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여행]by 디아티스트매거진

"나 다음 주에 대구여행 간다." 이 말 한 마디에 대구에서 올라온 친구는 물론, 대구 여행 경력이 있는 자들은 모두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봤다. "거기에 딱히 볼 거 없을 텐데…" 아마 대구로 내려간다고 말한 그날부터 족히 3번은 들었던 말이었다. 그렇지만 나도 딱히 할 말이 있는 건 아니었다. 왜 내려가냐는 물음에 "그냥..."이라고 답하는 수밖엔, 없었다.

 

보통 여행을 가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친구들과 좋은 시간을 보내려고. 대개 친구들과 추억을 쌓기 위해 놀러갈 때 많이 이런다. 둘째, 보고 싶은 걸 보고 먹고 싶은 걸 먹으려고. 혼자든 여럿이든 상관은 없지만, 이런 경우 대개 사진의 피사체는 풍경 아니면 먹거리다. 셋째, 여행을 통해 뭔가를 배우려고. 어쩌면 여행의 가장 기본 목적에 충실한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국내보다는 대개 해외로 나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나는 이 세 가지 경우 중 아무 데도 들지 않았다. 말하자면 나는 여행의 목적이 없었다. 무슨 목적이나 이유가 있어서 여행을 갔다기보다는 여행을 가서 목적과 이유를 찾고 싶었다. 졸업을 앞두고 있던 올 한 해동안 나는 끊임없는 의미 '중독'에 걸려 있었다. 왜 내가 굳이 그걸? 왜 내가 굳이 거길? 어쩌면 이런 계산적인 스스로에 질려서 무작정 떠났던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하여 대구행 열차를 타고 흔들거리는 열차카페에 서서 이런 생각으로 서울을 떠난 것으로 마무리지었다. '여기만 아니면 돼.' 그런 탓에 이번 여행에는 세가지가 없었다. 목적이 없었고 함께 가는 사람이 없었고 심지어는 갈 곳과 먹잘 곳도 없었다. 나는 다만 순례자의 마음으로, 떠난다는 그 사실에만 흠뻑 취한 채 대구로 내려갔다.

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혼자인 나와 함께해준 튜브랑 열차카페 안에서.

실패한 사진 촬영

대구역에 내리자마자 바로 1호선으로 갈아타고 신기 역으로 향했다. 대구 친구가 말하길 지하철에 사람이 많지 않다던데 과연 그 말이 사실이었다. 시간이 오후인지라 사람이 많지 않은 것도 있겠지만, 늘 북적거리는 서울 지하철 2호선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거운 가방과 사진기를 들고 어벙하게 신기 역에 내려 대구 저탄장을 향하니 영락없는 준(準)도시의 모습이었다. 도심이라고 하긴 뭣하지만 그래도 도시에 속하는. 약간은 공동체의 때가 묻어 있고 약간은 개인주의자의 모습이 비치는.

 

그런 곳을 한참 통과하여 저탄장에 도착하니 그때부터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대구에서 눈 구경은 귀한 것이라고는 하나, 한참 여행 중인 이때 눈을 만나니 조금 곤란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 와서 무를 수도 없는 노릇, 나는 모자를 덮어쓰고 저탄장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사실 저탄장을 찾은 이유가 있긴 있었다. 검색을 해보니 사진작가들에겐 제법 유명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특히 철거 예정인 오래된 석탄 저장고는 매우 그로테스크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갖고 있어 괴기스러운 사진을 찍고 싶을 때 찾아간다는데, 내가 갔을 땐 이미 철거됐는지 찾아볼 수 없었다. 한 할머니를 만나 "저탄장이 어디에요?"라고 물어보니 "저기."라고 대답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 근방 일대를 모두 저탄장이라고 하는 모양이었다. 즉, 이미 사라진(혹은 내가 찾을 수 없었던) 그 석탄 저장고는 물론, 현재 활발히 돌아가고 있던 이곳들까지도 모두 저탄장이라고 하는 듯했다.

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석탄 산업은 사장되고 있지만, 여전히 저탄장은 활발히 돌아가고 있었다.

원래 찍고자 했던 사진도 찍지 못하고 저탄장을 둘러보고 있으니 실망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나는 또 의미와의 싸움을 시작했다. 왜 내가 여길 왔을까. 차라리 대구 동성로나 갈 걸. 아니, 그냥 집에서 따뜻하게 잠이나 자는 게 더 나았을 지도 몰라. 도대체 여길 온 이유는 뭐지? 그런 한탄을 하며 걸어가니 어느새 길도 잃어버렸다. 기상악화 때문인지 핸드폰 지도도 말을 듣지 않았다. 사람도 많이 다니지 않는 탓에 길을 물어볼 사람도 없었다. 영락없이 이곳 저탄장에서 나는 미아가 돼버렸다.

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길을 헤매면서도 저탄장의 모습을 틈틈히 찍었다. 내리는 눈발이 석탄 저장고의 느낌을 확 살려준다.

그런데 길을 걸어가다 보니 아까 만났던 그 할머니와 또 마주쳤다. 물론 나는 단번에 알아보지 못했다. 눈발에 머리가 찰랑찰랑하게 젖은 할머니가 "아까 그 사진 찍던 청년 아니요?"라고 물으니 나 역시 그 할머니가 아까 전에 대화를 나눴던 그분이었음을 알아챘다. 짧은 시간 동안 같이 길을 걸어가며 두런두런 이야길 나눴다. 왜 내려왔는지, 뭘 촬영하러 왔는지, 할머니는 어디 사는지 등. 할머니 말에, 이곳은 재건축이 쉽지 않다니 분명 아직 내가 원하던 그곳이 남아있을 법도 한데 이상하게 나는 찾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할머니의 안내에 따라 나는 무사히 저탄장 입구로 돌아올 수 있었고 몇 시간 전에 예약한 숙소로 향할 수 있었다.

과연 여기만 아니면 될까

시계를 보니 어느덧 2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매우 춥긴 했지만 그렇게 오래 있진 않았던 것 같은데. 하지만 분명 시간은 지나가 있었고, 나는 덜덜 떨며 숙소로 돌아와 한참을 곰곰히 생각했다. 내가 여기에 온 건 잘한 걸까.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답답함을 느끼며 '여기만 아니면 돼.'라는 일념으로 대구로 내려왔지만, 사실 여기만 아니면 된다는 생각은 마치 프랙탈처럼 잘게 쪼개지기만 할뿐 끝없이 유사하게 반복하는 갈등이었다. 그 갈등은 대구역에서, 신기역에서, 신기역 지상도로에서, 그리고 저탄장에서 계속 솟구쳤다.

 

우리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끝없이 의미를 추궁당한다. 내가 여기에 존재해야할 이유는 무엇인지 증명하고자 노력한다. 어쩌면 그건 화폐처럼, 개인의 개성이나 능력이 조금씩 다 비슷비슷해진 까닭에 있지 않을까. 졸업을 앞둔 채 나는 나의 사용가치를 증명해야한다는 사실이 너무 답답했고 급기야 대책없이 서울을 떠났었다. 그럼에도 여기까지 와서 나는 스스로에게 존재가치와 의미를 증명하고 또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하지만 삶의 의미를 찾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또 그 의미를 찾았다한들 정확하게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어쩌면 다들 그저 '이곳만 아니면 돼.'라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힘겹게 버티며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지. 그래서 종교에 귀의하거나 돈에 미쳐 살거나 관계에 중독된 채 살아가는 것일 테다. 나처럼 의미에 매몰된 채 살거나.

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의미도 목적도 없어도 괜찮아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와 생활에 힘쓰는 할머니. 그저 그곳에서 묵묵히 삶을 보여줄 뿐이다. 

그러니까 결국 나는 이런 시간이 필요했던 거다.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이유도 없어도 그저 괜찮다고 말해줄 수 있는 곳. 혹은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일 수 있을 시간. 그리고 저탄장은 그런 곳이었다. 마음껏 걸어다녀도 신경쓰지 않고 삶의 감각들만이 살아있는 곳. 그곳의 노동자들은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통해, 살고 있는 주민들은 정적인 분위기를 통해 나에게 그렇게 말해주고 있었다. 의미도 목적도 관계도 없어도 괜찮아. 살아가고 있다는 것만이 삶이니까.


[디아티스트매거진=이준건]

2016.01.06원문링크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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