 정말 단언 할 수 있을까? 이곳의 젊은이들에게 낭만 따위가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다고, 청춘의 낭만은 죽어버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얼마 전 광화문에서는 사뭇 감동적인 연주가 있었다. 집회가 시작되기 한참 전이어서 아직 사람들이 모여들지 않았을 때 갑자기 한 청년이 세종문화회관 옆 계단 가운데 서더니 트럼펫을 부는 거다. 그러더니 첼로를 든 청년들이 앞자리에 앉고 바이올린을 든 청년들이 계단에 오르고 노래를 부르는 청년들이 그 뒤를 빼곡하게 채우더라. 차례대로 등장하는 청년 음악가들과 그들을 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로 계단 주변은 금세 가득 찼다. 그들의 연주는 길지 않았다. 뮤지컬 넘버 ‘민중의 노래’와 아리랑 그리고 애국가. 하지만 그들이 광장의 시민들에게 준 여운은 꽤나 길었다. 집회의 광장에서 클래식 연주자들의 공연을 볼 수 있다니. 음악을 공부하는 청년들이 자기네들의 언어로 세상을 향해서 발언했던 거다. 고상하고 아름다운 소리로 추악하고 비틀린 현실을 바로잡는 데 함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셈이다.

 

이들의 공연을 보면서 문득 베드란 스마일로비치가 생각났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내전으로 전쟁터가 된 사라예보 한복판에서 알비노니의 아다지오를 연주했던 첼리스트. 빵을 사러 시내로 나온 시민들에게까지 폭격을 쏟아부을 만큼 사라예보의 내전은 잔혹했다.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은 스물두 명의 영혼을 위로하고자 서른다섯 살의 젊은 예술가는 그다음 날부터 그들이 쓰러진 곳에서 첼로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총격전의 한가운데서 첼로를 연주하는 한 인간의 모습을 상상해보시라.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고요히 첼로의 선율이 퍼져나가자 총성은 멈추고 사람들이 모여 들었단다. 이 연주는 22일간 계속되었다. 참혹한 공간에서 환상적인 시간이 흘렀던 거다. 증오를 이기는 힘은 위로임을 증명한 시간이기도 했다.

 

분노를 폭력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표현할 줄 아는 상상력은 예술의 것이지만, 그 예술을 지상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태도는 낭만의 것일 터다. 낭만은 좀더 나은 세상과 좀 더 따뜻한 인간을 꿈꾸는 상상력이자 행동력이다. 따라서 낭만은 결코 말랑하지 않다. 보통 낭만이라고 하면 최백호의 노래에서처럼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쓸쓸한 상념에 젖는 감상을 떠올릴 테지만 그것은 낭만에 대한 큰 오해이다. 감상은 뒤를 돌아보느라 청승맞지만 낭만은 앞을 바라보기에 저돌적이다. 그래서 세상이 나아지지 않고 인간이 따뜻함을 잃을 때 낭만은 이상향을 향해 진격하는 과격한 에너지가 된다. 그 에너지가 바로 예술이다. 예술이 철학이나 종교보다 위대한 까닭은 예술만이 행동하는 힘을 가졌다는 데 있다. 독일의 미학 사상가 실러가 그랬다. 철학은 행동을 자극할 수 없고 종교는 이성을 확신시킬 수 없지만, 예술은 이성적으로 행동하게 하는 힘을 가진다고 말이다.

 

광장에 나온 젊은 예술가들과 전쟁터에서 연주를 이어간 첼리스트가 증명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의 연주는 그 어떤 선동보다도 강력한 정치적 행동이었다. 첼로와 바이올린과 트럼펫의 연주를 통해 분노는 슬픔이 되고 함께함은 위로가 되었던 거다. 위기와 혼란의 시공간에 갑자기 개입한 아름다움의 힘. 삶이 예술이 되는 순간을 꼽으라면 바로 이때일 거다. 이런 조화를 이뤄내는 상상력이야 말로 낭만의 힘일 것이다. 누가 낭만을 죽었다 하는가. 혼란의 시대에 만인의 광장에서 젊은 예술가들이 만개하는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청춘의 낭만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것을.

혁명의 힘, 사랑

낭만은 원래부터 혁명의 자리에서 가장 빛났다. 역사적으로 보자면 프랑스 혁명까지 거슬러가야겠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에 눈이 반짝이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언제나 낭만의 기운이 넘쳐났더랬다. 낭만의 기운이란 다른 게 아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는 대로 행동하라’, ‘아는 것이 힘이다’를 외쳤던 계몽주의자들은 사람들이 행동하지 않는 까닭을 무지에서 찾았다. 이 불의와 모순과 어리석음의 본모습을 알게 된다면, 무엇이 옳은 것인지 제대로 깨달을 수만 있다면, 사람은 누구나 아는 대로 행동할 것이라는 게 그들의 믿음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한 것이 있으니 아카라시아akarasia, 즉 ‘사람은 알면서도 행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를 망가뜨린 사람들이 지식과 공부가 부족했기 때문에 그런 범죄를 저질렀겠나. 욕망과 탐욕은 옳음과 좋음을 쉽게 오염시킨다.

 

낭만주의자들이 꿈꾼 세상의 모토는 단순하다. 아는 대로 행동하는 인간이 되자. 하지만 어떻게? 그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게 있다. 아는 것을 행동하는 데까지 잇는 유일한 힘, 바로 사랑이다. 사랑은 사람으로 하여금 무언가를 하게 만든다. 안 쓰던 편지를 쓰게하고 하다못해 종이학이라도 접게 하지 않던가.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행동인 셈이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건 사랑을 빙자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작은 사랑의 행동이 만들어내는 결과는 놀랍다. 전혀 다른 사람인 너와 내가 하나가 된다! 그 하나됨 안에서 변화하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은 더 놀라운 일이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혁명이라면 그 혁명의 시작은 나 자신의 변화로부터 비롯될 터. 사람의 마음이 변하고 표정이 변하고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는, 그 어려운 일을 사랑이 해내는 거다. 낭만을 완성하는 최종적인 조건은 오직 하나다. 사랑.

 

사랑이 일궈내는 놀라운 풍경은 도처에 많다. 사라예보에서 있었던 또 하나의 콘서트는 그 좋은 예이다. 스마일로비치의 연주를 감상한 사람들 중에는 조앤 바에즈도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구냐, 호사가들에게는 밥 딜런의 연인으로 유명하고,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반전과 평화를 노래하는 가수로 유명한 아티스트다. 인권운동가이자 포크 가수인 그가 전쟁터 한복판의 극장에서 방탄조끼를 입고 노래를 부를 때 수백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단다. 언제 총격이 있을지 모르는 상황에서 목숨을 내걸고 그들이 한 일은 함께 노래를 부르는 것이었다. 고작 노래 말이다. 그가 사라예보를 찾은 이유는 하나였다. ‘사랑을 표현하고 함께 음악을 나누기 위해.’ 그는 전쟁터를 찾아왔고 사람들은 극장을 찾아왔다. 뜨겁고 무거운 사랑이다. 상황에 짓눌리지 않을 힘은 오직 그 무게와 온도에서만 나온다. 서로를 마주 비벼 온기가 생기고 유대가 생기고 함께함의 존재감이 생길 때,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낭만이라는 전위; 사랑밖엔 난 몰라야

사랑하라, 희망 없이

이런 거창하고 숭고한 사랑은 나의 몫이 아니라고 생각할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낭만적인 사랑은 거창하기는커녕 소소한 감각의 언어로부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보고 싶고, 함께 있고 싶고, 손을 잡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당신에게도 놀라운 힘을 발휘할 사랑이 충분한 셈이다. 하지만 감각의 즐거움은 사랑의 시작에 불과하다. 사랑의 본질은 순간이 아니라 지속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첫눈에 반하는 사랑은 강렬하고 멋지지만 오랜 시간 지속하는 사랑은 아름답고도 숭고하다. 빠져드는 사랑에서 지속하는 사랑으로 나아갈 때 사랑은 감각의 차원에서 인격의 차원으로 승화되게 마련이니까. 하지만 이런 사랑을 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함께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하고 자기의 틀을 깎아내야 하니 말이다. 사랑을 하면 행복하다? 천만의 말씀이다. 사랑은 언제나 고민하게 하고 망설이게 하며 한계에 직면하게끔 만든다. 하지만 그 힘든 사랑이 몸과 정신이 됐든, 이성과 감정이 됐든, 나와 타인이 됐든, 결국 화해시키고 하나로 만들 것이다. 독일의 작가 슐레겔은 이렇게 말했다. “오직 사랑과 사랑의 의식을 통해서만 인간은 인간이 된다.” 고통스럽다 해도, 기다려줘야 해도, 설사 희망조차 가질 수 없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사람을 사랑하고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바로 그 사람이 사랑을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세상은 바뀔 것이다.

 

철없어 보이는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는 작품이 1월의 무대에 오른다. <로미오와 줄리엣>. 끝내 연인의 죽음으로 끝나는 비극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맨 마지막 장면에 있다. 죽음을 불사한 두 사람의 뜨거운 사랑이 긴 세월 이어진 차가운 증오를 녹여냈으니. 마지막 장면이 너무 짧아 미처 음미하기도 전에 막이 내려가겠지만, 셰익스피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얘기는 젊은 죽음을 대가로 지불하면서 얻은 화해와 공존일 것이다. 또 다른 젊은 죽음을 맞지 않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이와 결이 다른 사랑 이야기를 찾는다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도 훌륭하다. 시인 백석과 기생 자야의 사랑을 바탕 삼은 뮤지컬인데, 피아노의 선율과 백석의 시가 정말 아름답다. 천억 원이라는 재산을 기부하면서 자야 여사는 이런 말을 남겼단다. “이 돈이 백석의 시 한 줄만 못 하다!” 긴말 필요 없다. 낭만은 이런 것이다.

 

글 정수연 (연극학 연구자)

 

*그동안 ‘호모테아트리쿠스; 연극하는 인간’을 애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위 글은 월간 「예술의전당과 함께 Beautiful Life!」 2017년 1월호에서 전재한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