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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 ] 여행작가 채지형

길은 학교, 여행은 공부

bySRT매거진

세계일주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마음은 복잡했다. 1년 만에 집에 간다는 기대감과 숙제를 끝내지 못했다는 불안감이 물과 기름처럼 합쳐지지 못하고 있었다. 세계일주까지 하고 나면 성인(聖人)이라도 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여행을 떠날 때와 비교해, 그다지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길은 학교, 여행은 공부

거친 길이 더 좋아

길이 학교였고 여행이 공부였다는 것을 절절하게 깨닫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다. 어느 날 나를 들여다보니,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바쁘게 살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옅어져 있었다. 다른 사람의 눈보다 내마음을 더 들여다보고 있었다. 낭비라고 생각했던 시간의 틈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미소가 잦아졌다. 마음의 근육이 생긴 것이다. 여행은 돈을 넣으면 커피를 내놓는 자동판매기가 아니라, 시간과 함께 발효 되면서 작품이 되는 된장이었다.

 

여행에서 배운 첫 번째 교훈은 쉬운 길보다 거친 길이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앙코르와트를 보기 위해 태국 방콕에서 캄보디아의 시엠립으로 가는 길이었다. 방콕에서 출발한 미니버스는 잘 닦인 태국의 도로를 타고 비호처럼 날았다. 창밖 풍경을 보려는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햇살이 적당히 유리창으로 들었고 에어컨 바람도 솔솔 나오고 차는 리드미컬하게 달렸다. 눈을 뜨고 창밖을 보려 해도 무거운 눈꺼풀은 내려간 채 올라오질 못했다. 결국 잠 속으로 빠졌다.

 

그런데 국경에서 시엠립까지는 상황이 180도 달랐다. 비포장도로에 비까지 와서 도로는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다. 미니버스는 그 길을 널뛰기를 하듯 달렸다. 가끔 도로에 구멍이 없는 길이 나오면 오아시스가 나타났다고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언제 머리가 천장에 가서 부딪힐지 모르는 상황 이었기 때문에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긴장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느리게 간 덕분에 유리창 밖으로 흐르는 시골 풍경을 마음껏 볼 수있었다.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방콕에서 출발해 국경에 도착할 때까지 말 한마디안 하던 승객들이 서로 눈을 마주하고 가방에 챙겨온 주전부리들을 나눠 먹기 시작했다. 편안하고 좋은 길을 갈 때는 졸리고 재미가 없더니, 힘든 길을 달리게 되자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풍경도 보며 즐거움을 느끼게 됐다. 참 아이러니했다. 비슷한 일은 일상에서도 자주 일어났다. 그때마다 힘든 길이 더 많은 것을 남겨줄 것이라고 믿으며, 기꺼이 받아들였다.

길은 학교, 여행은 공부

걸을수록 겸손해졌다

여행을 다니면서,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너무 작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무리 이 세상을 걷고 또 걷는다고 해도 결코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넓고 깊은 세상을 조금 맛본 것을 가지고 어깨를 으쓱 하고 있었다니, 과거의 내 행동에 얼굴이 붉어졌다.

 

길에서 겸손을 배우게 될 기회는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울림은 거대한 자연 앞에 있을 때 왔다. 아르헨티나 남부의 엘 칼라파테를 여행할 때, 눈앞에서 우르르 쾅쾅 무너지는 빙하를 보면서 형언하지 못할 경건함에 온 마음이 차분해졌다. 어마어마한 빙하의 몰락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세상 모든 것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드리고 있었다.

 

여행을 하며 만난 사람들은 겸손을 가르쳐주는 더없이 좋은 선생님들이기도 했다. 영국 친구와 이야기를 할 때였다. “영국 사람들은 참 좋을 것 같아. 세계 어디를 가도 다 말이 통하잖아.” 친구가 말했다. “그래서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게을러. 다른 언어를 배우려고 하지 않지. 동양인 친구들을 봐. 영어, 일본어, 중국어, 스페인어까지 공부하면서 여행을 다니잖아. 영어를 쓰는 사람들은 반성해야 해. 나는 요즘 중국어를 배우는 중이야.” 자연과 사람들을 통해 배운 겸손 덕분에 나는 오늘도 한걸음 더내딛는다.

길은 학교, 여행은 공부

노트와 펜, 미소면 충분해

기록의 소중함을 알게 해준 것도 여행이다. 여행할 때는 오만가지 생각의 바람이 마음에 들어온다. 그때 그 순간의 생각과 느낌은 다시 오지 않는다. 바로 그 순간에 메모하며 붙들어놓아야 한다. 잊지 못할 순간일수록, 아는 단어를 총동원해서 적어놓아야 한다. 기록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순간을 기록하면서, 여행은 더 재미있어졌다. 기록한 것들로 글을 쓰고 책을 만들고 사람들과 여행이야기를 나눌수록, 여행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넓어지고 깊어졌다. 여행이 가르쳐준 가장 큰 것은 ‘미소의 힘’이다. 물과 공기처럼 사소해 보이지만 중요한 것. 그것이 바로 미소다. 여행을 하기 전까지는 미소의 메가톤급 파워를 몰랐다.

 

웃음의 위력을 알게 된 후 내 여행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미소를 지으며 세상을 바라보니 다른 사람들도 미소로 화답했다. 미소를 받으면 마음이 전해진 것 같아 행복감이 스르르 번졌다. 눈빛 한 번으로 이런 행복감을 안을 수 있다니, 웃음의 힘은 체험할수록 놀라웠다. 세계여행 대선배인 김찬삼 선생도 “미소로 대화하는 것이야말로 신이 주신 최상의 의사소통”이라고 말했다.

 

웃음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없던 인연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우리를 위험에서 구해주기도 한다. 미소를 짓는 것은 우리가 쉽게 할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일. 앞으로도 여행에서 배운 웃음의 힘, 웃음 바이러스를 여기저기에 더 많이 살포하고 다닐 생각이다.

글·사진 채지형

모든 답은 길 위에 있다고 믿는 여행가. 길을 헤매다 집에 돌아오면 ‘공부 많이 했다’고 칭찬해주던 아버지와 함께 대한민국 곳곳을 여행했다.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10년간 기자로 일한 후, 마음에 품었던 세계 일주를 감행, 360일간 지구별을 걸었다. 여행, 사진, 글로 세상과 소통하길 좋아하고 시장을 돌아다니며 사람을 만나고 표정이 재미난 인형을 모은다. 펴낸 책으로는 <안녕, 여행> <오늘부터 여행작가> <인생을 바꾸는 여행의 힘> <지구별 워커홀릭> <까칠한 그녀의 스타일리시 세계 여행> <어느 멋진 하루 TRAVEL&PHOTO>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